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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대는 마음으로 투그리듯 읽어나가리라, 그렇게 마음 먹기까지 망설임의 시간도 꽤 흘러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의지를 다잡고 집중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책을 진득하게 앉아 곱씹으며 읽지 않는 것은 뭔가 불경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 같은 강박증도 한 몫했던 덧 같다.
그럼에도 독서를 시작하게 한 힘은 순전히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삶의 의미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어떤 열망의 추동이었다. 산란하는 가벼운 충고나 맥빠진 권고를 넘어서서 대문호가 포효하듯 쏟아내는 어떤 진실, 장문의 저작이 아니면 전달할 수 없는 묵직한 발견을, 지금이 아니면 체득할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비슷한 감정도 일었던 것 같다.
<전쟁과 평화>는 표면적으로는 피에르 베주호프,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마리야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 나타샤 로스토바 등 세 가문을 대표하는 다섯명 주인공들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피에르는 사생아로 아버지의 죽음 후 러시아 최고의 부호 중 한 명으로 등극한다. 선량한 마음을 가졌지만 야무지기 보다는 상황에 휩쓸리는 청년으로 최고의 미녀인 엘렌과 사랑 없는 결혼을 시작하고, 방탕한 생활과 공허함에 지쳐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 삶의 의미를 추적하던 그는 이를 통해 도덕적이고 선함을 추구하지만, 이내 흔들린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 때 모스크바에 남아 포로로 잡히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나타샤와 결혼 후 다시 사회적 연대와 희망을 꿈꾼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유형이다.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는 인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두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는다.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지만, 그의 이상적 갈망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 죽음의 고비를 맞으면서 적이지만 심취했던 나폴레옹의 졸렬함을 마주하면서 실망하게 되고, 이후 변심한 나타샤에 대한 번민과 적수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전장을 누비다가 죽음을 앞두고 나타샤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나타샤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면서 영광이나 이상의 허무함을 발견하게 되고, 죽음이 새로운 세계로의 문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타샤를 용서하고 사랑을 받아들인다.
마리야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는 아버지에게 억눌리면서도, 안드레이의 어린 자녀를 돌보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삶에서 실천하는 인물로, 어떤 상황에서도 가정을 돌보고, 주변을 살피는 따스한 인품의 소유자다. 그녀의 외모는 뛰어나지 않지만, 니콜라이는 헌신적이고 신실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마침내 그녀와 결혼한다.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은 밝고 낭만적인 청년으로, 친척인 소냐에게 결혼의 의지를 내보일 정도로 일견 충동적이지만, 로스토프 가문의 장남으로 나폴레옹과의 일전에 참여하면서 전쟁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품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자 집안의 경제적 책임을 떠 안고, 가족을 돌보면서 점점 책임감 있는 인물로 성장한다.
나타샤 로스토바는 니콜라이의 여동생으로 밝고 아름다우며 재주가 많은 아가씨.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을 표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상처한 안드레이 볼콘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안드레이 공작과 약혼까지 했지만, 아나톨 쿠라긴의 유혹에 빠져 그와 도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우다 결국 파혼하게 된다. 감정에 솔직한 그녀는, 극적으로 죽어가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만나게 되고, 그의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 이후 남동생 페챠의 죽음으로 부모님이 흔들리자 다시 생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어서게 되고, 모스크바 탈환 후 피에르를 만나면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들 다섯명의 주인공은 <전쟁과 평화>를 관통하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하는데, 이 배경이 되는 전쟁 자체가 또 하나의 주제를 펼쳐나간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영웅화와 명령이 완벽하게 수행되는 전쟁을 그려내는 역사적 접근을 비판하면서, 전쟁은 결코 한 영웅적 인간의 의지나 천재적 면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장은 결코 명령대로 수행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소설적 장치로 피에르의 전쟁에의 자원이 중요한 삽화로 제시되는데, 명령 전달 체계는 물론, 러시와와 프랑스의 전쟁 목표, 지형적 입지, 병사들의 상태와 요구, 공과를 과장하려는 관행과 입신양명을 꿈꾸는 지휘관들의 욕망 등 세세한 요인들이 뒤엉켜 전장은 새로운 시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에서 무능하고 겁 많은 것으로 알려진 총사령관 쿠투초프가 오히려 지혜롭고 명민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톨스토이는 전쟁을 이끄는 심연의 무언가를 포착하면서 나폴레옹의 붕괴를 예견하고, 끝까지 심연의 무언가가 도드라질 때까지 인내했다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쿠투초프의 혜안을 긍정한다.
전쟁의 큰 흐름을 포착하는 노인의 안목과 더불어 중요한 인물은 러시아 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다. 피에르가 포로로 잡혔을 때 만난 카라타예프는 돌처럼 눕고, 빵처럼 일어난다면서 앞날을 알 수 없는 포로 생활 속에서도 단순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며 피에르의 마음을 연다. 그는 죽음조차도 온전히 수용하는 인물로, 이동 중에 기력이 점점 떨어져 결국 총살된다.
지휘관으로서의 쿠투초프만 전쟁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익명의 병사지만 전쟁 속에서 살고 죽으며, 자신의 방식대로 실존한 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그려내면서, 톨스토이는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부분은 단연 <에필로그>와 <전쟁과 평화에 덧붙이는 말>이다. 역사가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소회, 학문으로써 재단할 수 없는 실재의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주장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엄숙하다. 어쩌면 그는 역사의 눈으로 재편되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이 아니라 진실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짜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전쟁과 평화>는 스토리로 읽는 소설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일부에서 소설이 아니라며 비판하듯 철학서이면서 새로운 역사서이면서 장엄한 서사시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수용하며 성장하는 생, 직면하며 인내하는 명. 역사를 이루는 모든 층위가 부딪히면서 개별적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가며, 인간들은 부딪히면서 '전체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상거지보다 못하지 않은가. 저들이 강할 때 우리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는 저들을 동정할 수 있다. 저들도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군들?..중략..하지만 누가 저들을 이곳으로 불렀느냔 말이지. 자업자득이야. 개...자식들..."병사들은 아마 쿠투조프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수의 엄숙한 말로 시작되어 선량한 노인의 말로 마무리된 연설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설의 진심어린 의미는 전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자각과 어우러진 위대하고 엄숙한 감정, 다름 아닌 노인의 이런 악의 없는 욕설로 표현된 바로 그 감정은 병사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 속에 깃들었고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기쁨의 함성으로 표현되었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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