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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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해와 폐허로 남은 사실을 목도할 때 가장 먼저 평안을 찾는 손쉬운 방법은 아마도 때마침 존재한 외부의 적을 찾아내 온통 죄과를 뒤집어 씌우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찾아낸 적이 누가 봐도 탐욕스럽고 흉물스러운 모습이라면 감사하기까지 하다. 치우치기 십상인 주관적인 해석은 타인의 객관적인 인정까지 덧붙여져 견고한 확신으로까지 변모하고 시간의 혜택까지 덧입게 되면 애초부터 희미했던 진실은 흔적을 찾는것조차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눈을 부릅뜨고 사실을 헤집어 비탄한 진실까지 파고드는 것은, 단순한 용기를 넘어서 인간이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는 숭고한 어떤 괴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할 수 있더라도 피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도망치고 싶은 그런 작업을, 똘똘 뭉친 연대의 시선에서 비껴나 홀로 싸워나가는 치열한 탐구를, 뉘라서 도맡고 싶을까.

 

치누아 아체베는 이런 놀라운 작업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통해 꼼꼼하고 투박하게 묘사해냈다.

 

병약한 아버지-남자답지 못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던-아래에서 최고의 남자로 우뚝서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가를 이뤄낸 오콩코는 부족의 신념과 문화를 온전히 숭상하고 예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일상의 몸짓, 판단, 예견 등은 모두,  부족의 굳건한 유산으로부터 유래한다. 그 유산을 비판적 성찰 없이 받아들은 그는, 단적으로, 자신이 수양 아들처럼 길러온 이케메푸나를,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두려워 죽이는 데까지 나아갈 정도다.

 

가장으로써 당연히 가족들을 부양해야하지만, 가풍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때로는 가혹하게 대했고, 두려움, 외로움 등을 숨기며 늘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부족의 자랑스러운 일원으로 살던 그는, 마을에서 존경받던 에제우두의 장례식에서 그의 총알이 우발적으로 에제우두의 아들을 쏘면서 마을을 떠나게 된다.

 

처가로 떠난 그는 다시 맨 몸으로으로 일을 하면서 가세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던 중 오콩코가 살던 우무오피아에는 백인들이 새롭게 접근하는데, 많은 남자와 여자들은 새로운 체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짓는 교회, 교도소, 경제 활동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게 된다.

 

처음 온 브라운 신부는 우무오피아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하고 조심하지만, 부족의 일원이었던 에노치는, 백인들의 종교에 경도된 나머지, 우무오피아의 대지의 신을 경배하는 연례의식에서 전령인 에구구의 가면을 벗겨냄으로써 부족의 분노를 일으킨다. 브라운 신부의 뒤를 이어온 스미스 신부는, 중무장을 하고 교회를 흙더미로 부순 우무오피아 에구구들을 용서하지 않고 사법당국에 고발을 하고, 이들은 곧장 재판을 받고 수감된다.

 

벌금을 지불하고서야 겨우 풀려난 오콩코는 수감중에 수치를 당했고, 훌륭한 남자들이 사라졌다며 분노하고, 앞날에 대해 결정하는 집회에서  백인들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대신 타협을 택한다면 자신이 대신 복수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장터에서 집회가 열리는 동안 뜻하지 않게 백인들의 전령들이 비집고 오자, 오콩코는 그 자리에서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분노의 화신처럼 전령을 도끼로 내리친다. 이후 치안판사가 그를 검거하기 위해 집으로 왔지만, 그는 집 뒤의 나무에 목을 맨 후였다. 그의 시신을 끌어내리라는 명령에 우무오피아 사람들은 그가 남자는 스스로 죽어서는 안된다는 대지의 신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댈 수 없다고 답하고, 치안판사는 부하들을 시켜 그의 시신을 끌어내린다.

 

치안판사는  전령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겠다면서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이라는 제목까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작가는, 마치 카메라처럼 현상과 사실을 그대로 비추고 묘사하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처럼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 상이한 인격들이 역사적 시공간에서 마주할 때 어떻게 무너지고, 교섭하는지 담담하면서도 대담한 시선으로 포획한다. 그러므로 침탈은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내부의 붕괴와 외부의 압력, 내부의 부활과 외부의 침잠으로 자연스럽게 교차되고 연결되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한 인간의 일대기가, 그리 나아보일 것 없는 정복자의 평정으로 단순히 평가되는 마무리는, 단선적인 역사관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통렬하게 지적한다.

 

자기 내부의 연약함을 드러내면서도, 강인한 자부심을 드리우는 소설의 기법은 생경한 아프리카 소설 읽기의 매력을 한껏 고양시킨다. 또 아프리카 문화와 문학의 풍성함까지 맛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을 버리고 당신들의 신을 따른다면 버림받은 우리 신과 조상님들의 화를 어떻게 면할 수 있는가요? 그대의 신들은 살아 있지 않으며 사람을 해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나무고 돌멩이입니다. 이것이 마을 말로 옮겨지자 비웃음들이 터져 나왔다...하지만 거기에는 이에 마음이 사로잡힌 한 젊은이가 있었다. 이름은 은워예로 오콩코의 장남이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삼위일체의 이상한 논리가 아니었다. 그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종교의 시, 뼛속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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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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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일지라도, 새로운 관점으로 "낯섦"의 프리즘을 관통해서 보는 것은 언제나 싱싱한 설레임을 안겨준다. 이 책은 이러한 공식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미술 감상의 새로운 방법론을 소개한다.

 

특히 현직 의사의 시선으로 미술 작품을 소개하면서, 의학의 역사, 질병과 함께하는 작가의 삶, 시대와 역사, 신화와 성경 등 숨은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어갈 수 있다.

 

요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페스트는 명화를 통해 감염병을 대하는 인간 군상들과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화살을 막아줄 수호신으로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격찬했던 것이나 불확실한 페스트의 만연에 대항할 뚜렷한 무기가 없자  대신 희생양을 찾아냈던 인간의 광기, 감염병의 대재앙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했던 인간의 모습 뿐만 아니라 봉건귀족의 몰락과 함께 민족주의의 출현이 대두된 배경이 묘사되는데, 코로나 19가 보여줄 미래를 과거의 모습을 통해 반추하는 계기도 된다. 현실의 잔혹함 앞에 무릎 꿇지 않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해결 방안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진단에 대해서도, 저자처럼 적극 동감하게 된다.

 

스페인 독감과 에곤 실레의 가족사,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뭉크,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삶은 생의 숙연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폴레옹과 위암 추정, 디프테리아로 짧은 생을 마감한 쇠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압생트 중독, <돌아온 탕자>와 이별로 얼룩진 램브란트 등 예술과 인생의 얽힌 실타래를 엿보는 재미도 돋보인다.

 

다양한 작품과 정신건강 문제를 이어 설명하는가 하면,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도 다시 한번 복습하게 되는데, 미술과 의학의 접목을 통해서 새로운 인식의 세계가 열리는, 독서의 즐거움과 미술 감상의 재미가 한껏 어우러진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이 교류하는 학문입니다. 명화는 의학에 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이 책은 의학의 주요 분기점들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명화라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의 입을 빌려 의학을 쉽고 친근하게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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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 보어 : 확률의 과학 양자역학 지식인마을 5
이현경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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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 근간이 되는 과학의 패러다임 변화에는 무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가볍게 읽고도 대강의 내용을 훑어보고 싶은 책을 찾아보았는데, 내용까지 알차서 안성맞춤이다.

 

이 책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핵심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병렬되어 있어 우선  가독성이 좋다. 이 책 전반에서 가장 흥미로는 단어는 아무래도 "경향"이지 않을까 싶다. 뉴턴의 고전 역학 세계에서 확실히 "존재"하던 물질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세계를 바라보는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획기적인 전환점일 수 밖에 없다.

 

이전에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위치와 속도를 알면 입자의 경로를 명확히 계산할 수 있어 결정론적 사고로 세상을 관측할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예측 값 주위에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 어떤 수치가 나타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만 계산 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린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강조했듯이 현실의 모든 사건은 본질적으로는 우연이지만, 확률은 필연적이라는 점.

 

학창 시절에 배운 열역학 에너지 법칙의 놀라운 함의는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에너지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변한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막스 플랑크의 혁명적 사고가 이렇게 경이롭게 느껴질 줄이야.

 

아인슈타인은 통계역학을 연구하면서 가열된 물질의 에너지가 빛 에너지로 바뀌는 방식을 연구하면서 빛 에너지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빛의 양자 개념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실제로는 실험장치를 쓰지 않고 이론적 가능성을 따져 이어 맞추면서 마치 실험을 한 것처럼 머릿 속에서 결과를 유도하는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을 개발한다. 아인슈타인은 숨겨진 변수만 알 수 있다면 모든 현상을 예측할 수 있으며 무질서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시공간을 이룬다고 보면서 시간은 영원할 수도 있고, 시작과 끝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에 단초를 제공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신이라면 시간을 초월한 그 밖에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데까지 철학을 확장시키기도 한다. 또 하나의 원인이 반드시 하나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가 복잡한 비선형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복잡계 이론의 개발에도 단서가 된다.

 

미술에서는 피카소나 달리, 마그리트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고를 한다. 4차원의 3차원 투시를 하는 것 같은 피카소의 그림이나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추고 길이가 없어지는데, 달리는 이 원리를 그림에 활용한다. 마그리트는 앞에서도 뒷모습이 보이는-두께가 없어지는-길이 수축의 원리를 그림으로 보여준다.

 

반면 맞수격인 보어는 플랑크의 양자 개념을 이용해, 원자 내부에서 전자가 특정 값을 지닌 궤도상만 작용하는 체계로 파악하면서 현재의 전자 구름 이론을 도출하는 징검다리 이론을 개발한다.보어는,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했던 모든 현상을 다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응원리와, 입자를 파동 또는 알갱이로 생각하면서 배타적인 모델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원자의 구성 입자들이 나타내는 현상을 완전히 기술하려면 두 모델 모두가 필요하다는 상보성의 원리도 주창한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한다.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 광선을 내보내면 광선 속 광자가 전자에 충돌하면서 전자의 위치를 얻어낼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광자가 전자에게 자기 운동량의 일부를 전달하기 때문에 전자의 운동량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불확정성의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된 값을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입자가 파동의 성질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불확성의 원리에 따라 카를 포퍼는 <열린 사회에 그 적들>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는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고 주장했고,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이 관찰 수단에 의해 변화한다는 사실을 통해 '죄수의 딜레마'같은 게임 이론이 착안된다.

 

기초적인 상식이 부족해 혼돈을 느낄 즈음, 앙자론을 생각하면서 혼란을 느끼지 않으면 양자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보어의 탄식은 오히려 희망이 된다.

 

양자론에서는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 즉 계단 모양의 그래프로 그려질 수 있는데, 이것은 DNA 구조를 설명하는 데 적합하며, 반도체도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으로 양자 도약을 활용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최근에는 입자 대신 모든 물질의 근원을 초끈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여러 입자들은 한 가지 끈이 어떻게 진동하느냐에 따라 다른 질량과 물리량을 갖는다는 것에 착안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읽고 난후 얻은 최고의 결론은 과학, 예술, 경제,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위해 함께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얽혀가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가는 데, 과학도 한 몫을 성실히 담당한다.

양자역학은 어떤 현상을 구현할 때 오직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확률이라는 것이 엄격한 결정론적인 방식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해보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본질적으로는 우연인데, 그 확률은 필연적이란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삼각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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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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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나면 누구나 정교하게 잘 짜인 설계도면을 읽고 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내용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책의 구성 체계 자체가 공부하기의 방법론을 배경에 감추어둔 것처럼 짜임새가 있다.

 

저자는 공부의 철학, 그 핵심을  동조에 서툰 삶이라고 정의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 생각하기도 전에 공감을 요구하고, 곧바로 동조하며 주변에 맞추어가는 삶 속에서, 공부하기란 얼렁뚱땅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조를 실험하는 모습으로 변모하며 결 다른 바보로 변신하는 가능성을 열어간다는, 사뭇 흥미로운 이야기로 철학의 세계에 초대한다.

 

공부는 결국 자기 파괴로써, 다른 사람의 기대에 의해 구축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진단하면서, 먼저 언어의 타자성과 가상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익숙한 언어와 현실을 연결지어 사고하고 행위하는 동조의 틈새를 비집어 전혀 다른 용법으로 활용되는 언어의 지대를 구축하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장난감같은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일부러 조작하는 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기존의 동조에 서툰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것.

 

이렇게 언어를 완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적인 기술로써 츳코미(아이러니)와 보케(유머)를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의 코드를 전복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츳코미는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보케는 갑자기 엇나가는 발언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머는 시각을 바꾸는 것인데, 아이러니를 지속하다보면 코드의 초코드가 진행되면서 무엇을 믿고 말해야할지 알수 없는 코드의 부재, 탈코드로 나아가고, 이러한 파괴적인 과정을 겪으면, 그 언어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으로 변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껍질을 벗겨낸 진짜 현실 자체를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유머는 코드를 파괴하는 대신 확장 또는 감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유머가 많아지면 의미가 너무 많아져 적당한 유머를 조작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하게 되거나 정해진 코드 안에서 세부적인 이야기에 집착하면서 언어의 소리 등에 집착하는 향락적인 상태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즉 아이러니를 통해 과잉으로 나아가는 대신 중간에 유머로 전환하고, 다시 유머의 과잉화를 막는 방식으로 형태 자체의 향락을 이용하고, 다시 아이러니컬하게 분석하는 것, 그것이 깊은 공부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과제로 욕망과 관련하여 공부를 실천하는 방법론으로써, 현상을 파악하여 문제로 압축하고, 다시 이 문제를 키워드로 도출해내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깊이 파고드는 아이러니와 한눈팔기인 유머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나름의 개성적 판단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것이 깊게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요약한다.

 

한편 깊이 공부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 연표를 만들기, 독서의 방법론, 노트 활용법 등 유용한 팁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장 탁월한 부분은 마지막 단락의, <이 책의 학문적 배경>인데, 이 책의 주요 철학적 근거가 되는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 라캉, 비트겐 슈타인, 도널드 데이비슨, 푸코 등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곁들였다는 적확한 기술은,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공부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한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공부란 획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는 상실이다. 기존의 방법대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에게 영어 능력과 같은 기술이나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없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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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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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안에 격변을 겪은 요 몇년 사이, 우리 사회를 새롭게 진단하고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주목한 정치철학자가 한나 아렌트라는 소식을 설핏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 철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디서부터 읽어야할지 엄두를 못냈던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내가 지금 마주한 현장에서 아렌트를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통렬한 의지를 갖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 19 팬데믹을 매개로 읽었언 책에서 아렌트의 언급을 보았고, 이진우 교수님이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결하게 요약,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출간했다는 서평을 보자, 더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결과적으로 매우 옳았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철학적 지평을 10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졌다고 해서, 전체주의가 끝났는가, 무엇이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가,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가 왜 괴물이 아닌가, 왜 완전히 사적인 사람은 자유가 없는가, 왜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가, 정치권력은 꼭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정치는 왜 가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가, 지배 관계를 넘어서는 평등의 정치는 가능한가, 어떻게 정치의 규칙을 만들 수 있는가.

 

10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아렌트의 저작들을 교차 시켜 해답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렌트의 수많은 저작들이 어떤 좌표에서 쓰여졌는지 가늠하도록 안내하는 동시에,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속살을 진단하면서, 특정한 정권의 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전체주의는 이념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예측을 지향한다는 데 주목한다. 특히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념 자체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념에 대한 공적인 논의를 허용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한다는 것이고, 거기에 현실을 바꿀 힘이 없으므로 논리적 일관성만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세뇌를 가한다는 것이다.

 

또 반복적인 선전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데, 이 선전 자체가 과학성을 근거로 내세우며, 예언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가 하면, 결코 오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단절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행위의 능력마저 파괴된다는 점을 간파한다. 즉 다양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드는 총체적 지배하에 가둔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총체적 지배는 법적 인격을 죽이고, 개인으로서 죽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을 살해하며, 개성을 파괴함으로써 자발성을 박탈하는 단계를 거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브라더에 맞서는 방법으로 일기쓰기를 채택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서의 잔학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전체주의는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다고 진단한다. 대중은 외부의 자극에 쉽게 무너지는데, 계급과 계급의식의 보호막마저 무너지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분노하는 대중으로 변모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중은 수적으로는 거대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원자화되어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기제 속에서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관찰을 서술한다. 게다가 인간의 자발성이나 예측불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잉여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다원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는 점도 밝혀낸다. 히틀러가 왜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다수의 집단보다 생각하는 소수의 개인을 주목해서 압제해야한다고 주장했는지, 아렌트는 일종의 주해서처럼 설명해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과 함께 아렌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 공적 영역과 자유에 대한 사유일 것 같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별하는 핵심으로 "행위" 가능성을 들고 있는데, 다른 것들은 혼자서도 할 수있는 것이지만, 행위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배태적인 특권이라고 정의한 후, 폴리스를 예로 들어 폴리스야말로 공적 영역이자 자유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론의 영역에서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여야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타인과 내가 공동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원성이야말로 자유의 토대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성이 내뿜는 갈등과 경쟁을 견디지 못한다면 자유는 성립되지 못하며, 다원성은 개인의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발현되는 의견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도 강조한다.

 

아렌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규정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답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탄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 진정으로 정치적인 공론의 장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명명한다.

 

또 정치적 의견은 다양한 이해와 관점에 따라 형성되므로 순수한 사실을 지향하는 대신 다양한 해석, 논쟁, 논의를 통해 사실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교하면서 자유와 체제의 이행 과정을 분석한 대목이나, 미학과 정치적 판단을 비교하면서 정치를 위해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가져야할 것은 판단력이라고 분석한 대목도 인상깊다.

 

한 번의 독서로 아렌트의 사상을 완전히 섭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시도라도 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적 공간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 치열하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행위가 없다면, 전체주의의 공포는 언제 어디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녀의 확고하고도, 일관된 주장은, 왜 이 시점에, 아렌트에  주목해야하는지 충분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시잘할 미래가 없다면, 무엇인가 시작할 수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완전히 빼앗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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