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진실
팀 켈러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믿는다'는 행위나 '믿음'이라는 개념 속에는 논리와 사유 대신 맹신과 침잠의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런 편견과 오해가 가져오는 가장 큰 불행은 신앙의 본질보다는 표상만 쫓다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급한 결론을 맺도록 오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팀 켈러 목사님이 신선하게도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사유 과정을 통해 '이해'하도록 돕는 서간을 출간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논리와 사유가 믿음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기초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던 차에 반가운 글들을 만난 셈이다.

 

이 책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들과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근거들로 주제를 나누고 서브 주제로 우리가 흔히 왜곡하고 혼돈하는 질문들을 던져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이런 방식의 구성 방식은 책의 어느 곳을 펼치든 맥락을 떠나서 먼저 읽을 수 있으며 독자의 호기심과 열독의 욕망을 친절하게 수용하는 장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로 기독교의 배타성, 악과 고통의 문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속박, 불의,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점, 과학과 기독교의 역설, 성경의 기적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뽑아낸다.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근거로는 만물에 깃들여 있는 하나나님의 실존에 대한 암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죄된 본성, 복음, 십자가, 부활, 영생 등에 대하여 설명한다.

 

각각의 서브 주제들이 기원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서, 관련 이론, 사례와 비교하여 질의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아무래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더 눈길이 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가라는 주장에는 종교의 분열에 대하는 우리 시대의 세 가지 자세를 통제 또는 금지, 비난, 철저한 개인적 사유화로 들면서 이것이 오히려 종교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원래는 선을 행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점 자체가 문화적, 종교적 맥락을 떠나 종교적 가치의 중첩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 어느 문화, 어느 시대에서도 수용될만한 보편적 가치를 믿으면서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배타적인 확신 체계가 오히려 개방적이고 인권적 가치를 표방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리의 기초를 이해하기 전에 구원의 배타성이 가진 장점을 설명하면서 일종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격이다.

 

결국 핵심은 의심을 의심해야 신앙의 바른 길을 떠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주장이다. 의심을 포함하지 않는 신앙은 비극적인 일을 경험하거나 회의주의자들의 탐색 앞에 무방비로 무너진다는 것. 교리를 이해하되, 현실의 언어와 상황으로 해석하는 기독교 변증가가 많아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다만, 독자로서의 욕심은 교리의 핵심인 사영리 등을 서두에 할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죄의 문제와 십자가, 예수님이 오신 의미와 복음의 본질,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부활과 영생의 축복에 대한 이해 없이 단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이해하는 것은 자칫 믿음을 단순한 논리와 사유 안에 갇히게 하지나 않을까 싶은 노파심 때문.

우주는 빅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은 너무도 확고하다. 150억년 전, 작디작은 한 점에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울만큼 밝은 에너지 섬광이 쏟아져 나오면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달리보면, 그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나로서는 어떻게 자연이, 여기서는 우주가 저절로 생겨날 수 있었다는 건지 당최 가늠이 가질 않는다. 그리고 기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존재가 있어 우주를 출범시켰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자연계 바깥에 있는 존재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케스 특유의 통찰과 위트가 넘치는 단편으로, 제 고유의 맛을 잃지 않은 담백한 일품요리를 먹은 것처럼 개운하다. 연민과 우울이 넘실대는 우리의 삶을 두고, 누군가 마르케스에게 처방을 묻는다면,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저작인 이 책을 건넬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주인공인 대령은 젊은 날 정권에 대항해 싸운 군인으로, 정부가 약속했던 연금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금요일마다 우체국으로 간다. 그러나 56년동안 연금 수금과 관련된 편지는 한번도 받지 못했고, 오직 그는 기다리는 일에 매달린 것으로 묘사된다. 그의 아내는 천식 환자로 가난과 빈곤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설상가상 노부부의 경제를 책임졌던, 재단사이자 외아들은 투계를 위한 닭만 남기고 군인에게 살해된다. 천식 치료는 커녕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 연금 소식도 오지 않자 부부에게 닭은 눈엣가시가 된다. 닭을 팔아서 최소한의 품위라도 유지해야한다고 결단한 아내는 대령을 몰아대고 대령은 이재에 밝은 사바스씨에게 닭을 팔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우연히 아들의 친구들이 시험 삼아 닭을 가져가고 대령은 적의 공격을 피해 살의를 보이는 아들의 닭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의 잃어버린 전의를 되살리고 침체된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 된 닭을 팔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내와 심하게 다투면서 이제 무엇을 먹고 사느냐는 아내의 타박에, 75년동안 일각일각을 기다려온, 자신을 무적이라고 느끼며 자신은 더렵혀지지 않았다는 신념에 붙들려 "똥"이라고 답한다.

 

마르케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독재 정부, 빈곤과 가난에 내몰린 대령 부부, 사적 이익에만 매몰된 사바스씨, 연금 수금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매번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우체국장,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의사, 자신을 이어 비밀 운동에 연루되어 살해된 외아들, 그리고 제대로 먹지 못해 힘겨워하면서도 막상 투계장에 나서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수탉을 교차적으로 배치하면서 이 뒤엉킨 삶의 굴레에서 도대체 인간의 존엄성, 삶의 목적, 의미는 무엇이야하는지 되묻는다.

 

또 먹을거리, 입을거리를 핑계삼아 삶의 위대한 경로들을 막아서는 거대한 힘을 앞에두고, 늘상 변비에 시달리던 대령의 입을 빌려, 그것들은 진짜 "똥"일뿐이며 고양된 의지, 선을 위한 항거, 연대와 저항이 진짜 우리의 먹을거리, 입을거리가 되어야한다는 역설을 설파한다.

 

빈한하고 너덜거리는 삶이 된 진짜 이유는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것들이 "똥"인지도 모르면서 "똥"에 천착하느라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의 목표나 생의 의지로 투쟁하지 못하는 비굴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곳에서 75년의 삶을 버텨내며 싸움닭을 통해 다시 생의 의지를 지피는 노 대령의 계시같은 외마디 외침은, 그러므로 더더욱 청량하다.

아내는 절망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아내는 이렇게 물으면서 대령이 입은 티셔츠의 칼라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말해 봐요. 우리는 뭘 먹죠" 대령은 이 순간에 이르는 데 칠십오년의 세월이, 그가 살아온 칠십오 년의 일각일각이 필요했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바흐 : 부활절 오라토리오, 악투스 트라지쿠스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가디너 (John Eliot Gar / SDG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양화진에 들렀다가 부활에 대한 연구 총서라는 점에 끌려 구입했다.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저자들의 주장대로 평신도도 충분히 사색하며 읽을 수 있도록 편성한 부분이 돋보인다.

 

캐나다, 스위스, 프랑스의 신학 대학 교수인 저자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부활"을 조망한 연구 결과물을 한 데 엮은 것으로,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들의 소개대로 부활에 대한 정보를 보완하는 한편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차원과 의미들을 탐색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1부에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이해, 유다이즘에서의 부활 사상,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몸, 영혼, 내세의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루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이집트인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 부분이었는데, 이집트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신체적 요소와 비신체적 요소로 나뉘어 있고, 몸은 여러 영적인 부분으로 인해 살아움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바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영혼으로 이해할 수 있고, 죽는 순간 바는 몸을 떠났다가 미라가 된 몸과 합치되어, 소생시킬 때 되살아난다고 이해했다. 카는 바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양 각색이라고 한다.  신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침투하면서 개인의 인격 자체까지 드러내는 것으로, 초상이나 조각상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그의 '카'가 된다고 믿었고,  시신이 소실되면 조각상이나 초상이 있는 한 사후 삶을 카가 보장한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또 인간의 궁극 목표는 카와 바가 결합하여 아크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몸인 제트를 보존해야 하므로, 이집트인들은 내세에도 몸이 존속하여 삶의 그릇이 되어야한다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고 문명을 구가하던 이집트에서는 영원과 부활에서 몸의 영속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 미라를 만들었다는 것이 단번에 이해된다. 이집트인들이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본 반면, 소포타미아인들은 모든 인간은 지옥으로 가며 어떤 구원의 여지도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저자는 안온했던 이집트와 침략및 전투에 점철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적 인식에서 세계관이 달라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복음서, 당시의 언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찬가, 외경 등을 살펴보면서 부활의 실재성과 역사적인 측면을 다룬다.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이 책의 주요 저자이기도 한 오데트 맨빌의 연구 부분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선교적 성경의 발현, 교리교육적 성격의 발현, 여인들에게 나타난 발현으로 나누고, 부활이 단순히 의례적인 주님의 방문과 위로가 아니라 그 목적이 교회를 세우고, 교리를 교육하는 수단이 되며, 동시에 역사성을 담보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멘빌 연구 부분을 읽다보면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소중한 단서를 얻게 된다. 또 외경문학에서의 그리스도의 발현과 연결해보면 영지주의자들의 글에서 왜 부활과 발현 이야기가 만연하는지 이해할 수 있고, 역사적인 승자의 기록이 정경이며 배척된 이들의 외경이 이단이 되었을 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맥락화된다. 환시와 계시를 보는 것을 넘어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부활의 개념이 명확해져야하는 이유도 적확하게 깨닫게 되는 장점이 있다.

 

3부에서는 미래지향적 부활의 의미를 파고든다. 앙드레 미르는 성경에 근거하여 '몸'이 단순한 육체적 물질을 넘어서서 세계와 소통의 통로로서의 몸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부활이 인류의 일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가능하며 모두를 위한 실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개인마다 따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 부활을 통해, 구원은 결국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가능한 보편성을 띠게 된다는 데까지 확장해나간다. 부활의 재창조적 의미를 창안해나가면서 미래적 의미를 실재로 끌어당겨 현실에 토착화시키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라는 점도 주장한다.

 

한 번의 독서로 신학자들의 연구를 보듬어 이해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의 독서만으로도 부활의 역사적, 신학적, 미래적 측면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는 한편, 명료하게 인식하려는 시도는 거듭 반복되어야한다는 데 저자들과 인식을 함께 하게 된다. 연구자인 저자들 뿐만 아니라 귀한 연구를 기획하고 후원한 분들께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귀한 연구서다.

이 책의 목표는 부활이라는 주제에 관한 취약한 수준의 정보를 보강하는 것 외에도,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활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언어들을 조사하고, 부활의 상징화와 의미의 효과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중략..그리스도이신 예수 사건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인간의 운명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 교회의 뒷골목 풍경 - 교회사 뒤에 숨겨진 중세인들의 문화와 삶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 시리즈 3
박양규 지음 / 예책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문제 의식은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가 높아질수록 종교개혁의 진의가 오히려 퇴색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세인가, 근세인가, 현대인가의 중요성을 따지기보다  생존을 위해 언제나 "현재"를 살아내는 개인들의 얽힌 삶을 조망하면서, 시대와 맞닿았던 믿음의 굴곡진 노정을 관통하지 않는다면 누가 현재 중세의 카톨릭 역할을 맡고 있는지 직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도 피력한다. 루터나 칼뱅의 종교개혁을 시대의 산물로 이해할 때, 특정 개인에 대한 왜곡된 숭상을 멈추고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제대로 짚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는 결연하기까지 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구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배경으로 카톨릭의 권력, 제국의 도약, 성직자와 왕들의 권력 다툼, 독단과 욕망으로 뒤틀린 신앙과 믿음의 배신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데 있다. 또 민중들의 삶을 주로 그린 농민화가였던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을 통해 종교와 신앙, 성직자와 민중을 대비시키며 중세의 뒤틀린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한편, 중세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성당, 궁전 등을 사진으로 수록해 가독성은 물론 이해의 폭을 풍성하게 넓히도록 친절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 법률가, 기사, 의사 뿐만 아니라 중세의 대표적인 살아있는 권력, 성직자들을 풍자하면서 시대에 저항한 동시에 당시에 멸시당하고 하찮게 여겨졌던 갑남을녀의 이야기들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하면서 상당 부분 지면을 할애하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민중을 사랑한, 신앙인으로 표현된다.

 

세상에 대하여 가장 극렬한 분노를 내뿜으며, 신앙의 순결성을 내세워 하나님의 권능을 자신들의 권력으로 둔갑시켜 향유했던 중세 교회가, 슬며시 우리의 부끄러운 좌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초서처럼 아무 힘도 없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잘못된 믿음에 저항할 수 있는, 그것이 진짜 종교 개혁의 정신은 아니었는지 되묻는다.

 

신앙과 믿음의 관점에서 중세를 바라보며 현재를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저자의 성실하고 진지한 시도가 두고두고 감사할 것 같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갑질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가 있었다. 사회에서 지탄받는 재벌과 정치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는 십일조와 예배, 전도와 선교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초서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줄 여력이나 마음도 없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예배보다 사랑이다.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즘 - 철학.정치 편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는 이즘을 '세계를 보는 나를 보는 일'이라고 정의내리면서 이즘은 경제, 과학, 예술, 종교 등 지적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지만 분야별로 구분하거나 전공자 내지는 전문가의 명명 형식으로 분류되어 제시되므로, 통합적인 과점에서 이즘을 개괄하기 어렵다는 토로로 이 책의 기획을 설명한다. 특히 서문에서는 이즘에 대하여 철학, 정치 편과 사회, 문화, 종교 편 두 권으로 출간할 계획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이 책이 첫째 권이라고 소개한다. 책을 읽고 다면 두 번째 권도 읽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두 번째 권은 출간 전인 것 같다. 연작의 출간을 기다리게 하는 저자의 풍성한 지적 사유는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즘이 탄생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그 영향력과 주요 의미를 사전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덧붙이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의 견해가 제시되므로 독단적이거나 주관적 글쓰기에 갇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더해가는 동안 오히려 저자와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은 능동적 독서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낸다.

 

철학 편보다는 정치 편을 더 흥미롭게 읽은 것 같다. 철학 편에 비해 정치 편은 2008년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루어지는 사회적 논의에도 예리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눈여겨 본 대목은 사회민주주의와 페이비어니즘인데, 불평등, 격차, 공정성에 대한 회의가 점철된 우리 사회에게 뜨거운 화두를 던지는 이즘.

 

페이비어니즘을 탄생시킨, 페이비언협회가 1884년 영국에서 창설될 때 노동자가 아니라 진보적인 자유주의 지식인의 모임이었으며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주장한 마르크스 사회주의와 달리 자본주의를 계승하되, 일그러진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사회주의적인 제도를 심어가면서 자본주의를 수정해나가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렌트의 개념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하기 쉬운 개인의 능력이 사실은 그 능력을 갖추도록 한 유리한 가정 환경, 공교육의 혜택 등을 고려해 기회의 렌트를 유추해보야한다는 것이다.

 

실제 능력과는 상관 없이 대중이 상상함으로써 높은 소득을 올리는 상상의 렌트, 부유층끼리의 경쟁으로 얻는 인플레의 렌트, 어떤 특정 지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받게 되는 지위의 렌트, 자질이나 신체 조건으로 화폐 소득을 올리게 하는 요령의 렌트, 노력과 상관 없이 수요-공급의 불균형으로 수익을 올리는 수요과 공급 렌트에 주목하면서 통상적인 경제적 임금을 넘어서는 이익은 모두 렌트의 개념으로 치환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토지, 자본, 능력은 오히려 공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국가가 할 일은 특정 그룹의 렌트 전용을 막으면서 사회적으로 공유시키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본다.

 

저자는 페이비어니즘이 영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설명하면서 급진적인 사회 변혁 대신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한 점이 오히려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일조했다는 통찰도 제시한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에 일종의 두려움 내지는 혐오감이 두터운 우리 사회에서도 보다 진전된 사회를 위하여 한번쯤은 함께  생각하며, 토론할 수 있는 이즘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즘은 당대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이전 역사와의 관계, 다른 이즘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고 했는데, 자본주의의 병폐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 층에서는 왜  페이비어니즘과 같은 이즘이 생생한 운동력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인지, 대채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풀죽는 의문도 생겨난다. 남북 대치 상황으로만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 있을까 자문해보면 오히려 암담해지는 그런 의문.

객관적이라는 미명 하에 저자의 관점이 투영되지 않은 책은 오히려 생기 없는 지식을 전달할 뿐이다. 모든 독자가 나의 관점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 고유의 관점이 투영된 책은 독자가 그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중요한 지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