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하심 - 나를 영원까지 지켜주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약속 이찬수 저서 시리즈
이찬수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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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회자의 글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읽는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리 교회 출신 청년 중 인천공항에 근무하는 한 자매가 학생회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로 보내왔다. 모두 복음이 녹아 있고 사랑이 포함된 내용의 책들이었다. 그 중 이찬수 목사의 <보호하심>이란 책도 있었다. 마침 우리 집 아이가 이 책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찬수 목사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이다. 그의 설교도 들어본 적이 없고 책 또한 읽은 기억이 없다.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이건 순전히 나의 성벽 때문이다. 목회자의 개성을 서로 존중해 주자는.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들은 바는 있다. 벌써 10년 전 쯤 될 터이다. 국제제자훈련원에서 주최하는 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이찬수 목사님의 분당우리교회 부목사 두 분이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 분들로부터 담임 목사인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목사가 자기 교회 담임 목사에 대해 목회자 모임에 와서 극구 자랑하는 장면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날 흔치 않은 모습을 접하게 된 것이다. 분당우리교회는 한 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그 학교 근무하는 믿지 않는 교사와 학생들이 이찬수 목사를 요즘 보기 드문 목회자로 생각한다면서 저런 목사님의 교회라면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말들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분당우리교회 출범 초기엔 외면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또 이 책 <보호하심>에도 몇 번 언급되어 있지만 아버지 목사님께서 40일 금식 기도하시다가 17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고 덧붙여졌다. 사실 금식기도는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죽이는 일련의 과정이다. 40일 금식 기도는 목숨을 내놓고 하는 작정기도인데, 이찬수 목사의 아버님은 반을 채우지 못하고 소천하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음의 뿌리가 튼실한 가문을 가진 목회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찬수 목사님은 청소년 사역자로 오래 헌신해 왔다. 옥한흠 목사님이 개척해서 우리나라 유수의 교회로 발전시킨 사랑의교회에서 청소년 전담 부교역자로 일해 왔다. 그래서 그를 청소년 사역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2002년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해서 흔히 '별들의 전쟁터'라고 일컫는 분당에서 단시일에 중형 규모의 교회로 부흥시킨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그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목사님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말씀을 보고 교회를 찾기보다 사랑을 보고 교회를 찾으라고 하지만 두 가지 다 충족되어야 회중들의 마음을 붙들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분당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아닌가 싶다.

 

이찬수 목사는 글도 매우 잘 썼다. 나는 <보호하심>을 짬짬이 읽었는데도 이틀에 다 독파하였다. 그의 책이 이렇게 쉽게 읽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성싶다. 첫째, 문장이 아주 쉬웠다. 배운 자의 현학과 목회자의 전문성이 멀찍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저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정도로 그는 그런 어휘를 구사하고 있었다. 둘째, 자신의 경험을 적재적소에 잘 연결시켜 글을 전개하고 있었다. 독자에게 쉽게 접근하는 데 자신의 경험만큼 중요한 제재도 없다. 특히 그것이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셋째, 무엇보다도 이 목사님은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마치 1592년 종교 개혁 당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를 외친 루터의 후예답게 모든 이야기가 말씀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본문 내용이어서 전혀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호하심>은 첫 장 프롤로그에서부터 본문을 거쳐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처해 있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강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강건하면서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 표지 하단에 삽입되어 있는 띠지에도 이런 글귀가 박혀 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지켜줄게!"

전능자이신 하늘 아버지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의 보호 약속을 믿어라!

수많은 영혼을 회복시킨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핵심 메시지

 

이 책은 모두 3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part 01.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part 02.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니. part 0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보호할 것이라. 여기에 포함된 8개의 장은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설교 한 편으로 생각하고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듣는 설교와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읽는 설교문을 작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목사님은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 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목회자들의 공통점은 죽을 고비를 넘긴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든 신학자가 있었다. 이찬수 목사도 여기에 포함시켜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다. 그가 미국 유학 가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 삶을 겪으면서 공부한 이야기, 어떤 때는 정말 기차를 타고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으며 또 강물에 뛰어 들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는 자기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뿐 아니라 귀국해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도 방학 때면 갈 곳이 없어 학부 기숙사를 기웃거렸다는 대목엔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아픔이 감춰져 있었다.

 

이찬수 목사님은 복음주의 목회자이다. 말씀에 충실한 목회자이다. 잘못 생각하면 세상에 선을 긋고 사는 사람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가 <보호하심>에서 대중가요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가 내용 전개에 적절한 유행가를 자주 인용할 정도이면 대중가요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터이다. 또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엔 보수도 진보도 구획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약자 사랑엔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찬수 목사님이 원용한 한문이 눈에 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인용된 문장이다. 즉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인데, 이 '백전백승'은 '백전불패(百戰不敗)와 함께 자주 잘못 쓰이는 문장이다. 유명한 중국의 병법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의 '모공(謀攻)'편에 나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의 뜻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 '백 번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와 뜻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원문에 충실하게 원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다.

 

사이버 공간이 위력을 떨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인쇄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책을 통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은 결코 생각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즈음 이찬수 목사님의 쉬우면서도 속이 꽉 찬 책을 읽는 즐거움이 내게 있었다. 앞으로 교회 내외적 사역에 쉴 날이 없겠지만 책으로 대중을 만나는 기회를 늘리기 바란다. 한 사람의 사상가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은데, 참다운 목회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끼치는 영향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점점 영적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안타까운 시절이다. 이럴 때 이 목사님이 사랑의 수류탄을 뽑아 던지는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을 기대한다. 이찬수 목사님이라면 핀을 확실히 뽑아 던져서 사랑이 메아리를 꽃 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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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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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내가 이런 책을 더디 손에 잡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리라. 나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쇄 출판문화가 위축되는 경향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책의 효용 가치는 인터넷의 발달과 무관하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고 늘 그렇게 주장해 왔다. 

한 보름 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인천 친구 목사님 집에서 하루를 묶고 왔다. 그 목사님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독서운동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사람이다. 책의 힘이 정말 대단해서 문제아들도 그 목사님의 독서 클리닉에 참석해서 함께 하면 건강한 청소년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그 때 한 권 뽑아다 준 책이 바로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이다. 나는 누가 권하는 책은 이상하게 잘 안 보는 습성이 있다. 아마 어릴 때부터 스스로 해 온 독서 경향 탓이지 않나 싶다. 또 책과 독서에 대해서라면 혼자 해결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만심이 그렇게 만든 것도 같다. 따라서 이번과 같은 경우에도 친구 목사님이 권하는 책이니까 꼭 읽어봐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내 서재에 꽂혀 있은 지가 반 년 가까이 되었다. 지난 추석이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고 가족을 인솔해서 고향 방문길에 올랐다. 이지성이 쓴 이 책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년 같지 않게 책 읽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형님 댁에 이틀 머무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년 12월에 결혼하는 조카가 신랑 될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개시켜 주었고, 또 생각하지도 못한 고향 손님들이 들이닥쳐 다른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작 이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추석을 쇠고 집으로 돌아와서 읽게 되었다. 권한 사람을 생각해서 정독을 하기로 맘먹었다. 책이 점점 손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에서 독서에 대한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몇 가지 의미가 덧붙여져야 할 것 같았다.  사이버 공간이 사람들을 옭아매는 풍토에서 독서, 그것도 고전 읽기를 강조하는 저자가 먼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세상이 변해도 책 읽기의 중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어쩌면 당연하다.  

저자 이지성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저자가 동서양을 넘나들며 독서 관련 사항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아마 이 책에 등장시킨 사람들을 세어본다면 백 명은 훌쩍 넘어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들이 쓴 어렵다는 고전까지 요소요소에 인용하고 있으니 저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책을 써나가려면 언어도 몇 개는 기본적으로 통달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어 독어 불어에 일본어 한자까지 독해할 수 있는 정도, 특히 젊은 저자로서 한자에 대한 이해가 넓고도 깊은 것 같아 호감이 갔다. 서구화 바람이 세차게 분 지가 오래 된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서양 언어에 비해 한자가 홀대받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인지 모른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글만의 표현으로 정확한 개념 전달이 어려운 경우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이해를 도왔다. 하지만 지금은 한자 아닌 영어 등 서양 글자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 환경에서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에 각종 역사서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남긴 고전까지 전방위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책에서 사유의 풍성함을 맛보는 기쁨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독서는 저능아조차도 천재로 만들어 주고, 열등생을 우등생으로 만들어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존 스튜어트 밀을 등장시켜 독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었는데, 독서 그것도 고전을 읽음으로써 세기의 천재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세 개의 부록이 책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1장에서는 인문고전 독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면 구체적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2장은 세기의 천재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인문 고전에 정통할 정도로 그 방면 독서에 열정을 쏟아서 그 방면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3장에서는 전 세계 0.1%의 사람이 90%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0.1%에 속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고전에 대한 공부를 꼽고 있다.

4장에서는 세계사를 들고 놓았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문 고전의 가치를 제고해 주고 있다. 가령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우리나라 조선조의 세종대왕,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공통점은 인문 고전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재벌을 대표하는 이병철과 정주영도 체계적인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인문 고전을 꾸준히 탐독한 것이 그들의 회사 경영에 밑받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중국의 고전인 논어와 손자병법 등을 읽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5장에서는 인문고전 세계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는 타이틀로 어렵게 생각되는 고전이지만 그것을 한 권 뗌으로써 인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인문 고전을 읽을 때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 필수라고 했다. 고전에 대한 해설서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에서 해설서들은 원전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피할 것을 권한다. 6장에서는 인문고전 독서법이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부록은 군더더기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부록에 꼭 필요한 것을 수록해 놓았다. 즉 인문고전 독서의 필요성을 시종일관 강조해왔는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부록 3으로 철학에서 경영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문고전 독서가 60명을 간단히 소개해 놓았다. 세기의 인물들 치고 인문고전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 보니 당위론 원칙론적 입장에서 그 중요성을 설파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인문고전 독서 이론서답게 글의 논거를 꼼꼼하게 미주(尾註)로 처리하고 있어 관련 내용을 보충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만큼 논지가 탄탄하고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미주로 처리한 책들이 모두 번역된 것들이기 때문에 언어상의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 저자의 성실성과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관견(觀見)이 없지 않다. 먼저 부분적이긴 하지만, 내용의 넓이에 비해 깊이가 뒷받침 되지 않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저자는 인문 고전을 원문으로 읽을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인용한 책들은 대부분 번역서들로 채우고 있다. 물론 가이드에 방점을 둔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이 책이 더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 보니 문장이 추상적으로 흐르거나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의 중복, 결과의 반복 설명으로 흐르는 경향이 가끔 눈에 띈다.

가령 해설서의 오류를 설명한 부분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인문고전을 읽다보니 체계가 저절로 잡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도 추상적으로 흐른 점이 없지 않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최근 중국의 유명한 교수가 쓴 동양고전 해설서를 읽었는데, 나는 그의 몇몇 의견, 특히 묵자에 관한 부분에서 치명적인 한계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옛날 같았으면 그 교수의 의견에 압도되었을 것이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인문고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207쪽).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보면 플라톤을 읽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읽기를 중지하고 플라톤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라톤을 읽다보면 프로타고라스라든지 파르메니데스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모르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 결국 플라톤 읽기를 중지하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밖에 없다."(208쪽)

위 첫 인용 글에서 말하고 있는 묵자의 치명적인 오류와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간단히 밝혀 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봉사요 예의이다. 또 뒤 인용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가 플라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고 했고, 플라톤을 읽다보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표적인 예라도 하나 들어주는 것이 책 내용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인문고전 도서를 권장하는 이유가 처세술, 성공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한 것도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이미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18시간 몰입의 법칙] 등 처세술에 해당하는 책들을 출간해서 히트시킨 바 있다. 물론 경쟁을 법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세술 성공학은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린치, 짐 로저스 등 세계적인 딜러들을 등장시켜 이들이 성공한 것은 인문고전으로 사고를 무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것은 자칫 오랜 세월을 거쳐 인증 받은 인문고전을 자본주의 성공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인문고전은 성공을 위한 처세술용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데 사랑의 에너지원으로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이 구구절절이 옳다. 하지만 당장 고전 한 권을 정독할 작심을 한다고 해도 완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인문고전은 당위론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읽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좋은 줄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기 힘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인문고전을 전적으로 공부하는 대안학교를 만든다든가 또는 정부 주도로 인문교육 학습관 등을 설립하여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 출간으로 이지성은 큰일을 해냈다. 평자가 주문한 것은 인문고전 독서를 가이드하는 저자의 몫을 훨씬 벗어나 있는 조직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제기한 것이다. 몇 가지 지엽적인 지적을 했지만 그것들이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완하기 위한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문고전을 읽고 인성을 살찌워서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국격(國格)도 한 단계 높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진국은 경제적 성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문화 가치가 그것에 따라주어야 한다. 정신과 문화 가치 향상에는 인문고전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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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 두란노 목회와신학 총서 9
손동식 지음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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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식 교수는 신진 학자이다. 그만큼 필력이 살아 있고 의욕이 넘쳐난다. 그의 첫 저서가 될 것이다. 믿음의 책들로 유명한 '두란노 아카데미'에서 출판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목회자면 누구나 '두란노 아카데미'를 통해서 책 한 권 쯤은 출판하고 싶어한다. 
 

책 제목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이다. 왜 하필 왕자(王子)란 명칭을 붙였을까? 10여 년 전, 미국의 한 설교 전문지(Preaching)에서 지난 1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에서 스펄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설교의 황제, 설교의 대가 아니면 설교의 황태자란 호칭을 붙여주지 않았는가.

 책을 읽어 가다가 손 교수가 붙인 명칭에서의 '왕자'는 '프린스(prince)'가 아닌 '왕자(王者)'임을 알 수 있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명성을 알고 있는 만큼 내용도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에 대한 질문에 막히기 십상이다. 그의 명성에 비례해서 그를 깊이 있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럴 즈음에 손동식 교수가 이 책을 상재함으로써 스펄전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스펄전이 설교의 왕자라면 오늘 목회를 하는 우리에게 설교에 대해서 많은 자양분까지 공급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까지 설교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공부했다. 하지만 대부분 원론적인 얘기여서 그렇고 그런 책으로 내겐 남아 있다. 그리고 신학 이론서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독심(讀心)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손 교수의 이번 책은 이런 흐름을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가 들어간다. 이야기의 특징은 재미있어야 하고 또 쉬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그랬다. 나는 기존의 설교학에서 느꼈던 부담을 그의 책을 독파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수필집이나 소설책이라도 이것만큼 쉽게 읽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다. 저자의 넓고 깊은 지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손 교수는 영국에서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의 설교를 비교연구해서 박사(Ph. D.)를 취득한 사람이다. 그만큼 정확한 문헌에다 현장 답사, 관련 분야의 영역까지 두루 섭렵하고 이 책을 썼다. 이것이 설교에 도움을 주려고 쓴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설교뿐만 아니라 목회 전반에 걸쳐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부록으로 '주제에 따른 스펄전 설교의 실제'가 붙어 있다. 1부 '설교의 왕자, 스펄전'은 스펄전에 대한 약전(略傳)에 해당된다. 그의 설교를 공부하기 전 인간 스펄전을 알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가끔 글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날 때 당황한다. 가령 문학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작품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때 그의 작품까지 버리고 싶어진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니 어느 영역보다 언(言)과 행(行)의 일치가 요구되고 설교와 삶의 등치(等値)가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 1부는 스펄전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는 진실한 복음주의자였지만 목회를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고 사회 곳곳으로 확장해서 사역한 것에서도 그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보육원과 양로원을 운영하고 빈민학교를 설립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교육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쩌면 한 세기 반 전에 활동했던 그는 목회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보수 신학자든 진보 신학자든 스펄전을 선입견 없이 소개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의 목회와 설교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2부는 스펄전의 설교가 회중에게 왜 설득력 있게 다가갔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말씀 중심에 두고 회중을 염두에 둔 전달 방법을 구사한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스펄전은 설교 준비는 철저히 하되 전달은 즉석에서 현장감 넘치게 함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가지 자기 자신의 설교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그림 언어(Picture Language), 센스 어필(Sense Appeal), 드라마티즘(Dramatism)울 들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3부에서는 설교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소명의식을 갖고 말씀은 전하되 사람을 의식하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기도이다. 설교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중보기도의 필요성도 역설하고 있다. 설교 본문 선택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순전한 복음에 기반할 때 순전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4부에서는 설교자와 성령님과의 관계성을 논하고 있다. 설교에서 성령의 도움심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하고 있다. 성령은 설교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유를 성령이 지식 지혜의 영이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령은 설교의 전부이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펄전이 살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가 가신지 한 세기가 지났건만 죽은 그의 설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왜인가?

손 교수는 사상은 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은 상대적 진리가 아닌 절대적 진리이다. 그 진리의 말씀에 이탈함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제도 살아 있었고 오늘도 살아 있으며 내일도 살아 있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설교의 목표를 회중의 회심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설교의 핵심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주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 뒤에 붙어 있는 부록은 보통 군더더기로 여기기 쉽다. 책의 부피를 일정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 붙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부록은 그런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손 교수가 스펄전의 설교에 대해 기술한 것들의 좋은 예가 부록으로 첨부된 설교들이기 때문이다. 설교문 앞에 설명해 놓은 저자의 글이 한 세기 전의 설교를 오늘날의 설교처럼 읽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이 설교문들도 기도 끝에 엄선한 것들인 것 같다. 오늘 날 목회에 필요한 덕목들-사역, 섬김, 소명, 겸손과 교만, 가정 , 성령-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다.

세속화의 물결이 전방위적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 세기 반 전 스펄전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대중 추수적인, 즉 대중의 구미에 맞춘 설교를 경계하고 있다. 대중은 늘 편하고 쉽고 이기적 유익성을 좇게 되어 있다. 고정된 율법도 타파해야 할 일이지만 말씀에 어긋난 세속화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스펄전에 대한 책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의 일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책의 장점, 아니 서술상의 장점을 한 가지 첨언하고 싶다. 오늘날을 시각화의 시대라도 한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하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쓴 것 같다. 대표적으로 손 교수는 설명에 열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 이것은 글의 핵심을 요약정리해서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 기법이다. 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것도 그 방면을 두루 알고 있는 전공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필법일 것이다.

스펄전은 철저하리만큼 강해 설교를 주장한 사람이고 또 현장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설교문을 보면 본문은 대부분 말씀 한 절이고 길어야 두 절이다. 강해 설교는 본문이 많아야 전할 내용이 풍성해진다. 그런데 단 한 절에서 우리 책 20 쪽 분량의 설교가 나올 수 있다니. 손 교수는 그 비결을 우리에게 겸손하게 알려주고 있다. 본문은 단 한 절을 선택했을지라도 전후 문맥에 대한 성경 읽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좋은 정보이고 시사임이 분명하다.

손 교수는 젊은 학자이다. 그의 책은 그래서 톡톡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표현력도 아주 풍요롭다. 글쓰기에 탄탄한 기반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책을 쉽게 손에 잡게 만들고 또 짧은 시간에 독파하게 만든다. 한 가지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스펄전의 전달법'에서 '그림 언어'를 설명하는 부분(32쪽)인데, '공감각적 표현'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복합 감각적 표현과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공감각적 표현은 반드시 감정의 전이 현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등에서 보는 것처럼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앞의 예에서는 둘 다 시각에서 청각으로)전이될 때 공감각(synaesthetic)이라고 한다. 한 문장에 감각이 두 개 이상 병렬되어 있고 감정의 전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냥 복합 감각적 표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과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한 사람의 젊은 학자를 가지게 되었다. 손 교수가 학위를 받고 귀국한지가 오래지 않다.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연구와 발표를 거듭해서 이렇게 중후한 책을 출간한 것은 그의 기쁨을 넘어 우리의 기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늘 해도 부담으로 작용하는 설교, 그 부담을 줄여 주는 데 손 교수의 역할이 기대된다.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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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지음, 이기섭 엮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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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에르케고르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죽음의 제일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어디 절망뿐이랴.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 죽음의 소인(素因)은 우리 주위에 지천으로 늘려 있다. 특히 자연 재해나 전쟁과 같이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갑자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지진해일(쓰나미)로 인한 인명 피해와 지금 리비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 상황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느낌들도 다기다양(多岐多樣)하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추억하며 그리워하고 싶은 죽음도 있다. <그 청년 바보 의사>의 저자 안수현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정(情)과 사랑이 넘치는 형제로, 따스한 손길로 인술을 펼친 의사로, 무엇보다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안수현은 그래서 의로운 사람, 참 의사로 불려진다.

 

2006년 1월,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사병들과 함께 훈련에 참여했다가 유행성출혈열(일명 쯔쯔가무시)로 목숨을 잃었다. 선후배 동료 의사들의 눈물겨운 치료에도 불구하고 안수현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직 할 일이 많은 젊은이를,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을 남겨 두고 그는 하늘나라로 갔다. 너무 진실한 사람이어서 이 땅에서보다 하늘나라에 더 필요하기 때문에 일찍 데려가신 것이라고 위안들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인(知人)들의 슬픔은 가시게 할 수 없었다.

 

안수현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특히 예술적 감성이 번득였던 그의 삶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사랑한 음악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난다. 참 의사로서 사랑 넘친 그의 진료도 이런 감성에 기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베풀며, 주님의 향기를 선물하는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그가 이 세상을 뜬 지 6개월 뒤에 들었다. 아까운 청년 의사 한 사람이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천국에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그의 책 <그 청년 바보 의사>를 통해서였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여기에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을 믿어도 제 몫부터 챙기는 영악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바보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 사랑을 베푼 삶을 안수현은 살았다. 책 제목에 ‘바보’가 들어간 것은 이런 사정에 연유하는 것 같다.

 

청년 의사 안수현은 환자를 대할 때 여느 의사와는 달랐다. 하나님의 진한 사랑으로 환자를 대했다. 실의에 빠져 있는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격려하고, 돈이 없는 딱한 환자들을 위해서 병원비를 대신 내 주며, 병원에서 인연을 맺은 환자는 퇴원 후까지 사랑으로 돌봐주는 의사였다. 그래서 그를 참 의사라고 부른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움켜잡으려고, 또 움킨 것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손을 펴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서도 안수현이 많은 사람들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것은 따스한 손을 펴고 그가 가진 것을 내어 주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베풀며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참 의사 안수현을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책 <그 청년 바보 의사> 일독을 권한다. 그는 청년 ‘바보 의사’를 ‘참 의사’와 등치시키는 일을 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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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집 - 해외우리어문학연구총서 83
김하명 / 한국문화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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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서양의 것이 의식주를 비롯해서 문화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가끔 고유한 우리 것을 만날 때면 향수에 젖곤 한다. 시골 길을 지나다가 만난 6,70년대식 다방을 발견하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향토 집에 걸려있는 그을린 솥단지를 보면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며칠 전(7월 22일) 시조집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저자가 직접 보낸 책이다. 반가운 마음에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시조는 우리 고유의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그 역사로 따지자면 700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다. 고려 중엽에 시작된 시절가조는 위력적인 서양 문학의 조류 속에서도 아직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경이롭게까지 생각되는 이 장르를 연면히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수와의 동행>이란 시조집을 낸 박영재는 이름 없는 시인다. 무명에 가까에 문학인이다. 하지만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고희(古稀)를 넘어 문단에 등용한 시인이다. ‘인생칠십(人生七十) 고래희(古來稀)’란 두보(杜甫)의 시구가 말해주듯 70이 넘으면 인생을 정리해야 할 연치이다. 자연 수명이 연장된 현대라고 해도 칠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란 극히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영천 박영재 시인은 70이 넘어 시를 공부해서 몇 년 전(2008년) <반석 위의 백합향>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데 이어 이번에 팔순 기념으로 <산수와의 동행>이라는 시조집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대단한 노익장이다. 앞의 시집과 시조집은 그의 끊임없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결정물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 꾸준히 연마한 그의 시들에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산수와 동행>이라는 시조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의 주류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대한 사랑과 찬양의 글들로 묶여져 있다. 시인의 고향인 강원도의 자연을 노래하고 그가 직간접적으로 여행한 장소의 여정을 소개하는가 하면, 이 아름다운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반신불수가 된 아픔을 토로한 시조도 있다. 그의 시조들을 읽으면서 자연이 그와 결합하면 훌륭한 시조가 되고, 사람이 자연과 조화하면 아름다운 의미를 낳는 공간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 자연을 노래한 사람들은 많다. 자연이 좋은 시적 소재가 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영재 시인이 <산수와 동행>에서 자연만 노래하고 그쳤다면 나는 많은 시집 가운데 하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조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있다. 문학의 기능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상존한다. 특히 현실 사회와의 관계 문제에서 그렇다. 어떤 이들은 문학은 문학 자체로 그쳐야 한다며 사회성이 깃든 시를 배격하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문학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나는 박영재 시인의 <산수와 동행>을 읽으면서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한 전형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의 문학관이 현실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올바른 역사적 현실 인식이 시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고 사랑을 얘기하며 인간을 읊조리더라도 사람을 규제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박영재 시인은 80을 넘어선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이다.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눈에 띄는 현상 하나가 있다. 인생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다다른 노인들의 이른바 극우 성향 시위이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과 '국민행동본부'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등 단체들의 분별없는 시위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 나라에는 진정한 어버이와 진정한 국민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묻게 된다. 침묵하는 다수 속에 분명 가스통을 매단 채 시민단체 건물을 돌진하며 빨갱이들은 북한 김정일에게도 가라며 막말을 퍼붓는 노인들과는 다른 대한민국 어버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영천 박영재 시인이 그런 분 중의 한 사람임을 그의 시조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연과 역사를 소재를 시조를 쓰면서도 분단에 대한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있고('恨') 또 30여 년 전 5.18광주 민주항쟁의 ‘무차별 살육광란’을 노 시인으로서 신에게 항의하고 있다('5월의 노래'). 뿐만 아니라 작년 초에 일어난 용산 철거민들의 정당한 주의주장을 공권력으로 무차별 진압한 사건을 규탄하고 있고('기축년 해넘이'), 서민 출신으로 서민 중심의 정치를 하다가 공고한 지배집단으로부터 사지로 내몰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직 대통령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날개 접은 부엉새').

이런 현실을 읽는 시적 자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포스트 모던의 문화 흐름은 시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권위와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까지 해체해가며 시를 만들어가는 젊은 시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것(시조)을 가지고 자연과 사랑과 인간을 주제로 노래하는 가운데 올바른 현실 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시조를 박 시인은 소명을 갖고 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연로하지만 결코 연로하지 않은 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즐겁다. 박 시인의 시조를 해설하면서 원용우 박사는 '젊은 시를 쓰는 영천 시인의 시적 변용'이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데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을 글자로 표현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 몫으로만 생각되어져 왔다. 하지만 영천 박영재 시인은 이런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있다. 시는 부단한 자기 노력의 산물이고 사랑과 관심의 결정체인데,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진실하게 임할 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 확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박 시인이 상재한 시집 <반석 위의 백합향>(2008년, 조선문학사)과 시조집 <산수와 동행>(2010년, 이지출판)은 그 좋은 보기이다. 뜻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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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10-07-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영재 시인이 최근 쓴 시조들을 모아 엮은 시조집 <산수와 동행>(이지출판)이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아 다른 책인 <시조집>을 빌어 박 시인의 시조집에 대한 서평을 올립니다. 알라딘에서는 박 시인의 <산수와 동행>을 확보해서 판매도서 목록에 올려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