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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최한기 : 실학에 길을 묻다 ㅣ 지식인마을 18
임부연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평점 :
외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무엇이든 찬양하고 고양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역사를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우리 안에는 우리의 문제를 타개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심상 자체가 빈약하다며 근거 없는 자괴감을 갖기도 했었는데, 정규군 대신 의병이 일어나고 합심해야 할 때 정쟁만 하다 무너졌다며 섣부른 결론을 내면화한 까닭도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시대의 물꼬를 트는 사상적 기반이 연약하므로 상황에 휩쓸리며 순간의 기지나 영웅의 출현에만 기대어 왔다며 독단적으로 조소했던 적도 있었다.
이 책은 순전히 최한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선택했는데, 내 오랜 편견을 산산히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자국 우월주의에 잇댄 감성 발언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 기반과 인프라가 연약한 탓에 뛰어난 사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실학이라고 뭉뚱그려 묶어 듣고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게으름과 일천한 지식으로 결론을 재단하는 못된 습성이 빚어낸 편견은, 저자의 매우 정확하고도 정직한 방법적 기술 앞에서 와그리 무너졌다.
단순히 정약용과 최한기의 사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후반부에는 선거 유세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각각이 추구한 사상의 핵심 쟁점을 짚어냈기에 사전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엇나가지 않고 이해하는 데 수월하다.
정약용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유교적인 인륜 질서와 형이상학적 정당화가 사변화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만족만을 주었을 뿐, 일상에서 조우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하면서 선을 추구하려는 본성의 욕구는 외부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천주교의 교리를 자신의 사상적 발전에 적용하는데, 상제는 만물을 만들고 주재하는 인격적 존재이지만, 우리의 성찰적 양심으로 발현되며 숭앙할 대상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들였더라도 효도와 공경 등 유교의 덕목을 받아들이기에 제사 금지에 반대하며,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는 점을 들어 자신의 사상은 천주교와는 다르다고 일축한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하에 그는 군자의 학문에서는 자기 수양이 반이고, 백성의 통치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는 식견을 필두로, 여를 만들어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통해 생산물을 분배하는 여전제나 지역, 귀천의 차별 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정약용은 본성이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우주적인 원리나 마테오 리치가 말한 이성적인 추론 능력이 아니라 선을 좋아하는 윤리적인 욕구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충족할 수 있기에, 본성의 실천이야말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정약용은 상제가 본성을 내려주었으며 일상 생활에서 시시각각 명령을 내린다고 가정하는데, 성령님의 역할과 흡사하다. 그리고, 상제의 관심은 사람이 그 명령에 따라 인륜을 실천하는 것으로 타인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다. 두려움은 상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바르게 살기 위해 긴장을 유지하는 수양 방법으로 이해하는데, 왜 정약용이 천주교에 심취했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최한기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기에 주목하면서, 기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정신 작용이 추측이라고 본다. 그는 세계는 기라는 보편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되며 기야말로 진정한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의 양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는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며, 이치란 실재하기 보다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구성한 추측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기는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인 운동으로 순환과 변형의 능력을 발휘하는 성질이 있는데, 이를 활동운화라고 지칭하면서 자연의 차원에서 천지운화, 정치나 교육 등 사회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통민운화, 개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신운화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일신운화와 통민운화 사이에는 교접운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신운화는 통민 운화를 따르고 통민운화는 천지운화를 따르는 체계성을 강조하면서, 천지운화는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인간은 이를 받들어 따라야 한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신기는 기의 신묘한 작용의 능력으로, 모든 존재 속에 들어 있는 기의 보편적인 구성 요소이며 인간에게는 지각의 주체로 나타난다고 본다. 칸트와 유사하게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한 외부 세계는 사람의 신기인 마음에 물들어 지각이 발생하며 지각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것이다. 최한기는 추측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추측은 앎을 넓히는 요체라고 주장하는데, 윤리적인 선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지운화에 기준을 두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학문은 바로 이 추측을 배우는 것이라고 표명한다.
그는 우리의 생명은 외부 세계와의 통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보존되는 것으로써, 무엇에 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기가 유동적으로 변한다고 논하면서, 천지운화를 기준으로 인간은 원래의 부여받은 신기의 소통 역량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변통은 결국 개인, 사회, 세계의 모든 것들과 대동하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하며 인간의 문제를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물의 조화와 협력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데 이르른다.
최한기의 주장은 모든 학문의 통합, 서양과 동양의 병합에 대한 지향성 뿐만 아니라 현재 뇌과학의 추론 관점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어 특히 흥미를 끈다. 더욱이 기존의 뇌과학이 일종의 신호 전달 체계의 확장처럼 보이면서 도덕이나 윤리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에 대한 답변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있는 반면, 최한기는 추측의 과정을 윤리를 넘어서서 만물과의 조화까지 추구한다는 데서 더 넓은 지평을 보여준다.
게다가 최한기의 기는 융의 집단 무의식이나 동시성과도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다, 본인은 인격적인 궁극의 실재로서의 신을 부정했지만, 오히려 신과 교통하며 만물에서 영감을 얻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일종의 단서를 안겨주기에 참신하다.
우리 사상의 뿌리를 더욱 두텁게 할 최한기에 대해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단순히 ‘기에 천착한 실학자’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탐구가 보여주는 치열함과 깊이가 결코 가볍게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정약용과 최한기 두 분과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학문, 우리가 지향하는 주체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통합의 학문이나 윤리 주체는 개별 분과로 나뉜 우리 시대의 학문이나 무한경쟁의 신화에 내몰린 우리 사회의 소시민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그분들의 설계도가 그대로 우리의 실존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정직한 만남과 대화는 우리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만나는 일은 사랑과 정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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