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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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방탕하고 이기적인 노인인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면서 살인마를 추적하게 되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과정이 그려진다.  큰 아들 드미트리는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애인을 사랑하는 다혈질 청년으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쓴다.  둘째 이반은 형의 약혼녀를 흠모하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인격의 소유자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신은 인정하더라도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념을 설파한다. 셋째, 알렉세이는 온유한 성품의, 사제를 꿈꾸는 청년으로 비참하다못해 처참한 현실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묘사된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인물. 하인이자 요리사로 뇌전증을 앓고 있으며, 이반의 신념에 동조하면서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실제로 살해한 범인이지만, 법적으로는 무죄로 추정되는 가운데 스스로 유명을 달리한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소설인데도 극찬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인물들로 투영되는, 작각의 본심이 날카로운 삽화로 제시되면서 독자들을 매료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유의 철학, 신앙, 신념 등을 소설 곳곳에 배치하면서 문학과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능숙하게 드러내면서도 소설의 줄거리를 추적하는 시선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감성, 이성, 영성으로 대비되는 세 아들과 인간의 죄된 본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인간에게 구원은 무엇이며, 진정한 혁명은 어떠해야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삶과 죽음, 법과 정의, 사실과 진실이 뒤엉키는 현실을 두고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야하겠는지 질의한다.

 

기억에 남는 삽화는 아마도 누구에게나 이반이 읊는 대심문관 편일 것이다. 15세기의 어느 날, 웅장한 화형대에 100여명이 넘는 이단자들이 처단되는 그 틈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된다. 다시 예전처럼 아픈 자를 치유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는 가운데, 아흔살인 대심문관 추기경이 지나가게 되고 곧장 예수님을 잡아들인다. 그는 한눈에 재림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고 비좁은 감옥에 가둔 후 한 밤중에 몸소 횃불을 들고 찾아간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재림해서 대심문관의 일을 방해하는지 따져묻는다. 오늘은 열광하지만 내일은 또 다시 민중들이 죽이려 들 것을 뻔히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사탄이 건넨 세 가지의 유혹에 대해 예수님처럼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겸허하게 비켜갈 사람은 많지 않은데 그 길을 유동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보여준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빵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하며, 명예가 필요한 단순한 존재인데, 왜 진정한 자유의 길을 제시하여 번민에 빠지게 하냐는 것이다.  대심문관인 추기경을 비롯하여 우두머리들은 천상의 빵을 고대하기 어려운 수많은 인간들에게 지상의 빵을 대신 줌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대신 짊어졌고, 연약하게라도 예수를 사랑하게 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이들은 소수인데, 그렇다고 다수의 인간을 버려두는 것이 옳으냐는 역설로 예수님을 몰아붙인다.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님처럼 기적, 신비, 권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거의 없다면서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지만, 심연을 꿰뚫는 온화한 미소만 짓고 대심문관에게 입맞춤을 한다. 대심문관은 문을 열고 다시는 오지 말라면서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놓아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의 입맞춤을 통해 가슴이 불타오르지만,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 다른 삽화는 알렉세이의 스승 조시마 장로가 만난 신비스러운 방문객에 관한 부분이다. 오랜 시간 동안 관직생활을 한 후 높은 지위의 부유한 사람으로써 자선가로 활동했던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경멸을 마다않고 옳은 일을 감행한 조시마 장로에게 그가 느끼는 큰 기쁨을 자신도 소유하고 싶다며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죽였고, 그 죄를 다른 이가 뒤집어쓰고 죽은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조시마 장로는 진실을 공표하도록 설득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우연히 펼친 말씀이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부분이었다. 이후 그는 진실을 밝히고 유죄를 입증하는 모든 증거를 내밀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단정하고, 수사도 중단된다. 그는 이후 죽어가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조시마 장로에게 영혼 속에서 난생 처음 천국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셔서 자신을 부른다고 고백하면서 사실은 진실을 말한 그 날, 조시마 장로까지 죽이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면서 찬양한다. 그의 죽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으며, 오히려 조시마 장로가 그를 어지럽혔다면서 온 도시가 장로에게 대항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삽화는 가난한 퇴역 대위 스네기료프의 어린 아들 일류사의 죽음 이야기로 카라마조프가의 불행과 병행되어 배치된다. 일류사는 아버지가 드미트리에게 모욕을 당한 이후 알료사에게 돌을 던지며 알렉세이와 엮이게 되는데  짐짓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떠난 어린 소년은 시체에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바위 위에서 일류사를 위한 조사를 하면서 한 때는 일류사와 적대적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로 뭉치게 된 소년들에게 어떤 험난한 일이 있어도,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결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것과 인생에서 성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갖게 된다면 평생 구원받은 셈이라는 것을 설파한다. 선량하게 살며, 성실하게 살고, 서로 서로 잊지 말자는 당부를 하면서 일류사 때문에 모두가 한평생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갖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초라한 신발을 신고도 불행하고 죄 많은 아버지를 위해 온 학급을 상대로 분연히 일어났던 일류사를 영원히 기억하자는 조사를 통해 참되고 좋은 일을 하면 삶은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드미트리의 재판 장면은 범죄심리학, 법학, 철학을 넘나들며 세밀한 묘사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검사 키릴로비치는 지상의 형벌은 자연의 형벌을 경감해주면서 범죄자의 영혼을 절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드미트리의 유죄를 확신한다. 반면 변호사는 명백한 증거와 치밀한 상황 구성을 통해 드미트리의 무죄를 변론하여 일순간에 법정의 분위기를 반전하는 듯 하지만, 뜻하지 않게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가 히스테리적 반응을 일으키면서 삽시간에 드미트리는 유죄로 확정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뛰어난 감성과 면밀한 이성이 갖는 한계를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죄된 본성으로 구현해낸다. 이반의 사상에 감수된 스메르쟈코프는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표도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최고의 이성이 넘나드는 법정이 카체리나의 허튼 감성과 맞닿자 드미트리는 순식간에 죄를 짓지 않았으나 율법상 죄인이 된다. 반면 이반은 스메르쟈코프를 만나고 온 후 자신이 실제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나 살인을 교사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악마와 싸우며 쇠약해간다. 물론 이반은 율법상 무죄다. 이 모든 과정의 순간마다 연결고리로 등장하는 알렉세이는 당장은 무력하고 무의미해보이더라도  진실의 이면, 선과 악, 구원과 속죄의 문제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드러낸다.

 

드미트리와 이반으로 사는 생 위로 알렉세이의 시선을 드리우는 작가의 역량은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만은 아닐테다. 청소년 시기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 농장에서 살해된 아버지, 한창 때 자신과 함께했던 형의 죽음, 두번의 결혼과 어린 자녀들의 죽음, 혁명을 꿈구다 사형 집행 직전 강제노동형으로 감형되었던 경험 등 일반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던 그의 인생 역정이야말로 삶으로 구현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아니었나 싶다. 원래는 알렉세이가 혁명군으로 변모하는 데까지 소설은 구상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여동생과 상속 문제로 다툰 후 폐동맥 파열로 사망한 것 역시 그분의 섭리가 아니었나 싶다. 혁명의 성공과 실패, 알렉세이의 변모는 어쩌면 거대한 역사, 장엄한 인생의 진실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테니까.

 

인생에 대해 알아야할 것은 모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에 있다-커트 보네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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