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동서문화사 월드북 10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채수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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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작가가 바라본 혁명에 대한 평가는 뜻밖에도 영성과 맞닿아 있다. 죽음의 공포를 직면한 후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 천착했던 작가의 관찰은 누가복음에 소개된 귀신들과 돼지 떼로 귀결되면서, 그가 아니라면 결코 쓰지 못할 대작으로 탄생했다.

 

<악령>은 러시아의 대 혼란기였던 1860년대의 러시아 사회와 인간 군상들을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후록에 실린 작품 소개에 따르면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남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바노프가 어느 공원의 늪 속에서 타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사건이 아니라 후에 네차예프라는 활동가와 그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도스토예프스키는 파괴를 통해 새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맹목적 혁명의 의지를 '악령', 즉 '귀신들린' 정신으로 도치하면서, 오직 목표만을 향해 일념하는 조직의 모습을 귀신이 자리잡은 돼지떼, 즉 결국에는 강으로 빠져들어가 몰살하는 돼지떼로 표현하면서 소설의 큰 줄거리를 다져나간다.

 

그러나 작가의 천재성은 이 소설을 혁명조직의 탄생과 활동가의 행동에 근거해 단편적으로 구성하지 않는 데 있다. 처음에는 스쩨빤 선생과 스타브로긴의 어머니 바르바라 부인의 사랑도 아니면서 우정도 아닌 애매하고 모호한 관계 속에서 싹트는 삽화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거기에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거칠었다가 일순간 얌전해지는 스타브로긴의 일상이 언뜻 비쳐지지만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렇다할 사건의 전개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다가 차츰 네차예프 격인 뾰뜨르가 등장하면서 지령, 5인 조직 등이 거론되고, 죽음을 극복하면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어차피 죽을 바에야 샤또프의 살해를 감행했다고 유서까지 쓰면서 책임을 뒤집어 쓴 끼릴로프,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출산을 돕기 위해 온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출생한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며 무한한 감동에 빠지는, 그러나 뾰뜨르로부터 조직을 밀고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아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 쌰또프, 방탕한 생활의 끝에서 만난 스타브로긴의 절름발이 아내 마리야와 술고래꾼 레뱌드낀, 스타브로긴을 사랑하지만 마브리끼에 기대고 결국 폭도에 의해 살해되는 리자베따, 현의 사건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렘브께와 율리아 부인, 돈에 눈이 먼 탈옥수 페지까 등이 그려지면서 모든 일화는 살인, 방화, 파괴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스쩨빤 선생의 아들 뾰뜨르는 작은 조직들이 곳곳에 파괴를 일삼아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한다고 믿는 인물로, 중앙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신뢰를 얻어 5인 조직을 통솔하면서 샤또프 살해를 지시하는가 하면, 공포를 극복하는 자유의지를 선택하겠다는 끼릴로프를 설득해 샤또프 비극의 책임을 유서에 남기도록 종용한다. 특히 뾰뜨르는 사상적 고뇌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다기보다는 파멸과 붕괴에 열정을 쏟아붓는 활동가로서, 자신이 혁명의 선두에 서는 대신 스타브로긴을 혁명 정신의 화신으로 삼기를 갈구하는데, 스타브로긴의 거절로  실패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타브로긴은 어쩌면 혁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방탕과 타락의 극치 속에서 어느 소녀를 추행하고, 그 결과 그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지만,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 앞에서 죄책감을 느껴 스스로를 용서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찌혼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지만, 구원의 방편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러시아 구 사상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쩨빤 역시 가출을 감행하다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위세가 대단했던 바르바라 부인 역시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쓰러지게 된다.

 

등장 인물 모두가 죽음과 좌절로 끝맺는 소설의 결론은 <악령>의 뚜렷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구원과 혁명, 부활과 재생이란 결국 무엇인가. 가슴에 불을 뿜으며 열광하는 사상, 끝까지 파고드는 이성의 성찰, 집착으로 점철되는 사랑, 위풍당당한 권력, 허세와 과시로 치장된 권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과 번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 지향적 행동들, 또렷이 영혼을 구원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허상..모든 것이 구원과 혁명을 지향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한 데 어울어져 파멸과 와해로 합류되어 버리는 그 놀라운 이면을, 작가는 담담하지만 꼼꼼하게 그려냈다.

우리는 우선 혼란 시대를 야기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이미 이야기했다시피 우리는 국민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도 상당히 우세합니다..중략..백성도 취해 있고, 어머니들도 취해 있고, 아이들도 취했고, 교회는 텅 비어 버렸죠. 아아, 이 새풍조를 좀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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