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홍신 세계문학 5
허먼 멜빌 지음, 정광섭 옮김 / 홍신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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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 론 하워드의 <하트 오브 더 씨> 등 연이어 모비딕이 모티브가 된 영화가 개봉되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백경>의 그 무엇이 동양과 서양의 감독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불러일으켰을까 하는 호기심이 첫 장을 펼치게 한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다.

 

멜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추방자가 된 이스마엘의 이름을 차용한 주인공을  관찰자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모비딕을 쫒는 늙은 광기어린 에이헤브 선장, 규율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그리고 고래 산업을 통해 돈을 쫓아 항해에 나선 인간 군상들을 촘촘히 따라가다보면 <백경>은 단순한 고래잡이 모험담일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백경>은 단순한 모험담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정신 분석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의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만한 풍성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때 직접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멜빌은 스토리 중심의 소설 전개를 넘어서서 박물관학의 정수를 소설에 담아야겠다는 일념을 표출하기라도 하듯, 고래잡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상을 담는다. 때로는 지리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물학을 담은 생물 도감이 되기도 했다가 법률 해석을 담는 법학서로 변모하기도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하며 영생을 구하는 신학서가 되었다가 인간은 도대체 누구인가에 천착하는 철학서로 뒤바뀐다.

 

인상깊었던 것은, 1500년대, 고래산업을 둘러싼 네덜란드의 법률 발전상. 첫번째 고래잡이 배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았는데, 불행히도 배가 작아 고래를 붙잡아두지 못한 경우, 재력과 규모에서 앞서는 두번째 배가 어부지리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작살의 소유는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 작살은 고래를 잡겠다는 의지로 던진 것이므로, 고래에 꽂힌 경우 작살의 소유는 고래에게로 귀속되며, 두번째 배가 작은 노력으로 작살이 꽂힌 고래를 잡게 되면, 고래와 더불어 작살의 소유권까지도 인정받는다는 식이다. 멜빌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고래 잡이를 통해 자본의 노동 잠식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또, 에이헤브는 한 쪽 다리를 일본해 근처에서 잃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울산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동해에서 고래가 자주 출몰했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보면, 실상은 모비딕을 처음 만난 곳은 동해 근처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세계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다보니, 잘 인식되면서도 미지의 공간으로 일본해로 기술된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도 남는다.

 

오직 모비딕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나서는 에이헤브는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인가, 아니면 끝내 죽을 줄 알면서도 숙명의 굴레를 담담히 받아들인 존재인가. 단번에 명쾌한 답을 주는 대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백경>이 아닐까 싶다.

스타벅..세번째 나의 영혼의 배는 항해에 나가네.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나 그 후는 영원히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지. 스타벅. 어떤 자는 썰물 때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또 어떤 자는 밀물 때에..나는 지금 방금 부서지려는 파도의 꼭대기에 있는 것 같군. 나는 나이를 먹었어. 자아. 악수하세...그들은 손을 마주잡고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스타벅은 눈물을 글썽거렸다..가지 마십시오! 선장님 가지 마십시오!..그러나 이이헤브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소리를 크게 질렀고 보트는 무섭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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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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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없는 신자유주의의 신봉, 정치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 정의와 도덕이 와해된 사회의 결말은 어떻게 방향없이 질주할 수 있는지,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아찔한 결과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의 미국이 직면한 현실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질 정도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바로잡지 못하는 시장의 한계, 인지포획과 관념전쟁을 통해 정책 권력을 장악해 불평등을 더더욱 심화시키는 기득권의 횡포, 책임과 징벌없는 법치주의가 뒷받침하는 금융권의 약탈, 1%를 위한 거시 경제정책과 중앙은행의 독점 권력이 재생산하는 구조화된 불평등 등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면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무신경하게 속을 수 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경제 지표 뒤에서, 정작 기회 균등은 사라지고, 불평등의 추가 더 기울어가는데도 속수무책인 관료와 학계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한다는 저자의 대안은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상위 1% 위주의 기득권 개혁을 위한 대안으론는,  금융 부분의 책무성과 관련된 규제를 강화할 것, 독점금지, 기업의 지배구조나 파산관련 법률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 기업에 대한 각종 보조금 등 무상 공여 부분을 폐지할 것, 사법 개혁을 통해 사법적 정의를 실현할 것, 조세개혁을 통해 조세 회피 통로를 차단하고, 소득세, 법인세 등 누진성을 강화할 것, 유산세 제도의 복원을 통해 새로운 부호 계급의 출현을 방지할 것 등을 제안한다.

 

중하위 계층에 대해서는 교육접근권을 개선하여 기회의 형평성을 보장할 것, 저축을 지원하고 전국민 의료보장을 시행할 것, 실업급여 등 사회보호프로그램을 강화할 것 등을 제안한다.

 

또한 세계화와 과학기술이 미국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더이상 심화시키지 않도록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마련하고, 규제 완화 경쟁을 막는 방법으로 세계화를 관리하는 한편, 완전 고용 경제를 복원해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노동자와 시민의 집단 행동을 지원하고, 소수계 우대 조치 등을 통한 차별 철폐, 공공투자를 통한 성장의 형평성 및 지속가능성 복원, 노동력 절감이 아닌 자원 절감으로의 투자 및 혁신의 방향 전환 등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치 개혁의 대안으로 호주,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재산형을 부과하는 투표 의무화정책 등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확신과 원활한 작동에 대해 여전히 희망적인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추천사에 소개된 대로 경제학이 신봉하는 '효율성'을 기틀삼아,  현실의 기득권 독식 구조가 어떻게 불평등한 현실을 만들어가는지 경제학자의 전문성을 살려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기득권이 아님에도 기득권의 논리에 길들여진 99%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현실감각을 일깨우고, 쓰라린 현실을 감추는 헛된 통계와 숫자에 항거할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동시에 1%에게는 불평등의 심화가 기득권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루 빨리 깨닫도록 추동한다.

우리는 평등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시장의 힘을 재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시장이 훌륭한 성과를 내도록, 아무리 못해도 좀 더 나은 성과를 내도록 만들 수 있다. 개혁은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는 하위 99퍼센트 소득층이 자신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으며, 상위 1퍼센트에게 이로운 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아가는 경로다. 두번째 경로는 상위 1퍼센트가 미국에서 진행되어 온 일들은 우리의 가치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 즉 공공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인 복지를 달성할 수 있는 전제조건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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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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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날카로운 언어와 압축적인 문장을 해독하는 데 일부 어려움은 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라캉을 어떻게 읽고 적용해야하는지 초보자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찾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난해하고 전문적인 개념들을 통합할 때는 아무래도 좋은 전문가의 안내를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을 터. 이런 점에서 <How to read>시리즈는 출간 목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어떤 불합리적인 충동이 덩어리처럼 굳어져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본다.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고'가 아니라 '외상적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라는 것.

 

지젝은 프로이드에서 시작된 정신분석학이 단순히 정신병리를 분석하고 해석해 환자를 현실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라캉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서 환자의 욕망을 대면하도록 함으로써 철학적 면모를 드러낸다고 표현하고 있다.

 

라캉은 우리가  말을 할 때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규칙, 전제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행위라면서, 이러한 슈용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적정의 지점을 측정하는 척도로서 대타자가 작동한다고 개념화했다. 보통 대타자는 늘 나를 지켜보는 신, 이데올로기, 어떤 사람 등이 될 수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타자를 인식하는 주체가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할 때만 존재하며, 대타자는 개인 존재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가 엄연히 작동하는 현실에서 선언, 발화 등은 텅빈 텍스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상은 강제적인 것인데도, 주체가 어느 한 사회에 속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받아들이도록 요구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주체가 변모하는 순간은 행위의 순간이 아니라 선언의 순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라캉은 또 상호수동성에 주목한다. 미디어의 발달로 수동적 관람자에서 벗어나 타자가 연출한 스펙터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규칙을 세우는데 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상이 나 대신 쇼를 즐기고 나는 그 대상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해지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수동성의 문제는 가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는데,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활동과 참여에 지나치게 몰입하므로, 좌표 전체를 바꿀 진짜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 기만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따라서 열심 정치를 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정치를 하지 않으며, 열심히 기도하며 믿음이 견고해지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오히려 기도 행위에만 매몰됨으로써 신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일갈한다.

 

또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점, 평범한 대상을 숭고하게 만드는 어떤 것을 라캉은 소문자 a로 불렀는데, 이를 통해 파시즘과 차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해석한다. 또 이성의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문제될 것이 없는데, 초차아의 차원에서는 즐기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어떻게 물신주의의 분열로 나아가는지도 추측하게 한다.

 

일부에서는 라캉이 터무니없는 말놀음으로 정신분석학을 오도하였다고 비난했지만,  스스로 사회적으로는 정신병리적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면하게 한 라캉의 유산을 고려한다면, 어렵더라도 라캉에 대해서 반복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타자로서 욕망한다`라는 말은 인간의 욕망은 `탈중심화된` 대타자, 상징적 질서가 구조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주체는 타자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한해서만, 타자를 불가해한 욕망의 자리로 경험하는 한해서만, 불투명한 욕망이 그,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에서만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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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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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가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했듯이 이윤기님은 서양의 풍성한 이야기로 삶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가꾸셨다.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지만, 현실을 잠깐 잊고 싶을 때, 소소하면서도 품격있게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이드와 함께 잠깐 예술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 책은 그런 욕망을 온전히 충족시켜준다.

 

너무 오래전에 듣고 읽어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는 옛 신화들을 끄집어 내, 낯익은 그림, 조각들과 견주어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활자를 따라 읽다보면 황폐해져 갈라진 틈새로 습기가 잠잠히 침잠하듯 마음도 촉촉해지고.

 

갓을 형상화한 예술의 전당이 서양의 그것들처럼  전해내려오는 우리네 이야기들을 형상화한 건축물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윤기님의 아쉬워하는 탄식 소리가 내내 지면을 울리는 것 같다.

 

지극히 현실적인 삶이 더더욱 무미건조해지는 까닭. 한껏 부풀어 오르는 상상력의 부재, 앎의 즐거움에서 솟아나는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심의 결여, 돌아보고 새겨보며 꼼꼼히 들여다보는 관찰력의 몰락, 새로운 의미를 찾아 꿰어내는 통찰력의 미흡..역설적이게도 이윤기님이 길 위에서 들려주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도 철저히 헐벗고 공허한 생이 어떻게 가능한지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늠하게 한다.

어린이는 따지지 않습니다. 신화를 읽을 때도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은 요조조모 따지지요. 신화는,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인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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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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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특정 개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어쩌면 호치민 평전을 읽어보는 것이 유익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영웅에 대한 맹목적 숭배나 신격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퇴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걸어온 인생을 읽다보면,  집념으로 뭉친 인간의 끝없는 전진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젊은 청년이 소련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식민지가 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의제화시키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두고 절차와 순서를 뛰어넘어 의제화해나가는 과정은 사명감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동조하고 뭉쳐가며 세를 확장해야하는 조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가야할 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숱한 위장과 탈출, 극한 긴장과 도망이 연속된 삶이었지만, 경직된 사고가 아니라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점은 호치민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두령을 향한 경쟁과 경계, 사이공 정권의 무능, 아이젠하워, 케네디, 린든 B 존슨, 닉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실책, 호치민과 레두안 등 북베트남의 차세대 권력 지형의 변동, 한국전쟁과 분단 등이 얽히고 섥히며 만들어낸 사안들을 읽으면서, 단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각성하기도 했다.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볼 것인가, 민족주의자로 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향했다기보다는 베트남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한 측면이 있는데다, 단순한 민족주의자로 치부하기에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베트남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도 일부 열중했지만, 국제적 공산주의 연대를 구상하는데도 상당히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호치민에게 배울 것은 '베트남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끊임없이 현장과 현실을 돌아보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냉정한 평정심을 바탕으로 유려한 외교를 펼쳤으며, 안으로는 소탈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균형감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사료를 바탕으로 호치민을 영웅화하거나 윤색하는 대신 그의 행적을 쫓으며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덤덤히 그려냈다는 점일테다. 사심 없이 민족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고 절망적이겠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최신식 대포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주의입니다! 그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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