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구광렬 지음 / 작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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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삶의 우연을 필연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제야 철이 드는 것이라고 일갈했었다. 그 때는 숫된 이들이 떠들어대는 어설픈 설화라며 설핏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돌아보면 생의 숱한 지점에서 마주친 우연의 삽화들은 웅신하게 점화되었다가 어느 순간 필연으로 불타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히 EBS에서 스치듯 소개된 반구대 암각화를 본 것은, <반구대>를 읽도록 한 필연의 벼리였던 것 같다. 짧은 영상에서 본 호랑이, 사슴은 물론 거북이, 물고기,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향고래, 긴수염 고래, 귀신고래 등은 한동안 열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역사 시간에 빗살무늬토기를 연신 암기하며 신석기 시대를 겨우 이해했던 나에게는, 신석기 전기 시대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고래잡이를 하며 살았다는 것과 반구대가 인류 최초의 암각화라는 사실이 한순간에 일천한 역사의식을 부셔버릴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러므로 <반구대>를 읽는 내내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들떴다. 높이 3m, 너비 10m에 아로새겨진 암각화를 보고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상상하는 것은, 흡사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시청자라도 된 듯 조바심 나게 했다.

 

<반구대>의 이야기는 크게 세 줄기로 나누어진다. 1부에서는 가람의 으뜸  하와 그에 대한 배신을 모의하는 부하들, 큰 주먹과 그리매의 탄생의 비밀과 꽃다지를 사이에 둔 갈등, 그리고 사냥 대신 바위새김에 마음을 뺏기는 그리매의 모습이 주가 된다.

 

2부에서는 하의 죽음과 그의 뒤를 이어 으뜸으로 올라선 포악한 갈의 모습이 그려진다. 갈의 횡포를 그대로 둘 수 없는 매발톱은 솔나리의 도움을 얻어 오동또기로 을 독살하고, 큰볕터 너머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참돌을 가져온 여우주둥이가 매발톱을 돕는다. 또 꽃다지는 두려움 속에서 매발톱에 의해 마을의 큰 어미로 거듭나게 된다. 갈의 죽음 이후 새로운 으뜸으로 올라선 작, 반항하는 큰 주먹을 내쫒고, 그리매가 큰 주먹을 구하면서 둘은 다시 해우한다. 급족의 친절에 속은 가람에서는 의 무리와 꽃다지가 큰볕터로 끌려가게 되고, 이 사실을 안 그리매와 큰 주먹은 꽃다지를 구하기 위해 한 뜻으로 큰볕터를 찾아, 다 죽게 된 작까지 데리고 다시 가람으로 돌아온다.

 

3부는작이 없는 틈에 으뜸의 자리를 찬탈한 을 물리치고 큰 주먹이 으뜸으로 올라선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큰볕터가 가람을 쳐들어온 사이 큰주먹과 그리매를 필두로 큰볕터를 역공하면서 가람의 둘레는 큰볕터의 영역까지 넓혀진다.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식량을 얻기 위한 고래잡이는 더욱 치열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진다. 살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가람에서 시작된 큰 어울림은 점점 더 커져 온누리가 되어간다. 한편 꽃다지가 큰 주먹과 같은 육손이를 낳자 그리매는 우울해하고, 꽃다지는 첫 얼음 후 알들을 묻다가 제 어미아비하고 다르게 태어난 사슴을 보며 육손이가 큰 주먹의 아이가 아님을 직감한다. 이에 사실을 알리러 그리매에게 가지만, 그리매와 함께 있는 얼레지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면서 큰 어미의 숙명을 자각한다. 한편 그리매는 하나가 멀리 있는 하나를 바라보는 두 얼굴을 바위에 새기면서 가슴 가득 그리움을 채워가며 눈물을 흘린다.

 

처음 반구대 암각화를 소개한 영상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였다. 선사시대의 벽화는 동물에게 죽느냐 아니면 죽이느냐의 싸움에서, 필사의 전사로써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당시의 열망을 담은 주술적 표현이었으리라는 기억의 편린이, 반구대의 암각화에도 부지불식간에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주인공 그리매가 사냥으로 얻을 고기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냥으로 희생되는 죽음을 애틋해하며 바위새김에 빠져드는 대목은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꽃다지의 첫 유산과 함께 새끼 벤 암고래의 암벽 윤곽이 점점 희미해지는 장면이 오버랩 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먹거리 확보가 최우선의 목표가 된 생존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생살을 뚫고 침습하는 사랑과 아픔을 겪어냈을 터이니 주술적 기원 뿐 아니라, 그 반추의 상을 암각에 새겨 넣었으리란 상상을 마주하자, 그간 치졸할 정도로 협소했던 내 역사 인식의 경계가 단숨에 확장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라가 세워지기 전, 민족으로 어우러지고 한 곳에 정착해 살기 전에도, 땅을 아우르고 바다로 나아가며 사람들은 살았고, 그저 당장 배를 채울 생고기만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못지않게 웅숭깊은 생을 살았으리란 생각에 이르자, 더위에 사위던 생의 의지도 다시 꺽실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눈여겨 본 부분은 사실상의 으뜸인 그리매가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삶의 주변부로 쫒겨 났으며, 으뜸의 물리적인 자리를 되찾는 데 고군분투하는 대신 암각화를 새겨 넣는 자신의 방식대로 온 마을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깨에 메면서 맡은 바를 감당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는 큰 주먹에게 내내 괴롭힘을 당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다시 살려냈고, 뛰어난 사냥꾼은 아니었지만 지략으로 큰 주먹을 도우면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는 데 일조했다. 단 한번이라도 중심부에서 물러나면 낭떠러지 뒤안길로 사라지는 무한경쟁의 시대, 가지고 싶고 차지하고 싶은 단순한 욕심에 사로잡혀 정해진 자리와 위치로만 내달리는 우리를 향해, 작가는 그리매를 통해 어떤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큰 노력 없이도 튼실한 고깃덩어리를 먹고, 욕정을 마음껏 채우기 위해 방향 없이 질주하는 것이 으뜸의 삶이어야 하느냐, 어느새 하의 육성으로 되살아나 소설을 읽는 내내 또 다른 울림이 되었다.

 

분명 허구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적한 선사 시대의 생동감이 살아난 것은 활용된 배경이나 도구들이 철저한 고증에서 비롯된 까닭일 것이다. 실제 신석기 시대 전후로 기후 변화가 심했으며 예고 없는 지진 등이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진 때문에 탈출에 성공한 여우주둥이의 귀향, 이 등극한 이후 샘물에 비추인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귀신들린 듯 천지가 요동친 장면이나 꽃다지가 몸에 품었던 돌송곳, 여우주둥이가 가지고 온 참돌, 조개무지, 움집, 돌도끼, 큰볕터의 들판에서 멋대로 자라난 조나 피에 대한 묘사는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당시의 생활상을 머릿속으로 재현하는 데 싱싱한 매개체가 되었다.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소설 자체에서 쓰인 활자들이 백지에 새겨진 암각화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듯 이름들을 절로 되뇌었다. 하, 갈,, 탁, 단, , 꽃다지, 큰 주먹, 그리매, 매발톱, 개미취, 마타리, 솔나리, 은방울꽃, 얼레지, 여우주둥이, 들개코, 올빼미눈, 늑대귀, 가람돼지, 수리부리, 각시붓꽃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옛 한글과 우리말로 이루어져, 입에 착착 감기는 리듬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처음 <반구대>를 읽을 때만해도, 그동안 세계사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소설로 구현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널리 깨우치는 계기가 되리라고 내심 확신했었다. 그러나 꽃다지, 그리매, 큰 주먹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니, 괜한 지깨비였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반구대 암각화가 품은 상상 속 이야기를 뒤쫓다보니, 단순히 오늘의 생존과 안녕을 바라는 편벽진 착념의 발로로 생과 역사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생은 계속되며, 사랑과 아픔, 배신과 충성, 절교와 협력, 미움과 용서, 단념과 용기를 품은 인간 군상들의 실존과 어우러짐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생존이 아니라, 공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의미에서 다시 되새겨보는 역사 인식의 전환. 반구대 암각화가 단순히 한반도의 유물로 읽혀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는다면, 소설 <반구대>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5. 독후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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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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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은 기존 사상의 정반대 지점으로 비집어 올라가 기어이 비틀어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빛과 꿈, 예언과 밝음,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하는 가현성, 이해가능한 지식, 중용과 관련된 아폴론적인 세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무정형의 흐름, 신비로운 직관, 극단과 관련된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를 상정하면서 아폴론적인 세계는 개별자를 대변하고, 디오니스소적인 세계는 개별성이 해체되어 자연의 근본적인 힘과 에너지로 녹아들어 그 안에서 기쁨을 향유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비극의 영웅들은 아폴론적인 세계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분투하는 개별자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상은 개별화의 고통을 겪는 디오니소스적 영웅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자연으로 융합된 하나의 상태일뿐 개별성은 모든 악의 원인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즉, 우리의 고통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개인화되어 있고, 이를 인식하면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비극이 감정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주장했지만, 니체는 비극이 주는 공포와 연민은, 파괴로 인해 얻게되는 디오니소스적 숭고미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세계로 편입되는 생의 기쁨을 선사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억압하고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통해서는 절대 진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부정한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철학의 결함을 지적하면서, 사물의 기원은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물자체의 개념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는 승화과정을 통해 보여지는 일종의 현상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기원과 끝을 찾으려는 확실성에 대한 철학의 시도를 종교의 잔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우주의 기원, 목적 등을 묻는 질의는 윤리와 종교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우리의 시선을 왜곡시키므로 이러한 질문에 맞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의 개발이 아니라 새로운 철학자들이 도래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선악을 넘어서>, <우상의 황혼> 등을 통해서 니체는 심리학과 과학의 초보 단계에서 등장하는 이성의 언어가 특정한 방식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습관을 갖게 하며, 이 때문에 세계를 허구적으로 인식하게 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할 중립적인 용어를 갖지 못한 인간의 결함으로 인해 진실에서 벗어나 비이성적 개념으로서 도덕과 형이상학을 찬양해왔다고 지적한다.


<즐거운 학문>, <이 사람을 보라> 등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언급한다. 니체는 세계 너머에 대한 환상이 현실의 삶과 그릇된 관계를 맺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상징적인 신, 기독교적인 신은 죽었으며, 우리가 천착한 구조와 질서, 즉 신학적, 철학적 신념 등도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우주를 유기체나 기계로 보는 것, 삶을 죽음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 신에 대한 허구를 물질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는 것 등에 대하여 경계할 것을 강조한다. 현세를 경멸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영원한 세계를 갈구하는 대신 영원한 세계를 우리가 늘상 살아내는 유일한 현실에 아로새겨야 한다고 덧붙인다.

 

정치적 환상으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삶을 다시 한번 살기 원하는 태도로 살아내는, 현재와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개념을 삶에 적용할 것을 강조한다.

 

배후와 이면을 살피고, 의문부호와 오해를 잔뜩 지닌 채 막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들을 분석해야 한다고 믿은 니체는 집요하게, 그러므로 자기파괴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부정과 극단에 섬으로써 철학의 지평이 넓혀왔다. 그의 방식을 차용하자면, 인간의 개별성이 사라지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지향한다면 도대체 영원회귀의 개념까지 펼치면서 개별적 생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차선은 하루 빨리 죽는 것이라는 섬뜩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 아닌가 싶은.

 

모든 만물은 생성해왔으므로 역사적으로 철학하기가 필요하다고 단언했는데,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정과 극단을 넘나들며 자기 모순과 자기 파괴의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댄 그의 삶의 이력을 분석함으로써 그를 알아가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생각도 든다.

 

철학교수 출신인 저자의 장점은 니체의 저작을 차례대로 소개하면서 그의 사상 읽기를 독려하는 데서 드러난다. 저자가 걸러내고 그려낸 니체가 아니라 니체 자신의 육성으로 그의 철학을 표현하도록하는 기술 방식은 친철하지는 않지만, 편견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서술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같은 철학의 문외한들에게는 저자의 전문성을 살려 니체 철학의 개요를 간단하게라도 저자의 후기 방식으로 서술하여 삽입했다면 이해도와 가독성을 훨씬 높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슬로터다이크는 니체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자기중심적 논리에 빠져 있으며 스스로가 위대한 원한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중략..니체는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찬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를 취하거나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동시대인들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찬가를 불러댄다는 것이다. 니체는 계속해서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의 활력과 지적 능력을 명성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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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의 감정수업 -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감정 선택 훈련
게리 D. 맥케이. 돈 딩크마이어 지음, 김유광 옮김 / 시목(始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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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열풍 이후 실제 감정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안내하고 실습하도록 하는 일종의 지침서격인 책이다.

 

트라우마는 비합리적인 사고 체계를 거쳐 일종의 목적을 가진 감정이 만들어낸 허상일뿐이므로, 트라우마는 없다는, 아들러의 관점을 성실히 반영한 실용서답게 매 장마다 기본 전제에 충실하다.

 

첫 장에서는 감정은 선택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감정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감정은 평소 우리의 믿음이나 관점이 결정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이 변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바꾸어말하면 관점의 스펙트럼을 넓혀야하고,  현재 시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여러 맥락과 중층의 진실들이 교차하며 표출된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강조한다.

 

또 감정 선택의 8가지 원칙으로, 감정과 생활 양식 탐구하기,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기, 감정의 목적을 인식하기,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언어습과 바꾸기, 감정을 바꾸는 구체적인 계획 세우기 등을 제시하면서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더 고차원적인 인지체계가 작동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감정의 목적이나 그러한 감정에 쉽게 노출되는 유형을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가령 분노는 타인이나 상황을 통제하려 하거나 경기에서 승리의 열정을 고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억울한 경우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우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임회피'이며 부정적인 사고 방식,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사람,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높은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등에서 발현율이 높아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죄책감의 목적은, 본인을 스스로 처벌해 심리적 자유를 얻기 위함, 의무를 저버리려는 목적,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함.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분노를 감춤 또는 자신의 선의를 입증하기 위함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불안은 위험요소는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과소평가할 때 나타나며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가정하에 행동할 때 생긴다는 점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아들러 관점을 반영하여 기쁨이나 행복도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ACE 방법을 활용하라고 제시하는데, A(인정), C(선택), E(실행)의 3가지 절차가 그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목적과 믿음, 감정을 선택한 후 새로운 선택을 위한 행동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실용서답게 아들러 철학의 기본을 소개하기 보다는 실제 감정을 다루는 기술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다양한 감정의 목적과 유형을 소개하고, 실천적인 전략을 제시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실제 실천하고 실습하는 부분이 더욱 구체적이어야 저술의 소기의 목적에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같은 상황, 같은 감정을 두고 프로이드나 아들러식의 접근법으로 다룰 때 어떤 점이 달라지겠는지 비교하는 부분이 있다면 더 깊이 있는 저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면, 결국 관점이 감정을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나의 감정은 나의 관점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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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HOW TO READ 융 How To Read 시리즈
데이비드 테이시 지음, 박현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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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건강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서 찾아 읽게 되었다. 프로이트, 아들러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개인의 심리적 치유에 접근한 반면, 인간의 존재를 영적인 존재로까지 확장하면서 정신 그 이상의 접목을 통해 영혼의 치유까지 나아가야한다고 보았던, 그러므로 개인을 넘어서 민족, 사회, 역사의 치유까지 확장되는 융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알아보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융의 저작에서 직접 발췌한 내용을 통해 융의 목소리로 융의 주장을 정리하므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깊이 있게 사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융은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과 반대로, 성역할은 심리적이며 생물학적인 영향으로 정해진다고 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음과 양처럼 공존하는 것으로 여성은 주로 연결성과 사랑을 의미하는 여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남성은 변별력이나 인식과 관련되는 남성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하면서 남성은 무의식적으로 여성적인 측면인 아니마를 가지고 있고, 여성은 남성적인 측면인 아니무스를 가지고 있는데 문화나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본성으로부터 성취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융은 사회적인 통과의례가 희미해지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도 또는 와해가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대성의 본성이 인격에 통합은 되어야하지만 원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보존에 방점을 찍는다.

 

융은 또한 신경증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이 우리를 치료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신과 질환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살지 못한 삶은 무의식에 축적되는데, 신경증의 발현은 편향된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을 알게 하는 동시에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상황이 임박하기 전 우리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신호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경증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정신 에너를 집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이상적 삶, 즉 본질에 집중하는 대신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융에게서 무의식은 영적인 세계와 연결되는 일종의 통로로 해석되는 측면이 있다. 자아가 내면의 상들과 대화하며 확장된 의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명상, 일기 쓰기, 묵상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원형의 삶으로 이끄는 일종의 상징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화해시키는 장이 될 수 있다는 데서 다른 학자들과 견해가 달라진다.

 

융은 영적인 의미를 삶에 부여함으로써 정체감, 내적 현실감과 실체감을 부여하여야 하며 이것은 내면의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그 이상의 것을 각성하게 하는 동시에 건강의 근원이 된다고 단언한다. 융은 시, 음악, 예술, 의례, 의식 등과 같은 종교를 통해, 자아 바깥에 존재할 줄 아는 묵시이자 상징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고 합리성의 전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까지 주장을 확장시킨다.

 

그는  우리의 병은 영혼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징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상징적인 삶을 살지 못하므로 진부한 삶을 견디지 못해 탈출 경로를 찾기 위해 춤, 여행, 스포츠, 오락 등 온갖 형식을 만들어내 떠들석한 행위와 특별한 진기함에 중독된다고도 주장한다. 초월된 영적인 의미와 통합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상징과 같은 일종의 그림 언어로 이해된다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의 편린들은 결코 진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삶이 인간 그 이상의 영적인 의미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통합을 추구하면서 초월을 위한 신중한 수단을 탐색해야하는 데, 그것이 약화되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로 표출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전쟁을 든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융은 사람들이 전쟁을 기뻐하는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그 이유로 사람들이 전쟁을 사회나 정치의 문제로 떠넘기면서, 이성이 의례적으로 파기되는 것이 가능해지면 온갖 비합리성이 허용되므로, 마침내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통찰력도 발휘한다.

 

융의 주장이 다소 과학적이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주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탈과학을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의 개인, 사회적 치유에 일종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합리성과 효율성에 천착하는 시대, 영적 건강의 문제가 도외시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 우리 사회의 아픔과 병적인 현상들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융의 앞선 생각들이  도움이 되리라는 데 확신을 준다.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삶이 너무나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내가 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 또한 그 속에서 내가 신성한 삶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서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그러한 상징적인 생활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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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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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는 일상의 지겨움과 나태함을 정면으로 반격하면서, 일상성을 위대한 깨달음과 단숨에 연결시키는 미덕을 지녔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자 유일자인 아트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행자의 무리들에 합류한다.

 

싯다르타는 사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아를 버리는 목표를 추구하지만 여의치 않자 해탈의 경지에 오른 고타마를 찾아 나선다. 부처의 경지에 오른 고타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지만, 고타마 자신이 성취한 해탈의 경험은 결코 언어로 배울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고타마도 떠나게 된다.

 

이후 싯다르타는 카밀라를 만나 부와 권력을 쟁취하고 육체적 즐거움에 몰입하면서 인생의 기쁨들을 만끽하며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자아를 버리고 아트만과 일체화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카밀라를 떠난 싯다르타는 배움 짧은 뱃사공의 조수로 살아가게 된다.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늘 동일한 물인 강물을 바라보면서, 카밀라에게 얻은 아들을 직접 키우면서, 생의 의지대로 각성하지는 못했더라도 삶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아트만과 하나가 되는 일체성을 경험하게 되고, 모두와 하나가 되는 체현 과정을 겪는다. 비록 깨달음이 없어도 주어진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아트만과 온전히 통합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침내는  하나의 얼굴이었다가 모두의 형상으로 흘러가며 다시 하나로 모아지는 범아일여의 경지를 마주한다.

 

죽고, 살고, 만나고, 헤어지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그 모든 것이 단일성과 동시성을 갖는다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 헤세는 따지고, 나누고, 인식하고, 분절하는 서양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확신하게 된다. 인식과 삶이 하나가 되도록 통합시키는 일상성의 회복을 통해 삶의 위대함과 깊은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와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끊어지지 않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제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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