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구광렬 지음 / 작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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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삶의 우연을 필연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제야 철이 드는 것이라고 일갈했었다. 그 때는 숫된 이들이 떠들어대는 어설픈 설화라며 설핏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돌아보면 생의 숱한 지점에서 마주친 우연의 삽화들은 웅신하게 점화되었다가 어느 순간 필연으로 불타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히 EBS에서 스치듯 소개된 반구대 암각화를 본 것은, <반구대>를 읽도록 한 필연의 벼리였던 것 같다. 짧은 영상에서 본 호랑이, 사슴은 물론 거북이, 물고기,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향고래, 긴수염 고래, 귀신고래 등은 한동안 열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역사 시간에 빗살무늬토기를 연신 암기하며 신석기 시대를 겨우 이해했던 나에게는, 신석기 전기 시대에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고래잡이를 하며 살았다는 것과 반구대가 인류 최초의 암각화라는 사실이 한순간에 일천한 역사의식을 부셔버릴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러므로 <반구대>를 읽는 내내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들떴다. 높이 3m, 너비 10m에 아로새겨진 암각화를 보고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상상하는 것은, 흡사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시청자라도 된 듯 조바심 나게 했다.

 

<반구대>의 이야기는 크게 세 줄기로 나누어진다. 1부에서는 가람의 으뜸  하와 그에 대한 배신을 모의하는 부하들, 큰 주먹과 그리매의 탄생의 비밀과 꽃다지를 사이에 둔 갈등, 그리고 사냥 대신 바위새김에 마음을 뺏기는 그리매의 모습이 주가 된다.

 

2부에서는 하의 죽음과 그의 뒤를 이어 으뜸으로 올라선 포악한 갈의 모습이 그려진다. 갈의 횡포를 그대로 둘 수 없는 매발톱은 솔나리의 도움을 얻어 오동또기로 을 독살하고, 큰볕터 너머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참돌을 가져온 여우주둥이가 매발톱을 돕는다. 또 꽃다지는 두려움 속에서 매발톱에 의해 마을의 큰 어미로 거듭나게 된다. 갈의 죽음 이후 새로운 으뜸으로 올라선 작, 반항하는 큰 주먹을 내쫒고, 그리매가 큰 주먹을 구하면서 둘은 다시 해우한다. 급족의 친절에 속은 가람에서는 의 무리와 꽃다지가 큰볕터로 끌려가게 되고, 이 사실을 안 그리매와 큰 주먹은 꽃다지를 구하기 위해 한 뜻으로 큰볕터를 찾아, 다 죽게 된 작까지 데리고 다시 가람으로 돌아온다.

 

3부는작이 없는 틈에 으뜸의 자리를 찬탈한 을 물리치고 큰 주먹이 으뜸으로 올라선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큰볕터가 가람을 쳐들어온 사이 큰주먹과 그리매를 필두로 큰볕터를 역공하면서 가람의 둘레는 큰볕터의 영역까지 넓혀진다.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식량을 얻기 위한 고래잡이는 더욱 치열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진다. 살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가람에서 시작된 큰 어울림은 점점 더 커져 온누리가 되어간다. 한편 꽃다지가 큰 주먹과 같은 육손이를 낳자 그리매는 우울해하고, 꽃다지는 첫 얼음 후 알들을 묻다가 제 어미아비하고 다르게 태어난 사슴을 보며 육손이가 큰 주먹의 아이가 아님을 직감한다. 이에 사실을 알리러 그리매에게 가지만, 그리매와 함께 있는 얼레지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면서 큰 어미의 숙명을 자각한다. 한편 그리매는 하나가 멀리 있는 하나를 바라보는 두 얼굴을 바위에 새기면서 가슴 가득 그리움을 채워가며 눈물을 흘린다.

 

처음 반구대 암각화를 소개한 영상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였다. 선사시대의 벽화는 동물에게 죽느냐 아니면 죽이느냐의 싸움에서, 필사의 전사로써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당시의 열망을 담은 주술적 표현이었으리라는 기억의 편린이, 반구대의 암각화에도 부지불식간에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주인공 그리매가 사냥으로 얻을 고기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냥으로 희생되는 죽음을 애틋해하며 바위새김에 빠져드는 대목은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꽃다지의 첫 유산과 함께 새끼 벤 암고래의 암벽 윤곽이 점점 희미해지는 장면이 오버랩 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먹거리 확보가 최우선의 목표가 된 생존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생살을 뚫고 침습하는 사랑과 아픔을 겪어냈을 터이니 주술적 기원 뿐 아니라, 그 반추의 상을 암각에 새겨 넣었으리란 상상을 마주하자, 그간 치졸할 정도로 협소했던 내 역사 인식의 경계가 단숨에 확장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라가 세워지기 전, 민족으로 어우러지고 한 곳에 정착해 살기 전에도, 땅을 아우르고 바다로 나아가며 사람들은 살았고, 그저 당장 배를 채울 생고기만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못지않게 웅숭깊은 생을 살았으리란 생각에 이르자, 더위에 사위던 생의 의지도 다시 꺽실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눈여겨 본 부분은 사실상의 으뜸인 그리매가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삶의 주변부로 쫒겨 났으며, 으뜸의 물리적인 자리를 되찾는 데 고군분투하는 대신 암각화를 새겨 넣는 자신의 방식대로 온 마을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어깨에 메면서 맡은 바를 감당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는 큰 주먹에게 내내 괴롭힘을 당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다시 살려냈고, 뛰어난 사냥꾼은 아니었지만 지략으로 큰 주먹을 도우면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는 데 일조했다. 단 한번이라도 중심부에서 물러나면 낭떠러지 뒤안길로 사라지는 무한경쟁의 시대, 가지고 싶고 차지하고 싶은 단순한 욕심에 사로잡혀 정해진 자리와 위치로만 내달리는 우리를 향해, 작가는 그리매를 통해 어떤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큰 노력 없이도 튼실한 고깃덩어리를 먹고, 욕정을 마음껏 채우기 위해 방향 없이 질주하는 것이 으뜸의 삶이어야 하느냐, 어느새 하의 육성으로 되살아나 소설을 읽는 내내 또 다른 울림이 되었다.

 

분명 허구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적한 선사 시대의 생동감이 살아난 것은 활용된 배경이나 도구들이 철저한 고증에서 비롯된 까닭일 것이다. 실제 신석기 시대 전후로 기후 변화가 심했으며 예고 없는 지진 등이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진 때문에 탈출에 성공한 여우주둥이의 귀향, 이 등극한 이후 샘물에 비추인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귀신들린 듯 천지가 요동친 장면이나 꽃다지가 몸에 품었던 돌송곳, 여우주둥이가 가지고 온 참돌, 조개무지, 움집, 돌도끼, 큰볕터의 들판에서 멋대로 자라난 조나 피에 대한 묘사는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당시의 생활상을 머릿속으로 재현하는 데 싱싱한 매개체가 되었다.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소설 자체에서 쓰인 활자들이 백지에 새겨진 암각화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듯 이름들을 절로 되뇌었다. 하, 갈,, 탁, 단, , 꽃다지, 큰 주먹, 그리매, 매발톱, 개미취, 마타리, 솔나리, 은방울꽃, 얼레지, 여우주둥이, 들개코, 올빼미눈, 늑대귀, 가람돼지, 수리부리, 각시붓꽃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옛 한글과 우리말로 이루어져, 입에 착착 감기는 리듬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처음 <반구대>를 읽을 때만해도, 그동안 세계사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소설로 구현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널리 깨우치는 계기가 되리라고 내심 확신했었다. 그러나 꽃다지, 그리매, 큰 주먹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니, 괜한 지깨비였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반구대 암각화가 품은 상상 속 이야기를 뒤쫓다보니, 단순히 오늘의 생존과 안녕을 바라는 편벽진 착념의 발로로 생과 역사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생은 계속되며, 사랑과 아픔, 배신과 충성, 절교와 협력, 미움과 용서, 단념과 용기를 품은 인간 군상들의 실존과 어우러짐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생존이 아니라, 공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의미에서 다시 되새겨보는 역사 인식의 전환. 반구대 암각화가 단순히 한반도의 유물로 읽혀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는다면, 소설 <반구대>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5. 독후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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