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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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적으로 철학자들의 주요 사유에 대해서 읽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철학사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탓. 두터운 책인데도 선뜻 도전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다운 러셀의 <서양철학사>란 적확한 제목도 독서의 의지를 지피는 불씨가 되었다.

 

가장 큰 장점은 고대철학, 카톨릭 철학, 근현대 철학으로 구분하여 주요 철학자들의 대두 배경을 시대와 연관지어 설명한 점이다. 이러한 장점은 특히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을 설명한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보통 철학을 다룬 책들에서 이슬람의 중요성 내지 영향은 간과되기 일쑤인데, 러셀은 이슬람 철학이 독창적인 학문적 결과를 견인하지는 못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통해 논리학이나 형이상학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그리스와 인도의 자료에서 수학, 천문학의 발전을, 페르시아 신앙과의 혼합을 통해 종교 철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있다.

 

또 하나는 신학에서 벗어나 독자적 행로를 쫓는 철학의 발전사를 통해 철학의 학문적 경계를 일관성있게 명확하게 그려나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신학, 과학, 철학 등 한 때는 융합되었던 학문의 경계를 간명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신앙과 사유와 증명을 혼돈하여 발생하는 여러 사태에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역사와 사회와 맥락을 벗어나는 사유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철학이 사회 변화의 선도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 변화가 철학의 태동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모호해지기도 한다. 러셀은 분명하게 철학자는 결과이자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안타까운 것은 러셀의 풍부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에 새삼 감탄하기에는 훌륭하지만, 배경 지식이 부족하면 저자의 설명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난망하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서양사를 꼼꼼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대목도 있다. 따라서 일종의 주석서로 서양철학사의 주요 연대기가 함께 수록되었더라면 좀 더 친절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도 다수 등장하고, 철학자의 주요 주장이나 비판 사항을 일차적으로는 러셀이 한번 거른 후에 제시하기 때문에, 밀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관심 있는 철학자의 경우에는 관련 시대 배경과 주요 사상을 별도의 책과 비교하면서 읽어나가면 심도있게 공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완독하는 데 어려움은 많지만, 읽고 나면 새롭게 알고 싶은 시대와 철학자가 생기며, 역사 공부의 의지를 북돋우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그들은 각자 처한 사회 상황과 각 시대의 정치와 제도의 결과물이자, 후대 정치와 제도의 근간이 되는 신념 체계의 형성에 기여하는 원인 제공자이다.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철학자는 저마다 진공 속에 있는 듯이 등장한다. 이와 반대로 나는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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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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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이동할 때 가장 불편한 지역이 어디인지 묻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삶과 개념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파고든다. 관념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에서 어떻게 비틀어지고 뒤집어지는지 여성학자의 시선은 낮은 곳으로 향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계급, 성, 장애, 학력, 나이 등에 따라 차별과 타자성을 겪는 소수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임을 다시 각성하게 된다.

 

그 어느 나라보다 가족 중심을 지향하면서,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녀 교육에 몰입하거나 가부장주의, 출세지향주의로 치닫는 도구적 가족의 모순을 파헤친 대목이나 성매매와 국가주의가 결합하면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문제와 성매매 피해 여성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비합리성의 문제를 지적한 대목 등이 특히 공감이 된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진골이 될 수 없기에 소수자의 차별, 인권에 집중해야 하고, 끊임없는 탈중심성의 지향을 통해 주체적 자각을 견인해 내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나아갈 방향일 것이다.

 

다만, 페미니즘이 또 하나의 중심이 되면서, 페미니즘적 시각과 언어, 관습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또 다시 교화의 대상이 되고, 타자화되는 데 대한 성찰이 부족한 부분이 조금은 아쉽다.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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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 홍신 세계문학 5
허먼 멜빌 지음, 정광섭 옮김 / 홍신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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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 론 하워드의 <하트 오브 더 씨> 등 연이어 모비딕이 모티브가 된 영화가 개봉되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백경>의 그 무엇이 동양과 서양의 감독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켰을까 하는 호기심이 첫 장을 펼치게 한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다.

 

멜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추방자가 된 이스마엘의 이름을 차용한 주인공을  관찰자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모비딕을 쫒는 늙은 광기어린 에이헤브 선장, 규율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그리고 고래 산업을 통해 돈을 쫓아 항해에 나선 인간 군상들을 촘촘히 따라가다보면 <백경>은 단순한 고래잡이 모험담일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백경>은 단순한 모험담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정신 분석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만한 풍성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때 직접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멜빌은 스토리 중심의 소설 전개를 넘어서서 박물관학의 정수를 소설에 담아야겠다는 일념을 표출하기라도 하듯, 고래잡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상을 담는다. 때로는 지리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물학을 담은 생물 도감이 되기도 했다가 법률 해석을 담는 법학서로 변모하기도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하며 영생을 구하는 신학서가 되었다가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에 천착하는 철학서로 뒤바뀐다.

 

인상깊었던 것은, 1500년대, 고래산업을 둘러싼 네덜란드의 법률 발전상. 첫번째 고래잡이 배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았는데, 불행히도 배가 작아 고래를 붙잡아두지 못한 경우, 재력과 규모에서 앞서는 두번째 배가 어부지리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작살의 소유는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 작살은 고래를 잡겠다는 의지로 던진 것이므로, 고래에 꽂힌 경우 작살의 소유는 고래에게로 귀속되며, 두번째 배가 작은 노력으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고래와 더불어 작살의 소유권까지도 인정받는다는 식이다. 멜빌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고래 잡이를 통해 자본의 노동 잠식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또, 에이헤브는 한 쪽 다리를 일본해 근처에서 잃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울산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동해에서 고래가 자주 출몰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보면, 실상은 모비딕을 처음 만난 곳은 동해 근처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세계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다보니, 잘 인식되면서도 미지의 공간으로 일본해로 기술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도 남는다.

 

오직 모비딕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나서는 에이헤브는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인가, 아니면 끝내 죽을 줄 알면서도 숙명의 굴레를 담담히 받아들인 존재인가. 단번에 명쾌한 답을 주는 대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백경>이 아닐까 싶다.

스타벅..세번째 나의 영혼의 배는 항해에 나가네.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나 그 후는 영원히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지. 스타벅. 어떤 자는 썰물 때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또 어떤 자는 밀물 때에..나는 지금 방금 부서지려는 파도의 꼭대기에 있는 것 같군. 나는 나이를 먹었어. 자아. 악수하세...그들은 손을 마주잡고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스타벅은 눈물을 글썽거렸다..가지 마십시오! 선장님 가지 마십시오!..그러나 이이헤브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소리를 크게 질렀고 보트는 무섭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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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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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없는 신자유주의의 신봉, 정치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 정의와 도덕이 와해된 사회의 결말은 어떻게 방향없이 질주할 수 있는지,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아찔한 결과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미국이 직면한 현실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질 정도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바로잡지 못하는 시장의 한계, 인지포획과 관념전쟁을 통해 정책 권력을 장악해 불평등을 더더욱 심화시키는 기득권의 횡포, 책임과 징벌없는 법치주의가 뒷받침하는 금융권의 약탈, 1%를 위한 거시 경제정책과 중앙은행의 독점 권력이 재생산하는 구조화된 불평등 등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무신경하게 속을 수 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경제 지표 뒤에서, 정작 기회 균등은 사라지고, 불평등의 추가 더 기울어가는데도 속수무책인 관료와 학계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한다는 저자의 대안은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상위 1% 위주의 기득권 개혁을 위한 대안으론는,  금융 부분의 책무성과 관련된 규제를 강화할 것, 독점금지, 기업의 지배구조나 파산관련 법률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 기업에 대한 각종 보조금 등 무상 공여 부분을 폐지할 것, 사법 개혁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할 것, 조세개혁을 통해 조세 회피 통로를 차단하고, 소득세, 법인세 등 누진성을 강화할 것, 유산세 제도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부호 계급의 출현을 방지할 것 등을 제안한다.

 

중하위 계층에 대해서는 교육접근권을 개선하여 기회의 형평성을 보장할 것, 저축을 지원하고 전국민 의료보장을 시행할 것, 실업급여 등 사회보호프로그램을 강화할 것 등을 제안한다.

 

또한 세계화와 과학기술이 미국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더이상 심화시키지 않도록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마련하고, 규제 완화 경쟁을 막는 방법으로 세계화를 관리하는 한편, 완전 고용 경제를 복원해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노동자와 시민의 집단 행동을 지원하고, 소수계 우대 조치 등을 통한 차별 철폐, 공공투자를 통한 성장의 형평성 및 지속가능성 복원, 노동력 절감이 아닌 자원 절감으로의 투자 및 혁신의 방향 전환 등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치 개혁의 대안으로 호주,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재산형을 부과하는 투표 의무화정책 등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확신과 원활한 작동에 대해 여전히 희망적인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추천사에 소개된 대로 경제학이 신봉하는 '효율성'을 기틀삼아,  현실의 기득권 독식 구조가 어떻게 불평등한 현실을 만들어가는지 경제학자의 전문성을 살려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기득권이 아님에도 기득권의 논리에 길들여진 99%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현실감각을 일깨우고, 쓰라린 현실을 감추는 헛된 통계와 숫자에 항거할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동시에 1%에게는 불평등의 심화가 기득권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루 빨리 깨닫도록 추동한다.

우리는 평등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시장의 힘을 재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시장이 훌륭한 성과를 내도록, 아무리 못해도 좀 더 나은 성과를 내도록 만들 수 있다. 개혁은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하위 99퍼센트 소득층이 자신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으며, 상위 1퍼센트에게 이로운 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아가는 경로다. 두번째 경로는 상위 1퍼센트가 미국에서 진행되어 온 일들은 우리의 가치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 즉 공공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복지를 달성할 수 있는 전제조건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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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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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날카로운 언어와 압축적인 문장을 해독하는 데 일부 어려움은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라캉을 어떻게 읽고 적용해야하는지 초보자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찾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난해하고 전문적인 개념들을 통합할 때는 아무래도 좋은 전문가의 안내를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을 터. 이런 점에서 <How to read>시리즈는 출간 목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어떤 불합리적인 충동이 덩어리처럼 굳어져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본다.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고'가 아니라 '외상적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라는 것.

 

지젝은 프로이드에서 시작된 정신분석학이 단순히 정신병리를 분석하고 해석해 환자를 현실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라캉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서 환자의 욕망을 대면하도록 함으로써 철학적 면모를 드러낸다고 표현하고 있다.

 

라캉은 우리가  말을 할 때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규칙, 전제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행위라면서, 이러한 슈용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적정의 지점을 측정하는 척도로서 대타자가 작동한다고 개념화했다. 보통 대타자는 늘 나를 지켜보는 신, 이데올로기, 어떤 사람 등이 될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타자를 인식하는 주체가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할 때만 존재하며, 대타자는 개인 존재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가 엄연히 작동하는 현실에서 선언, 발화 등은 텅빈 텍스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상은 강제적인 것인데도, 주체가 어느 한 사회에 속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받아들이도록 요구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주체가 변모하는 순간은 행위의 순간이 아니라 선언의 순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라캉은 또 상호수동성에 주목한다. 미디어의 발달로 수동적 관람자에서 벗어나 타자가 연출한 스펙터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규칙을 세우는데 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상이 나 대신 쇼를 즐기고 나는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지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수동성의 문제는 가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는데,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활동과 참여에 지나치게 몰입하므로, 좌표 전체를 바꿀 진짜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기만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따라서 열심 정치를 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정치를 하지 않으며, 열심히 기도하며 믿음이 견고해지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오히려 기도 행위에만 매몰됨으로써 신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일갈한다.

 

또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점, 평범한 대상을 숭고하게 만드는 어떤 것을 라캉은 소문자 a로 불렀는데, 이를 통해 파시즘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해석한다. 또 이성의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문제될 것이 없는데, 초차아의 차원에서는 즐기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어떻게 물신주의의 분열로 나아가는지도 추측하게 한다.

 

일부에서는 라캉이 터무니없는 말놀음으로 정신분석학을 오도하였다고 비난했지만,  스스로 사회적으로는 정신병리적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하게 한 라캉의 유산을 고려한다면, 어렵더라도 라캉에 대해서 반복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라는 말은 인간의 욕망은 `탈중심화된` 대타자, 상징적 질서가 구조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체는 타자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해서만, 타자를 불가해한 욕망의 자리로 경험하는 한해서만, 불투명한 욕망이 그,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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