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성결교회 이명재 목사입니다. 저희 교회는 김천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농촌 교회입니다. 노인 분들과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성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가 전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마을은 약 250호 되고요, 믿지 않는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을 위해 `교회문고`를 운영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모은 책을 중심으로 문고를 꾸미려고 하는데, 옛날 책이 다수를 차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알라딘에서 작은 교회 지원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신간 보충 차원에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농촌 지역의 독서열을 높이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저희 교회가 선택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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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독서 명품인생
이상욱 지음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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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문화가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는 판에 '독서'에 대한 책이라니. 나는 세상을 역린(逆鱗)하는 듯한 이러한 용기에 가끔 연민을 느껴왔다. 학교 직장 심지어 가정에서도 온통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배하고 있다. 아니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거리를 활보하면서도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 세태이다. 이런 마당에 '책 좀 읽어시오!' 그것도 '명작을 읽어시오!'라는 외침이 통할 리가 없을 것 같다.

아니다. 통할지도 모른다. 인터넷 문화를 앞장서 이끈 빌 게이츠(William H. Gates)는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의 주위엔 늘 책이 놓여 있으며 특히 장거리 여행을 갈 때에는 가방 가득 책을 담아 떠난다고 한다. 인터넷 문화를 이끄는 힘을 그가 책에서 공급받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책의 끈끈한 생명력을 그는 증명해 보이고 있다. 사람이 역사의 주인인 이상 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앞으로도 사람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시점에 독서에 대한 책이 한 권 출판되었다. 이상욱의 <명작 독서 명품 인생>(예영커뮤니케이션)이 그것이다. 한편 반갑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그의 이 책이 울림 없는 외침이 되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출판 산업이 침체되어 있는 가운데 세상에 던져진 독서 관련 책이어서 더 그렇다. 지금 그나마 겨우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책은 처세술과 건강 그리고 재테크 관련 도서 정도라는데, 명작 독서로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한 책이 독자의 반향을 적게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책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진리로 통했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무분별한 인터넷으로 인해 그 진리가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점검해 볼 때이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볼 때이다. 독서에 대한 책은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관련 도서가 독서에 대한 기술을 제시하고 지적 만족감을 맛보게 하는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서로 인해 계산에 밝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상욱의 <명작 독서 명품 인생>이 그런 책 중의 하나였다면 나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을 강조했고 '정신'에 가치를 부여했으며 '바른 삶의 방법'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적 건강에서 진정한 행복을 꿈꾸고 평화를 그리고 있다. 그가 명작 독서법을 '명작을 읽고 명품 인생을 살게 하는 독서법'이라고 정의한 것에서도 이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11쪽). 책읽기가 자기를 채워 남을 지배하고 세상에 군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저자는 강력 반대한다. 그의 책읽기는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세계로의 입문을 뜻한다. 그 방법으로 1941년 로빈슨(Francis Robinson)이 대학생들의 학습 전략으로 개발한 SQ3R's를 원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저자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독서법에 적용하고 있다.

<명작 독서 명품 인생>의 총 면수는 351쪽이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이 속에 책과 관련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도서가 등장한다. 이 책들은 역사에 쉼 없이 기여한 것들이고, 저자들은 인류 역사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그가 인용한 책과 저자들과 책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예상한 것 이상의 유익을 얻게 된다. 이 책은 모두 합해 6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소개하면, 1부 세상 읽기:세상을 읽어라. 2부 개관하기(Survey):명작 세계를 보라. 3부 질문하기(Question):명작적 질문을 하라. 4부 보물찾기(Reading):보물을 찾아라. 5부 내면화하기(Recite):명작화하라. 6부 표현하기(Review):명작으로 표현하라. 여기에 더해 앞에 추천의 글과 여는 글이 있고, 뒤에 참고문헌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책 전체의 1/3이 넘는 면수를 할애해서 1부 세상읽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나만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독서를 강조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독서는 오히려 성숙한 인간으로의 삶에 해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독서의 목적이 물질문명의 팽배로 인하여 쇠퇴해가는 인간성 회복이 되어야 하고, 사회악으로부터 '나'를 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에 대한 최선의 방안이 되어야 한다(30쪽)고 말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고민한 현대 문명이 가지고 있는 7대 사회악에 암시 받아 지금 우리 인류 앞에 놓여 있는 난제를 여섯 가지고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 환경문제-모두의 것으로 살기 ▲ 전쟁문제-약자와 함께 살기 ▲ 빈곤의 문제-가난한 자와 함께 살기 ▲ 교육문제-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함께 살기 ▲ 질병의 문제-모두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 종교문제-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등이다. 이것을 하나의 어절로 요약한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이를 위해서 명작 독서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본주의가 장점이 많은 경제 체제지만 그 폐해도 만만치 않다. 무한 경쟁에서 오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승자 독식주의 또 극도의 이기주의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한지 오래이고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돈의 노예로 추락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저자는 해결 대안으로 문·사·철(文·史·哲) 중심의 인문학 독서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동서양의 수많은 예들을 들이대고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약자들을 위해 큰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 바로 인문학 독서로 깨달음을 얻은 결과라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아프리카 오지로 들어가 흑인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알버트 슈바이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유대인을 대신하여 죽은 막시밀리안 신부, 태평양의 나환자 섬에 들어가 헌신하다가 죽은 다미앵 신부,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 청년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문학 독서로 깨달음을 얻어 이런 결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열린 사고를 갖고 있다. 그의 주장을 보완하기 이해 소개한 책과 사람들은 남녀노소, 계급과 계층 그리고 종교를 따지지 않는 것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소크라테스의 책에서부터 최근에 출판된 도서까지 독서에 관계 되는 것은 놓치지 않고 인용하고 있다. 목회자인 저자가 가톨릭 신부, 유교의 성리학자 심지어 불교의 스님까지 끌고 와서 논지를 보충하고 있는 데서 그의 열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논지는 많은 곳에서 성경으로 귀결시키고 있음을 본다. 성경을 철학과 함께 인류의 정신 유산인 다양한 고전들에서 길어 올린 샘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63쪽). 인류가 물려준 유산 중 성경만큼 귀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상욱은 이 책에서 통섭형 인간형을 강조하고 있다. 통섭(統攝)은 지식의 대통합, 즉 인문학과 자연 과학의 통합을 의미하는데(81쪽), 중세의 사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박물학자들을 들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실학의 완성자라고 일컫는 다산 정약용을 통섭의 사람으로 꼽고 있다. 사회가 전문화 다양화되고 있는 때에 어울리지 않는 주장 같기도 하지만, 저자는 한 가지에 정통하면서 다른 것에는 무지한 반신불수의 인간형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두루 꿰뚫는 전인적 교양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쓴 문과적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강의 배다리(舟橋), 수원 화성 설계, 기중기 발명, 의학서(麻科會通) 저술 등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통섭형 지성인이었다(78쪽).

나는 솔직히 책 읽기에 대한 테크닉은 무시하는 편이다.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의 책은 정독이든 속독으로든 나의 지식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욱의 <명작 독서 명품 인생>은 좀 다르게 소화해야만 했다. 이 책의 2부에서 6부까지는 상술했듯이 SQ3R's 독서법을 저자 나름으로 재해석해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문사철을 독파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았다. 그가 제시하는 독서법에 따라 책을 읽어간다면 통섭의 지성인, 실천이 따르는 지성인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다. 저자는 청소년 독서 지도로 오랜 시간을 헌신해 왔다. 그는 인문학 독서로 학생들이 변하고 그 부모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는 많은 예를 직접 보아온 산증인이다. 이 책도 그것의 결과물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명작 독서 명품 인생>은 더욱 돋보인다. 이웃 집 사람이 슬픔을 당해도 그냥 지나치고, 심지어 죽어도 별 관심이 없는 세태에서 이 책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품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것은 두 번 이상 정독하라는 것이다. 이 책은 쉬운 언어로 가볍게 쓴 책이지만, 한편 미주(尾註)와 참고 문헌을 수록할 정도로 학술 서적의 체계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처음 읽어서 많은 양을 수용해 내기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두 번 읽으면 또 다른 가르침이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담길 것이다.

좋은 책은 저자의 주장에 기분 좋게 설득당할 수 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이 그런 범주에 속할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읽고 기분 좋기는 오래만의 일이다. 사족(蛇足)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가끔 오탈자가 보인다는 것과, 많은 배려를 했지만 미주 등 꼭 한자(漢字)가 필요한 곳에는 한글과 병기했으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또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다른 곳에는 <로마제국 흥망사>로 표기하기도 했던데 고유명사는 통일시켜 주는 것이 좋다. 이 책이 에세이가 아닌 이상 '여는 글'이 있으면 '닫는 글'도 있는 게 원칙이다. 저자를 위해서도 그렇고 특별히 독자를 위해서 '기(起)-서(抒)-결(結)'의 3단 구성은 지켜주었으면 좋아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이 책이 판을 거듭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명작 독서가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 그래서 약삭빠른 사람이 행세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문적 소양을 갖춘 통섭의 사람이 사회적 리더가 되기를 바란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듯이 고전을 읽고 교양을 쌓은 인문적 사람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심지어는 연예계에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다. 독서에서 얻는 깨달음은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의 바람에 톡톡이 값하고도 남는다. 저자 이상욱이 인문학 독서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하니 희망을 갖게 된다. 저자의 건필을 바라며 독자 제현들에게 <명작 독서 명품 인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소개하고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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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함께 읽는 신약성서 이야기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한은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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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기는 2년도 더 되는 것 같다. 어느 대학 축제 때 50% 세일로 구입한 책이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루다가 어제(12월 30일) 주일 예배 끝나고 독파한 책이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lem Van Loon)이 지은 <신약성서 이야기>이다. 번역은 전문 번역가 한은경이 했다. 박학한 지적 소유자인 저자에 조응하는 매끄러운 번역이었다.

 

반 룬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나의 지적 얕음을 말해주는 것이 될 터이다. 책을 독파하지 전, 표지 안쪽에 소개되어 있는 저자 약력을 보았다. 반 룬은 네덜란드 출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AP 통신 특파원으로 여러 곳에서 일했고, 뒤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서양 근대사를 강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시대를 읽고 있는 사가(史家)인 셈이다.

 

그런 그가 성서 이야기를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을 어려운 내용에 접근하기 힘든 아이들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역사와 신학은 고리타분한 학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런 선입관을 깨뜨리는 책을 쓰고 싶은 저자의 노력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지고 보면 성서도 이야기책이다. 일반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이야기 식으로 엮어놓은 책이 성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구속사의 결정물이라고 한다.

 

반 룬은 <구약성서 이야기>에 이어 그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서 이야기>를 펴냈다. <신약성서 이야기>는 총 13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그림으로 보는 성서 연대표'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총 206쪽에 걸쳐 내용이 채워진 책이다. 부피가 많은 책은 아니다. 13개 장으로 엮어져 있지만 성경처럼 연속성이 있는 글이 아니라 각 장을 눈이 닿는 대로 읽어도 괜찮을 책이다.

 

하지만 일반 성경의 내용에 저자의 상상을 살로 붙여 서술해 나갔기 때문에 읽는 재미는 가벼운 문학 서적보다 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저자의 그것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가령 신약 성서의 4 복음서 저자가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과 이 유명한 문학적 글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55쪽)과 3세기 넘게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현대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보다 국제적인 사회였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고 혈통을 많이 따지지도 않았다(65쪽)는 등의 이야기들이다.

 

또 유대와 갈릴리는 명목상으로 독립 왕국이었으나 세금을 징수해야 하는 일이 생기자 로마는 이들 역시 정해진 날짜에 자신의 족속이나 가문의 고향에 있어야 한다(71쪽)고 서술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호적을 하러 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호적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로마 제국의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어겼다며 비난을 받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일에 대해 너무나 민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리새인들은 옷에서 핀 하나도 빼려 하지 않는 바로 그 안식일"(125쪽)이라며 율법에 결박되어 있는 그들을 간접적으로 나무라고 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유명하다. 거기서 제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쫓아낸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 부정의 한 고리 역할을 한 것들이지만 거기서 환전상을 요즘으로 말하면 은행가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를 은 30에 판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니라 가리욧 지방 출신이다.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모두 갈릴리 출신인데, 이 유다만은 가리욧 출신이어서 그 소외감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팔기까지 하지 않았나 추측하는 대목에 공감이 갔다. 가룟 유다를 빼고 나머지 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출신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어부로 일하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제자가 그곳 출신인 것은 맞다. 예수가 살았던 세상도 오늘날과 같이 조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 강력한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있었던 반면, 노예들은 가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수는 강자보다 천 배는 더 많았다(173쪽)고 본 저자의 시각에 나의 시선도 모아졌다.

 

가끔 성모 마리아와 예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대화를 할 때가 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을 만날 때, 이 점을 질문할 때도 있다. 마리아와 예수를 동격에 놓고 믿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베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는 아버지 제우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중세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보다 더 많은 숭앙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184쪽)라고 한 말은 오늘날 우리의 궁금증 중 일부를 해소해 주지 않나 싶다.

 

지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성행하는 시대이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인쇄된 글자만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 앞에 '온 가족이 함께 읽는'이란 수식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또 저자 머리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성서 이야기라고 했다. 거기에 만족할 만큼 그림을 유효적절하게 배치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전혀 지루하거나 건조함을 느끼지 않게 한다. 몇 편의 사진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중세 저명한 미술가들의 그림을 옮겨 놓았다.

 

옮긴이 한은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이 책을 번역한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나누어 호칭하는데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하느님'으로 통일해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습관이고 개념이기 때문에 편리하게 쓰면 되는 것이다. 하나로 통일해 쓰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겠지만 사회 종교적 역학 관계가 허락하지 않을 때엔 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가면 사물이 변화하듯 앞으로 통일되어 사용될 날이 올 것이다.

 

번역이 매끄럽게 되었다고 상술했다. 옮긴이의 많은 노고가 따른 번역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25쪽 베데스다 연못을 설명하면서 '벳새다'로 옮긴 것은 잘못이고 그 외 몇 곳에 오탈자가 산견된다. 성경을 쉽게 읽고 이해하는 것은 오래 이어져 온 소망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만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단적으로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렇더라도 성경을 쉽게 풀어 재미있는 이야기 식으로 독자에게 제공된다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존 뉴베리'상에 빛나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라고 뒷 표지에 소개되어 있다. 상혼에서 나온 문구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반 룬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회와 접맥시키는 뛰어난 기술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성서에 눈이 자주 가게 된다면 반 룬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것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라고 독자 제현께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서를 읽는 시야에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이 책은 해 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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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들면 더 매워
정승훈 / 베드로서원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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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지은이로부터 증정을 받을 때 나는 가능한 한 서평를 써서 내가 운영하는 카페나 블로그 아니면 인터넷신문 등에 올리고 있다. 이것이 선물로 받은 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되는 듯. 이럴 땐 서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받은 책을 꼼꼼히 읽었다는 한 증표가 되는 것이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정승훈 목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본인이 직접 쓴 책이라고 했다. 연륜이 그렇게 높지 않은 젊은 축에 속하는 목회자가 저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미 10 여 년 전에 출판되어 서점에서는 절판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한 권 남은 책을 내게 주고 싶다며 슬며시 내 밀었다. 그는 책을 전하면서도 죄송하다며 한 권 남은 책 속지에 낙서가 되어 있어서 그 부분을 찢어 없앴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하얀 두 장의 속지 중 안 장이 없어졌다. 찢겨나간 흔적만 남긴 채.

 

정 목사는 지은이로서 나에게 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은 속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명재 목사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평안하시길... . 정승훈"

 

정 목사를 볼 때마다 그가 재주꾼 중의 재주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문가 수준의 기량을 갖고 있다. 그가 손으로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할 때 은혜 받고,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할 때도 웬만한 카툰 작가는 저리 가라이다. 또 그가 쓰는 글씨는 독특한 필체여서 주위에서 '승훈체'로 상표 등록을 하라고 채근까지 받는다고 한다.

 

목회자 세미나 훈련 과정의 하나로 미얀마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공회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나라 아이들이든 마찬가지지만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는 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공회당 입구에서 정 목사가 풍선에 그려주는 자리에서는 판이했다. 그림에 매료되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풍선 하나씩을 받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정 목사의 손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미다스의 손’이란 생각을 그즈음 했을 정도이다.

 

4 년 전 그로부터 책을 선물로 받고 서재 한 쪽에 꽂아 두었었다. 그 뒤 몇 번이나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서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꽂아 두었을 법한 곳엔 다 뒤져 보았으나 찾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거실 책장 맨 밑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정독을 했다. 읽을수록 그의 생각에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은 <건들면 더 매워>이다. 부제가 '풋내기 목사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로 되어 있고, 기독교 전문 출판사인 베드로서원에서 1997년에 초판을, 그리고 그 이듬해 2쇄를 찍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책이다. 부제로 내용의 일단을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책은 목사 안수 3년 차의 풋내기 목사가 쓴 사람 이야기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소재는 사람이지만 내용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람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 책에 올린 글들은 예외 없이 단문(短文)에 속한다. 문학 장르에 꽁트(conte)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짧은 글 속에 지혜와 사랑을 주제로 한 위트를 주로 담는다. 우리가 번역하기는 '손바닥 장(掌)'자를 써서 '장편(掌篇)'이라고 하는 글이 여기에 속하는데, 손바닥 만한 분량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처음 글에서 마지막 글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양적 질적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이 책에 올려진 글들은 대부분 그가 한 교회의 ‘새 가족부’를 담당할 때 쓴 글들이다. 새로 온 가족들에게 하나님을 쉽고도 다정하게 소개하기 위해 Tm여진 글들이다. 하지만 새 가족들보다는 기존 성도들 사이에 더 많이 읽혔다며 미안해하고 있다. 내가 글을 찬찬히 읽어본 느낌은 이 글들을 새 가족들에게만 독자층을 제한하기에는 아까운 글이라는 점이다. 글들이 깊이가 있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 주었다.

 

200쪽이 채 안 되는 책 속에 8부 총 82편의 글로 엮여진 책이다. 각 부마다 특징을 말한다면 1부 ‘놀이터’는 글쓴이의 유소년기 추억담이다. 서민의 아들로서 건강하게 자라온 과정이 가감 없이 진술되어 있어 친근감이 간다.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자는 따뜻하고 사랑스런 마음을 보태 서술하고 있다. 땅 따먹기, 자치기, 단방구, 말 타기 등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 아이적 일상어이다.

 

2부 ‘삼송리’는 지은이 가족에 얽힌 애환(哀歡) 이야기이다. 서울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삼송리는 미군부대가 있어서 양색시(?) 등 미군들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또 서울 생활에서 실패해서 떠밀려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재기를 노리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일찍 남편을 잃은 홍 권사님은 자녀들과 살아가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믿음 위에서의 치열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권사님은 보여주고 있다. 이 홍 권사님은 지은이의 어머니이다.

 

지은이의 가족사랑은 남다르다. 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형이다. 형은 지능지수가 높고 공부밖에 몰랐다고 한다. 그 형이 성인이 될 즈음 정신분열증에 걸려 병원을 드나들었다. 지은이는 이런 정신적 질환을 개인 차원에서 재단하지 않고 목적 없이 치닫는 '현대 사회'의 희생양들로 보고 있다. 하지만 꼭 나아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가정의 애사(哀事)에 속할 것이다. 감추고 싶은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만이 밝힐 수 있는 용기가 될 것이다.

 

3부 ‘풋내기 목사’는 목사 초년생으로서의 에피소드이다. 그냥 듣고 지나칠 일과성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글쓴이의 진솔함을 읽고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글들의 모음이다. 4부 ‘웃는 얼굴’은 짧은 글 안에서 역설의 미학을 맛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목회자는 가능한 한 성스러운 말과 거룩한 행동 쪽으로 기우는 삶을 살려고 한다. 또 이런 삶이 목회자의 바른 자세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 목사는 그것보다 진실한 마음과 따뜻한 태도에 방점을 두고 글들을 이어가고 있다. 풋내기 목사에게서 우러나는 풋풋함이 독자를 상쾌하게 만든다.

 

5부 ‘혼자 떠들기’와 6부 ‘무릎치기’에서는 글쓴이의 삶의 도량과 목회의 방향을 읽을 수 있어 좋다. 개인의 구원이 소중하되 사회를 외면하지 않으며, 믿음 생활에 있어서의 '축복'의 의미를 간과하지 않되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서 자세의 중요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예민함을 보여 주고 있다. 또 큰 것 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작은 것의 고귀함('저들이 굶고 있다', '7천 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 불의에 대해 그는 글로 발언하고 있으며('어린이날을 없애라', '뒷돈 공화국' 등) 성경 이외의 현대 교양인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든든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얼꼴', '새마을 노래' 등).

 

이 책의 부제로 단 것이 '풋내기 목사의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라고 했다. 이 부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해주는 글들이 7부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이다. 그가 겪은 일화 중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을 실명으로 칭찬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칭찬의 방법을 피하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더 친근감이 간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직설 화법이 아니라 '나도 저 사람처럼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간접적 문제 제시가 더 큰 설득력을 얻게 만드는 격이다.

 

8부 ‘허름한 밥상’에서는 풋나기 목사로서 소망하는 목회자 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 글들을 성경적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뛴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을 벗어나서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 글쓴이 정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결론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8부는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8부가 아니었다면 이 책이 감동의 글 모음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은혜의 책으로는 좀 부족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풋나기 목사의 글 배치 치고는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안에는 젊은 목회자의 그동안의 삶의 궤적이 선명한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 궤적은 온상 안의 화초라기보다도 들에 피는 들꽃과 같이 힘이 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경을 요약한 어절이기도 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짧으면서도 완결된 단문 말미에 관련 성경 구절을 덧붙인 것은 그의 이런 마음을 잘 웅변해 준다. 이 책이 기도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 목사는 이 책을 내기 위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서 정말 자신이 글이 책으로 출판될 수 있을까 하고 마음 졸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출판사라면 이런 글을 활자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업성은 좀 뒤진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진솔하고 따뜻한 마음을 많은 사람에게 공유시킴으로써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것이 책 출판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글을 달리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출판사의 신앙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이 어떠해야 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하다.

 

풋나기 목사의 이 글이 다시 인쇄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글 중간 중간 눈에 띄는 표현의 어색함,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오류 등은 다시 한 번 세세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2부 '호박과 라면'에서 홍 권사님이 호박만 보면 울대뼈가 움직거리신다라고 했는데, '울대뼈'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어서 여성인 어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단어이다. 6부의 '부러 틀리는 글자'에서 토씨 하나로 내용이 뒤바뀌는 예로 '낫게'와 '낮게'를 들고 있는데, 토씨는 조사(助詞)의 순 우리말이다. 여기서는 '토씨 하나로'가 아니라 '받침 하나로'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책으로 출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정승훈 목사는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 일찍이 포함되는 복을 누렸다. 그것도 30대 초반에. 그도 이젠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 간다. 책 출간 당시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아이들이 어엿한 사회인과 대학생으로 변해 있다. 그는 삶도 성실하게 살고 있고 또 목회도 모범적으로 하고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가 살아온 삶과 쌓아온 목회의 결과물들이 여러 가지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그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책에 담겨질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그의 책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 목사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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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그루터기 조선문학시인선 323
박영재 지음 / 조선문학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문학은 미래 지향적이기보다 과거 지향적 분야에 가깝다. 과거를 천착하며 삶을 살찌우는 것이 역사 외에 또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문학 중에서 특히 시(詩)도 과거의 경험칙(經驗則)을 주 소재로 삼는다. 인정과 자연 그리고 향수 등은 과거와 쉽게 연결되는  시어(詩語)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요즘 세류를 좇아 휘갈겨 쓴 스피디한 시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거기엔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문학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학이 과거 지향적이라고 해서 퇴행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시간을 거스르는 영역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과거적이라는 말은 과거나 현재에도 동일한 인간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론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대상에서 진실을 노래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인지 모른다. 힘들었던 과거 삶에서 인정과 사랑과 정의에 민감했던 나를 찾게 된다. 사랑과 인간의 본성이 현재의 생활상에서보다 과거에 보다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학(詩學)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최근에 출판된 박영재 시인의 시집 [뿌리깊은 그루터기](조선문학사)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제목부터가 그랬다. [뿌리깊은 그루터기]라. 나는 이 제목에서 대뜸 두 가지를 연상했다. 하나는 전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여기서의 전통은 우리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은 다 알다시피 기독교 경전을 가리킨다.

 

모르겠다. '뿌리깊은'에서 전통을 연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식물은 뿌리에서 시작해 줄기가 나오고, 가지가 퍼지며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뿌리는 그 나무의 시작을 상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도 가문(家門)도 또 이것들을 아우르는 문화도 그 뿌리가 튼튼해야 훌륭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전통'이라고 한다.

 

'뿌리깊은'에서 내가 전통을 쉬 떠올린 것은 무엇보다도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새'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 때문이지 싶다. 용비어천가는 주지하다시피 훈민정음으로 된 최초의 악장 문헌이다. 조선조 세종대왕이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창제한 글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다. 이것은 한문화(漢文化)에서 벗어나겠다는 우리 문화의 대 선언이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진정한 우리의 전통은 '뿌리깊은 남간'의 훈민정음 실험 작 용비어천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루터기'는 또 무엇인가? '나무나 풀 등을 베어내고 남은 밑동'을 그루터기라고 한다. 박 시인이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말은 성경 이사야 6장 13절에서 원용해 온 단어이다. 북이TM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멸망당한 뒤, 남 유다마저도 패망 당할 위기 속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루터기',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준행하는 남은 자들(remnants)로 인해 구속사가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뿌리깊은'이라는 수식어와 '그루터기'라는 명사는 모두 전통과 맞물려 있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시집의 이름을 채워주는 것은 120편에 가까운 박 시인의 시들이다.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전통과 관련되지 않은 시들이 없다. 어떤 것은 제목으로 또 다른 것은 시어로 아니면 주제로까지 전통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시집에 올려 있는 시들을 읽노라면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 속의 내가 아닌 자연 속에 몰입되어 있는 자신, 전통을 붙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사향보(思鄕譜), 제2부 '계절과 함께', 제3부 '사양(斜陽)의 노래'가 그것이다. '사향보'는 그러니까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이 된다. 고향 마을에서 일어났던 인간미 넘치는 소재들이 시어로 형상화되어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계절과 함께'는 사계의 변화에 화자(話者)의 감정을 이입시켜 삶의 단계 단계를 구분지어 주면서 시절을 아끼고 허송세월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양의 노래'는 '해질녘의 노래'라는 뜻으로 황혼에 접어든 시인의 인생을 노래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시인만의 '사양 노래'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인생의 끝자락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봐도 좋다.

 

시인을 참다운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조련사 박진환 박사는 평설에서 이 시집의 시들을 세 가지로 구획해 주고 있다. "하나는 思鄕(사향)을 중심으로 설정되고 있는 思鄕(사향)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노경의 시인이 맞고 있는 斜陽(사양)공간,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옆에 끼고 동행하면서 구원의 길을 향해 중단됨이 없이 내딛고 있는 시와 신앙의 공간을 세 번째 詩域(시역)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p.125). 120편에 달하는 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품평한 뒤 내 놓은 구분이다.

 

그런데 나는 박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 전편을 통해 흐르고 있는 또 다른 정신세계를 발견했다. 절대자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박 박사도 평설에서 세 번째 시역으로 제시하고 있으니 접어 두자. 그의 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시역은 ‘부인’과 ‘어머니’이다.  60 성상을 동고동락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이 시집뿐만 아니라 앞에 출판된 [반석 위의 백합향], [산수와 동행] 등에도 선연히 드러나고 있다. 박 시인의 어머니와 부인은 지금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리움과 고마움은 더 절실하다. [뿌리깊은 그루터기]에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조련해 낸 것이 20 여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주제로 한 것이 10 여 편이나 된다. 물론 간접적 소재까지 포함시키면 관계 시들이 훨씬 많아지겠는데 그것은 그들에 대한 시인의 정신적 부채의식이 얼마나 큰 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가령 '비오는 날의 그대 생각'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시화한 대표적인 것이다.

 

........<전략>

못다한 사랑

우수로는 달래지 못한

옛날의 사랑도 꽃으로

피고

따뜻하게 불러보는

이름 하나도 꽃으로 핀다

('비오는 날의 그대 생각' 부분)

 

여기서 '따뜻하게 불러보는 이름 하나'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내'를 가리킨다. 살아생전에 잘해 주지 못하고 짐만 지웠던 과거 삶을 돌이키며 이제 잘 해 줄 수 있는데, 둘러보니 아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비오는 날 유리창에 얼룩진 비 무늬를 꽃으로 만들어 그것을 아내로 이미지 변화를 시켜 '따뜻하게 불러보는' 것이다.

 

부인에 대한 이 시와 비슷한 시상(詩想)은 1부에서만 '그 여인', '저 별은', '그리운 로맨스', ''기다림' 등 여러 개이다. 전해들은 바로는, 박 시인의 부인은 남편을 위해 잘 내조하고 또 시어머니에 대한 정성어린 효성으로 효부 상을 수상할 정도로 선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한다. 그에 대한 찬사가 아직까지 마을에서 회자된다고 하니 지극한 효도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들로 표현할 정도('들은 어머니다')로 신뢰한다. 그리고 고마움으로 사무친다. 그도 그럴 것이 32세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홀로 4형제를 키워 훌륭한 사회인으로 진출시켰다. 이렇게 하기까지는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은 어머니을 '나의 신앙'(p.34)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고마움이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박영재 시인의 시는 대단히 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는 80 중반의 연치(年齒)를 가지고 있지만, 시적 테크닉을 젊은 시인 못지않게 구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언어의 다양한 표현을 장점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토속적인 향토 어에서부터 현대어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표현에 있어서도 비유와 상징에서 공감각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능수능란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단어의 통일성도 돋보인다.

 

다음의 시에서 절묘한 단어 배치를 발견할 수 있다.

 

........<전략>

치마폭 잡고 늘어지다 채인

바람에 바람맞은 봄바람

여인네 가슴에 감기는 연두빛에도

몰래 감춘 바람기로 설레임한다.

('봄바람 여인' 부분)

 

같은 '바람'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 예가 된다. 처음 나온 '바람'은 '용언의 어미 '-ㄴ(-은), '-는' 아래에서 '바람에'의 꼴로 쓰여 '원인'이나 '근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고, 두 번째 나온 '바람'은 '속임을 당함'의 뜻으로, 그리고 세 번째 '바람'은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을 마지막 '바람'은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마음이 끌리는 들뜬 상태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한 단어를 일부러 의도하고서도 이렇게 배치하며 시어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박 시인은 절묘한 언어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박 시인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또 자연과 인생을 노래했다고 해서 시만을 위한 시를 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굴곡의 역사에서 발견하는 슬픔을 표현할 줄 알고(‘청령포에서’), 실향민으로서 남북 분단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뜸북새’, ‘하나로 1’). 편리라는 이름으로 과학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을 시로 항의하고 있기도 하다(‘옹달샘’). 또 인간의 욕심으로 소 돼지를 죽음으로 내 몰았던 구제역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자연 속에’). 박 시인은 문학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객관적인 시각을 소지하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박영재 시인은 고희(古稀)가 넘어 시작 활동을 시작해서 나이를 초월해 왕성하게 필봉을 작렬하고 있어 주위에서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지금 그는 80 중반으로 미수(米壽)를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山水(산수)와 同行(동행)], [구름타고 땅을 보니] 그리고 시집으로 [반석 위의 백합향]과 본 [뿌기깊은 그루터기] 등 네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은퇴를 하고 무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삶은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이번 시집이 그의 마지막 출간 책자가 될 것 같다고 했지만 그의 왕성한 필력으로 볼 때 미수 기념 나아가 구순(九旬) 기념의 시집을 기대하는 것은 나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박 시인의 건승을 빌며 독자 제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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