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꾼 만들기
송기섭 지음 / 갈릴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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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로 인하여 유익을 얻는 일이 많다. 아내가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가족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그러다 보면 목회자인 남편도 그 안에 포함되게 마련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남편인 나에 대해서 좀 포장을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고마워하면서도 또 좀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기대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무엇이든 배우기를 즐긴다. 마음에 드는 교육은 거리와 규모 또 강의료 등은 생각지 않고 열심을 보인다. 이번 숙대 상담교육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오백여리 길을 새벽 기차를 타고 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일정이 피곤한 것임에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피곤함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신 그 날 있었던 재미 있었던 일, 소개하고 싶은 사람, 역까지 태워준 선행 등 입에 침이 마르도록 보고하기(?)에 바쁘다.

이 책은 아내가 상담 교육을 함께 받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달받은 선물이라며 가지고 왔다. 나는 책 선물을 제일 좋아한다. 이 책을 전해 받은 지는 한 달 포 가량되는 것 같다. 모양과 표지 색상이 먼저 예쁘고 자그마한 책이다. 안 페이지에 저자 송기섭 목사가 직접 전하는 기념 글까지 써넣는 정성을 보였다. 

"목양에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졸저를 드립니다. 송기섭 목사 드림" 

나는 가끔 저자로부터 그 책을 선물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반드시 읽어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나아가 감동받은 책은 서평을 쓰는 일도 잊지 않는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 저것 바쁜 일이 중첩해 나는 며칠 전에야 이 책을 정독했다. 책 제목이 벌써 도발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도발적인 전도 이야기"로 정했다. 

이런 제목을 정한 것은 저자의 책 제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책 내용도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전도꾼 만들기>라. '-꾼'이라는 접미사는 좋은 뉘앙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보통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을 폄하하여 일컬을 때 이 '-꾼'자를 붙인다. 노름꾼, 씨름꾼, 장사꾼, 술꾼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접미사를 거룩한 주님의 귀한 일 뒤에 붙이다니!

그런데 이런 단어를 쓸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대의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수사법에서는 반어법이라고 하는데, 이런 반어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확신이 있어야 하고 절대적 신념이 따라야 한다. 또 그런 경험을 풍부하게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이 강조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저자 송기섭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30년 넘게 목양 일념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특히 전도를 생명으로 알고 실천해 온 노고가 책 곳곳에 서려 있었다. 과연 송기섭 목사이니 이런 '-꾼'을 붙여 책 제목을 정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이 책은 모두 3단계 총 16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임상 전도학 교재로도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만 해도 전도에 대해 많은 노하우를 접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1단계 기초원리는 전도에 대한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장점은 그 근거가 모두 성경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에서 전도의 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어 먼저 신뢰가 갔다. 가끔 전도 소개 책자를 읽을 기회가 있는데, 어떤 책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관념만 난무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책은 실천 경험은 풍성한데 그것에 이론이 담지되지 않아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송기섭 목사의 <전도꾼 만들기>는 이런 점에서 독자의 욕구를 균형있게 충족시켜 주는 책이다. 즉 이론과 실천에 동일한 비중을 두며 전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또 솔직히 말해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고 있는 책이라고 할지라도 글이 딱딱하고 재미가 없으면 읽어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우려도 잘 반영된 책이다. 읽기가 편하고 쉽다. 먼저 그의 단문 위주의 글솜씨가 돋보이고, 글자 크기와 대중소 제목을 돌출로 처리한 것도 쉽게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시각적 요소들이다. 한 번 손에 잡으면 순식간에 읽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정보 소통이 고도화되어가는 사회일수록 전도가 어려워진다고 한다. 특히 도회지 아파트를 주거 공간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파트 전도를 나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외면하는 바람에 전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송 목사는 이것에 대해서도 별 걱정하지 않는다. 기도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있고 또 십자가의 영성이 있으면 전도 대상자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전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일의 길목을 다 열어주시기 때문에 말씀에 의지해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좀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이 그렇지 않은 것은 송 목사의 경혐으로 뒷바침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전도 방식으로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킨 경험을 갖고 있다. 그 부흥된 교회를 다른 후배 목회자에게 맡기고 다른 도전의 장으로 옮긴 사실은 그가 프로 전도꾼이 아니면 쉽게 보일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간간히 교회의 문제를 촌철살인의 정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령 요즘 교인들을 이야기할 때 성경 말씀을 빌려 '알곡과 가라지'로 많이 비유하고 있다. 신실한 알곡 신자가 있는 반면에 그에 못지 않는 가라지 신자, 교회에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없어도 될 교인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좀 더 과학적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교회 신자들 중에는 율법 시스템에 젖어 있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은혜 시스템을 따르는 신자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매사에 율법을 드리밀며 사람을 재단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의 바리새파 사람들의 부활이라고나 할까? 불평불만에 능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며 늘 교회 분란의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시스템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단점을 보완해주려고 하고 약점을 채워주며 잘못을 용서해서 그를 주님 앞에 은혜로 바로 세운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교회에 율법 시스템이 아니라 은혜 시스템이 작동되어 모든 교회가 부흥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읽으면서 메모한 내용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다. 전도는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우리의 일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중 앞자리에 위치한 것이 전도라고 하지 않는가. 기도, 말씀 묵상, 찬양 등 이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믿음의 지체들이 행하는 것은 천국 가서도 할 수 있지만, 전도는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천국 가서는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모두 구원받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천국이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말은 무성하되 열매가 많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올바른 전도 방법은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통하는 진리와도 비슷한 것이다. 송기섭 목사의 <전도꾼 만들기>가 전도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전도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책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꼼꼼이 읽고 전도에 나선다면 그만큼 결실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목회자 평신도 구분할 것 없이 이 책을 읽고 교회를 살찌우는데, 또 주님을 기뻐시게 하는데 이바지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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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지음 / IVP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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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에게 들어온 경로는 이렇다. 지난 학기 대학원에서 ‘영성’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몇 권의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이 책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책을 훑어보니 발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그냥 덮어두고 있었다. 지난 주일(12월 27일) 낮 예배 설교 ‘삭개오의 믿음’(눅 16:1-10)을 준비하면서 김 목사의 이 책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기회를 가졌다.

‘그리스도인, 부자로 살아도 되는가?’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기독교인들의 재물관에 대해 잘 정리해 놓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김영봉 목사는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쓴 책도 처음 접한다. 지은이 소개 글을 보니 그는 대학 학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려운 경제 용어를 신앙과 쉽게 연결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 지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돈은 오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돈이다. 이런 관계는 기독교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믿는 자와 재물과의 관계성을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시대와 지역을 가릴 것 없이 아전인수로 해석해 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철저한 금욕생활부터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부 축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해 혼동을 자초케 한 측면이 없지 않다.

몇 년 전,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준 것이 ‘청부론’이다. 정당하게 돈을 벌어 십일조와 사회 구제 몫을 빼고 난 나머지는 개인과 가족을 위해 맘껏 사용해도 가하다는 것이 ‘청부론’의 요점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재물관 정리는 일단 환영을 받았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청부론’의 이런 주장은 부담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일단 사람 중심의 재물관 정리였다는 데 일정 부분 위안을 받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또 하나님 소유라는 원칙론에 일정 부분 부담을 안고 있던 사람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 준 것도 사실이다.

김영봉 목사는 이러한 ‘청부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 질서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환경과 조건도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사회인데, 경쟁이라는 논리가 지배함에 따라 부가 한 쪽으로 치우쳐 불안정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재물관은 한층 중요성을 띠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 목사의 논지는 이렇다. 우리의 수입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어서 그것을 나와 가족이 쓸 것을 빼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헌금했다고 해서 그리고 사회 구제에 일정 액수를 기부했다고 해서 기독교인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개인의 가치가 존중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지나친 주장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것이 성서적이라는 그의 주장에 별로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제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제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제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제5부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이 그것이다. 각 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인과 재물의 관계에 대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가면서도 각 부의 주제를 명확히 해서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장점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나눔과 섬김’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모더니즘 사회는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나눔과 섬김’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 당위성은 인정하더라도 사실 실천까지 잇기에는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만큼 쓰고 나머지는 섬김의 용도로 나누라는 그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여간한 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 기독교에 대한 내외의 비난 목소리가 높은 시점이다. 그 소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그것이 말로만 풍성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자본주의의 맹점인 매머드, 즉 큰 것만 추종하는 흐름에 기독교가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이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기독교가 변해야 한다. 그 변함에는 금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

나는 김 목사의 재물관에 대한 주장이 그 변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부론’으론 부족하다. ‘청부론’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생각과 자본주의의 타협의 산물같이 보여 찜찜하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사회와 때로는 협력하고 또 때로는 긴장 관계를 이어 왔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흐트러진 기독교 물질관은 다시 사회와의 긴장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즉 ‘청부론’과 같은 타협책이 아니라 김 목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어렵지만 성경적 이해의 바탕 위에 설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김 목사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교리로 말씀을 풀고 신앙의 맥을 이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시대는 지났다. 진정 말씀에 충실하게 복무하며 사랑을 갖고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행동이 따르는 사랑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김 목사의 이 책은 어렵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감동을 엮어내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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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가 어려우십니까?
라채광 지음 / 두란노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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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신앙인에게 큐티(QT)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이다. 복잡다단한 21세기를 살아가면서  QT를 지속적으로 하기가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정해진 시간을 만들기가 힘들며 또 일정한 공간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이 지속적인 QT를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QT를 방해하는 것은 본인의 나약한 의지이다.

   이런 어려움의 극복을 위해 현재 치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면서 두란노 QT 강사로도 뛰고 있는 라채광 집사가 쓴 책이 <큐티가 어려우십니까?>이다. ‘QT란 무엇인가’에서부터 ‘QT 노트 모델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총 8 장에 걸쳐 쓴 이 책은 QT에 대한 전반적 개설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기도가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개별 행위이듯이 QT도 개별성이 강한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성경 혹은 쉬운 QT지를 매개물로 사용한다는 것이 공구 없이 하는 기도와 다른 점이다.

   글쓴이는 QT를 정의하기를 “한마디로 간결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실제 생활 안에서의 동행과 교제”(10쪽)라고 했다. 우리의 일상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지만 세상에 쫓기다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세상사를 뒤로 하고  QT 교재를 사용해서 주님을 만나는 교제하는 시간이 이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QT에 대해 말들은 많이 하지만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각자 상이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QT의 공통적 요소를 시간, 장소, 성경 말씀, 기도의 네 가지로 정리해 주고 있다. QT를 할 때, 여러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준비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QT의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위 PRESS법이다. 내용은 ①Pray for a moment(잠깐 기도할 것) ②Read His Word(말씀을 읽을 것) ③Examine His Word(말씀을 묵상할 것) ④Say back to God(말씀의 결과를 가지고 다시 기도할 것) ⑤Share with others what you have found(발견한 사실을 다른 사람과 나눌 것)이다.

   글쓴이는 QT에 대한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다. 아마 그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QT에 일가견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는 경험을 살려 QT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유형을 세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 둘째, 묵상이 어렵다는 것. 셋째, 적용을 찾기가 힘들고 순종이 안 된다는 것(이상 41쪽) 등이다. 그는 충고한다. 어렵더라도 QT는 매일 규칙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단순하지 않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일보다 먼저 QT를 앞세우는 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 행하는 과정은 심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순종한 결과는 한없는 기쁨임을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하기’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먹고 QT를 시작한다 해도 쉽게 무너지기 일쑤인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직한 마음으로 묵상하고 또 오류 없이 묵상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49쪽).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가까이 동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믿음의 지체들이 갖고 있는 동일한 주제이다. 우리 마음을 바로 잡고 세우는 데는 QT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QT에 대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데 이 책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부기하며 독후의 느낌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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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선교의 혁명
K. P. 요하난 지음, 임승환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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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P. 요하난은 인도 사람이다. 그는 불교의 발상지이지만 지금은 힌두교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6형제 중 어머니의 기도로 유일하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세계 선교의 혁명>은 그가 만든 아시아복음선교회(Gospel for Asia)의 선교 보고서이자 그의 제2/3 세계 중심의 선교사관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지금까지의 선교사(宣敎史)가 기독교 선진국 중심의 선교사관(宣敎史觀)이었음을 볼 때 그의 관점은 혁명임이 분명하다.

   선교의 어려움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인도와 같은 기독교 소수 지역에서의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요하난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인도에서 또 해외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정진(精進)해서 많은 영적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자국(自國)인 인도의 사역에서보다도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해서 보고 느낀 것에서 선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는 먼저 물량주의 선교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물질적 풍요와 개인주의로 집약할 수 있다. 미국 사회가 대표적인 나라이다. 그들의 경제적 풍요에서 오는 낭비는 주님 앞에 죄 짓는 일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함의 축복을 그는 빈곤한 나라 국민과 나누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시아의 미전도 종족들을 위해 미국의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고 물질로 도우라고 호소하고 있다.

   두 번째로 그가 지적하는 것이 교회의 세속화이다. 세상 풍조를 따르는 교회의 흐름이 복음을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는 세계 기독교의 현실을 그는 마음 아프게 걱정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사회복음의 문제이다. 그는 사회복음이 종교적인 옷을 입고 기독교 단체 내에서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영적인 전쟁을 육적인 무기로 싸우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122쪽). 사회복음에 대해 그가 이런 경계의 의견을 내어놓는다 해서 약자에 대한 그의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많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레 19:18 ; 사 1:17 ; 58:10-11 등) 궁핍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요하난의 시각은 냉정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부흥이나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기독교적 혁명이 필요할 때라고 말한다. “참된 복음의 길로 되돌아가자!”는 구호로 대변되는 혁명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을 지옥불로부터 구해 내는 일에 최우선을 둘 때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153쪽).

   요하난은 전통적 선교, 즉 백인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에 파견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단언한다. 선교는 그 나라의 현지인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현지인 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왔고 또 그렇게 훈련 받고 있는 사실의 중요성에 그는 주목한다. 그렇다고 미국 등 선진국들의 할 일은 없는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 즉 재정적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176쪽). 사역은 현지인들에게 맡기되 아무 조건 없이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이 미국 등 선진국이 할 역할이라는 것이다.

   K. P. 요하난의 문제 제기는 미국을 위시한 신앙 선진국에 던지는 목소리이긴 하지만 우리라고 그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 대국(미국에 이어 2위)으로서 신앙 선진국의 선교 양태와 신앙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문제 제기가 되는 것이다. 자국(自國) 중심의 선교사관, 물질적 풍요 속에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교계 분위기,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신앙공동체적 사랑이 사라지고 있는  점 등이 바로 1세기 전 신앙 선진국의 풍토를 그대로 이식해 놓은 듯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 주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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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행전
이강천 지음 / 푸른초장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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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요한 책을 읽을 때는 겉표지를 싸서 보는 습성이 있다. 주로 이론서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 책들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보호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 같다. 이론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정말 소중한 책들은 꼭 싸서 읽곤 한다. 책 내용의 소중함 이상으로 책도 소중하게 여겨져 혹 그 책에 작은 상처라도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이다.

이강천 목사의 <바나바 행전>은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왜 하필 <바나바 행전>으로 정했을까가 처음 좀 궁금했다. "행전(行傳)"은 신약 사도행전의 바울과 베드로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통의 이야기에 붙이는 이름이다. 또 몇 년 전 아는 집사님을 비롯해서 몇 명의 평신도가 쓴 <일곱 집사 전도행전>이란 책도 그들이 전도하면서 겪은 애환들을 정리해 놓은 글이었다.

이 ‘행전’들에서의 공통점은 어렵고 힘든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들은 주님의  동행을 믿고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이강천 목사의 신앙 간증기인 이 글에 ‘행전’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기발한 아니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바나바는 왜인가?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전력(全力)하고 있는 목회자 재교육 훈련센타인 ‘바나바 훈련원’에서 따온 것일 것이다. <바나바 행전>, 고전미와 신앙적 안목 그리고 현대에 어필하고자 하는 책의 이름이지만 이름에 값하기는 그 내용을 읽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는 이 글이 어떤 장르에 속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이건 분명 수필의 범주에 속하는 글이다. 어떤 영역이건 개인의 인생 역정을 가감 없이 붓 가는 대로 써내려 간 글을 수필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감 없이’와 ‘붓 가는 대로’에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터인데, 이강천 목사의 글은 여기에서 단연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 왜냐하면 인생의 솔직성에다 신앙의 진실성까지 합쳐져 있어 ‘가감이 없기’ 때문이고, 문단까지 무시하고 문장 중심으로 글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붓 가는 대로’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젊은이들을 겨냥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보잘것없는 한 목회자의 수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시대에 고고하게 서 있는 한 영성의 대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천 목사는 건강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체력이 약한 사람이고 또 어렵지만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며 지적 수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목회자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다.

우리는 가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렇고 재력가를 만날 때도 또 대중이 선망하는 연예인들을 만날 때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조금은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이강천 목사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짐을 느낀다고 한다. 왜인가? 그의 고고한 영성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영성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이 있다. 그가 하나님과 영적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그것이다. 또 중요한 사역 뒤의 감동을 운문으로 덧붙인 시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며 또 고비 고비마다 놓치지 않고 감동과 은혜를 시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시인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문학 작품까지 정독을 하는 나로서 하루 저녁에 책을 독파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십여 쪽을 읽고 있더니 눈 깜짝할 사이 백 몇 십 쪽을 일고 있었으며 또 잠시 후 보니 이백 쪽의 뒷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용을 간파하지 않는 건성의 독서는 절대 아니었다. 언뜻 성령이 함께 하시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르긴 해도 이강천 목사의 대쪽같은 신앙심에다 문학적 재미까지 그리고 인간의 진솔성이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녹아들게 한 것 같다.

이강천 목사도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인생은 60부터’이다. 나는 이 책이 이강천 목사의 완결된 신앙 간증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나바 행전>은 아무 에필로그 없이 붓을 놓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아마 그는 지금까지 해 온 사역보다 앞으로의 사역이 더 소중하게 주님의 일에 쓰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붓을 뚝 떨어뜨린 것은 그의 남은 사역을 기대해도 좋다는 선언 같이 받아들어져 도리어 후속 편을 고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 좋다. 마치 재미있는 연속극이 더 많은 시청자를 모으기 위해 클라이막스에서 막을 내리듯이 말이다.

나는 요즘 책 선물을 더디 하게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책을 섭렵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권할 만한 좋은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다. 자신 있게 선물할 책을 발견했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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