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
신은미 지음 / 네잎클로바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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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것은 바로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외세에 의해 한 민족이 헤어져 살아야 하는 삶, 그것은 슬픔이고 바로 우리의 한 맺힌 비극이기도 하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이 예기치 않게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반어법적 표현으로 말했다지만 통일도 그렇게 찾아올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남북 당국자들의 지난한 노력이 따라야 하고 국민이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결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민간 교류도 정권 담당자가 누구냐에 따라 들쑥날쑥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남북의 민간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금강산 관광도 멈춘 지 오래고 개성 공단도 가동이 중단된 후 시간이 꽤 흘렀다. 이산 가족 상봉 행사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평화 통일은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의 바라는 바일 텐데, 지엽적인 문제, 예를 들어 만남의 격식 문제라든가 북을 향하여 선동 삐라가 든 풍선을 날리는 문제 등으로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통일 문제만큼은 공히 남북의 대범한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럴 때 책 한 권을 손에 잡았다. 재미교포 신은미가 세 번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책이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이라고 한다. 제목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네잎클로바)이다. 지은이 신은미와 황선(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이 서울을 비롯해서 몇 개 도시에서 통일토크문화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였다. 그들이 본 북한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며 민족의 동질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다. 남북의 동질성 회복은 통일의 전제 조건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갈 수 없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라, 북한은 알아서는 안 될 금기의 땅이었다. 그래서 궁금증을 더 자아내게 했다. 

 

이들의 통일 콘서트를 종편 방송과 극우매체 그리고 공안기관 등에서는 애써 '종북 콘서트'로 규정하고 여론몰이를 했다. 그러던 중 전북 익산의 한 성당에서 있었던 이들의 콘서트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면 사고(思考)가 아직 무르익지 않을 나이이다. 이런 어린 학생이 콘서트 현장에서 황산 테러라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테러를 일으킨 학생과 배후 세력을 밝히는데 수사력을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안 당국은 도리어 신은미를 강제 출국시키고 황선은 구속 수감시키고 말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편향적인 법 집행이었다.

 

신은미가 쓴 방북기(訪北記)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또 다른 하나가 계기가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3년 우수도서(세종도서)로 선정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뒤늦게 선정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이해 못할 노릇이었다. 전형적인 정권 아부 성 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뀐 것도 아닌데 세상에 무슨 큰 변동 사항이 있었다고 1년 전 선정된 도서를 제외한단 말인가. 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이 책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북한 체제를 옹호했다든가 아니면 그곳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 대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읽어 보지도 않고 오도된 여론을 의식해 이런 결정을 한 문체부는 국민을 위한 부처가 아니라 정권 보위만을 위한 기관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에 속한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도서 등 표현물을 무원칙하게 칼질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적 표현물도 아닌데. 사람이 밉다고 해서 그가 지은 책까지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전체주의 작태밖에 안 된다. 도대체 이 책이 국민의 정서를 해할 만큼 정말 좋지 않은 책인가. 보수적인 가정에서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해 온 지은이를 책 한 권으로 종북 좌파로 몰아세우는 정부라면 지극히 나약하고 무책임한 정부임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신은미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을 가다>는 기행 수필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많은 사진을 곁들여 쓴 383쪽에 이르는 그의 북한 소개는 한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나는 도대체 누구이고 지금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북한이 동토(凍土)의 땅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한민족이 정을 나누며 소박하게 살고 있는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지난 세기 작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사람이 살고 있었네>와 비슷한 시선으로 그곳의 구석구석을 소개한 글이다. 황석영의 글이 소설가 특유의 윤필(潤筆)에 능한 글이라고 한다면 신은미의 글은 아마추어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마음에 더 와 닿는다. 

 

세 번에 걸친 여행의 글을 한 권으로 묶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언부언 내용의 반복 없이 말끔한 문장으로 일관하고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신은미는 2011년 10월, 2012년 4월, 2012년 5월 이렇게 세 번 북한을 다녀왔다. 미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은 지금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외에는 누구든지 방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고 한다. 통일에 관심 가진 재외 동포들의 방북으로 그곳 소식이 전해진다는 것은 다행이다. 통일은 적대 의식이 아니라 서로 만나 대화할 때 물꼬가 트이는 것이다. 다른 것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7.4남북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의 기조에 근거해 만나 소통하면 될 일이다.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신은미는 북한 사람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에 호기심을 갖고 첫 북한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첫 번째는 부부만의 방북이었으니까 개인 여행에 속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여행은 2012년 4월 '세계친선예술 봄 축제'에 재미동포 예술단의 일원으로 다녀왔고(단체 여행 성격), 마지막 세 번째 같은 해 5월 세 쌍의 미국인 부부와 신은미 부부와 재미동포 1인 등 모두 9명이 한 팀이 되어 방북했으니까 그룹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고 느낀 결론은 '어쩌면 우리와 이토록 똑 같을까'라는 동질감이었다고 한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북한은 우리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북한 사람은 머리에 뿔이 나 있고 이빨은 드라큐라처럼 날카로우며 몸 전체가 붉은 색으로 물든 괴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모르긴 해도 북한이 남한 사람을 묘사할 때도 유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구사하며 비슷한 정서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인다. 

 

이 세 번의 여행이 동행한 숫자와 성격엔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은미 부부가 북한 동포를 경계의 눈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종편 등 극우주의에 찌든 사람들은 신은미에게 종북 이데올로기를 덧칠해 멋대로 재단하고 있지만 그래서 결국 그를 강제 추방하고 말았지만, 그의 방북기를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신은미가 북한 체제를 옹호했다거나 북한이 낙원이라는 취지의 서술을 찾을 수 없다. 한국 사람의 특성 중 하나를 싫으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측면을 드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지만 북한 문제에 이르면 그 정도가 더 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은 여간해서 바꾸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입장도 분명하다.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 계층의 빈부를 가리지 않고 이 문제만큼은 이론(異論)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북한을 혐오하는 극우주의자들은 북한 체제뿐 아니라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성적 접근과 논리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무조건 싫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도 문명의 21세기에 살고 있되 사고는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격이다.

 

신은미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는 북한에 대해 본 대로 느낀 대로 써 내려간 글이다. 기행문이라는 것은 원래 주관성이 강한 글이어서 독자 전체에게 만족을 주기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무조건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에겐 신은미의 이 책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글은 북한의 어두운 면을 부각해 비판 비난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글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시각은 통일을 막는 벽을 더욱 두텁고 높게 쌓는 것밖에 안 된다. 지은이 신은미는 분명하게 말한다.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 남과 북, 한민족은 서도 보듬어 안아야 한다고. 남은 왼쪽 다리를 북은 오른쪽 다리를 서로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런 점에서 학자나 작가가 쓴 다른 방북기와는 달리 평범한 주부로서의 소박함과 따뜻함이 책에 서려 있어 호감이 간다.  

 

모르고 하는 무조건적 비판보다 알고 하는 건설적 비판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때가 많다. 나는 신은미의 글을 통해 미처 몰랐던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북한에도 휴대폰이 대중화 되어 간다는 것, 즉 그가 처음 방문했을 때(2011년) 휴대폰 가입자가 80만 정도인데 그 해 말께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소식(46쪽), 영어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49쪽),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날 예식을 마치고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혁명열사릉이라는 사실(260쪽) 등.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이다. 이웃을 생각하고 나라와 조국을 염려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아름다운 일임이 분명하다. 이른바 공동체 의식이다.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효 사상 등 정신 영역의 가치를 높이 사 연구의 주제로 삼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은이 신은미는 전통적인 보수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그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당의 오바마가 아닌 공화당의 보수 후보 존 매케인에게 투표할 정도로 보수적 사고에 젖어 있었다. 크리스찬인 그의 신앙도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의 방북기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런 시각 안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 심성인 인정과 사랑의 눈으로 북한 주민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신은미를 종북 인사로 낙인을 찍어 강제 출국시킨다는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작태일 뿐 반대쪽을 불용하는 허약한 정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자신 있는 정부는 국민의 다양한 생각들을 보호하고 그것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에 비해 나약한 정부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생각을 규제하고 배척하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의 이 정권이 바로 후자쪽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미를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선남선녀 중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 색채를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 곳곳에는 그의 보수적 사변(思辨)들이 산견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는 출퇴근 길 사람들을 보고 초라함과 고단함 그리고 무력감을 느꼈고(71쪽), 6.25전쟁 때 북한을 지원한 중국군을 '중공군'으로 표현한 것이라든지(156쪽), 대동강 변에서 목격한 쉬지 않고 쏘아대는 축포(불꽃놀이)에서 '적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이렇게 응징할 것'이라는 섬뜩한 이념성을 느낀 것(210쪽), 볼거리가 많은 평양 장마당 구경이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섞인 마음(353쪽) 등등.  

 

신은미는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보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 세 번에 걸친 북한 방문에서 그는 늘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가난의 땅 그러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북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려고 애쓴다. 북한을 적대시하는 우리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한 듯 남북뿐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싸우면서 원수로 살아서는 안 된다면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상대를 용서하고" 나아가 "원수도 사랑하라"고(80쪽). 과연 예수님께서 지금의 남북 대치상황을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북한을 무찔러 적멸(寂滅)할 대상으로 생각하실까 아니면 구원의 대상, 사랑의 대상으로써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실까.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극우의 외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점을 깊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한 것 중 하나는 평양의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첫 번째 여행 때는 금수산태양궁전(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을 참관하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예배가 끝난 뒤 봉수교회에 도착했다. 그 이듬해 세 번째 방북 때는 시작 전에 교회에 도착하여 처음부터 온전히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목사님의 부탁으로 특별 찬양까지 하는 기쁨을 누렸다. 진정한 예배는 북녘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교회도 그렇고 사찰도 그렇다. 관광객을 위해 목사와 승려로 위장한 사람들을 배치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남쪽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신자들조차 동원된 사람들로 이해한다. 신은미의 남편도 봉수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 목사님에게 "이 교회 진짜요 가짜요?"라고 물어 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도 우리와 같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지은이는 보고한다.  

 

남북통일은 민족 구성원 다수의 염원이다. 그 방법에 있어 다소의 차이가 날 뿐.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남북 분단은 많은 애국자를 양산했다. 극우도 진보도 모두 자칭 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단을 전제로 한 애국심은 진정한 애국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애국이 진정한 애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애국심은 민족 통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남북통일은 국제적 역학관계까지 흐트러뜨릴 만큼 역동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미‧중‧러‧일 등 강대국들이 염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만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이 우리의 통일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통일은 남북의 동질성을 회복시켜 갈 때 가능한 것이요, 그 동질성은 남북이 서로 호혜의 정신으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대할 때 가능한 것이다. 신은미는 그의 방북기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을 가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이다. 그 대상은 특정해 있지 않다. 누구든 예외 없이 그 대상 안에 들어온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백보 양보해서 북한을 원수들이 사는 나라라고 치자.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신은미는 시종일관 이 정신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유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 신은미는 북한을 그렇게 결론 맺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 온다. 미워하는 사람도 시나브로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북한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생각의 변화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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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근 작품집 지만지 고전선집 513
방인근 지음, 임정연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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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에게 월요일은 조금은 만만한 날이다. 주일 예배에 집중하느라 수고했으니까 쉬어도 되는 날이 월요일이다. 이런 우스개 퀴즈가 있다. '남 쉬는 일요일 날 가장 바쁜 사람은?' 답은 목회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목회자에겐 일 주일 중 쉬는 날이 월요일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적어도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작은 농촌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간 따지지 않고 일이 있으면 나가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농촌 목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런데 요상한 것이, 일이 있는 날도 월요일엔 꾀를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월요일은 주의 종들이 휴식을 취하는 날이니까 덩달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어제(8월 18일)가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것도 거기에 한몫을 했다. 나는 책을 하나 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로 했다. 어찌 보면 목회자에게 독서는 필수적인 목회 도구가 아닌가 싶기도 해서 자기 위안을 삼았다. 설교의 기본 공구로 성경을 든다면 보조 공구로 다양한 책들을 포진시킬 수 있다.

 

며칠 전, 그러니까 광복절 날 나는 서울에 다녀왔다. 몇몇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수유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방인근 목사님도 그날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다. 그 때 방 목사님으로부터 세 권의 책을 선물로 받았다. 방 목사님은 목회뿐 아니라 문명(文名)도 널리 알려진 분이어서 그가 직접 쓴 책을 선물 받은 나의 기쁨이 컸다. 칼럼집 <나는 말하고 싶다>(도서출판 성결광장), 희곡집 <그때 거기 그리고 지금 여기>(도서출판 예샘), 시집 <싱글벙글 하나님>(도서출판 이포)이 내가 받은 선물이다.

 

책은 필요에 따라 읽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좀 말랑말랑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왜 전도도 그렇지 않은가. 순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은.... 나는 세 권 중 쪽수도 가장 적고 읽기에도 쉬운 시집 <싱글벙글 하나님>을 골라잡았다. 시(詩)라는 것은 음미하며 읽으면 많은 시간을 요(要)하는 것이지만 그냥 눈으로 읽고 넘어가면 한 시간 안에도 후딱 해 치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 목사님의 글은 쉬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글쓴이의 의도는 하나일 텐데 읽는 사람에게는 아주 다양하게 수용될 수 있는 글, 방 목사님은 그런 글을 쓰고 있었다. 마치 존 웨슬리의 신학을 여러 갈래에서 각각 자기 식대로 해석하듯이.  

 

제목부터가 그렇다. '싱글벙글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싱글벙글하시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 이 사회 전체가 싱글벙글하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하 수상해 불의가 판을 치고 그것에 비례해 실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태 속에서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했다. 글쓴이의 바람이 담긴 책 제목이리라. 하나님께서 웃음이 헤프셔서 책 제목 앞에 '하나님, 웃음 좀 아끼세요!'라는 주문의 글까지 붙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싱글벙글 웃으시는 세상은 천국에서 뿐 아니라 이승에서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요즘 시국을 볼 때 그렇다.

 

내용과 제목에 어울리게 표지 그림은 '파안대소하시는 예수님'을 넣었다. 엄숙하고 진지한 예수님 그림을 보다가 격식을 초월해서 크게 웃으시는 예수님 그림을 접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연약한 인간의 징표이리라.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웃음을 선물하고 돌아갔다. 그 중 세월호 유가족, 다문화 가정, 쌍용차 해고 노동자, 위안부 할머니들 등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 손을 잡아줌으로써 정신적 지도자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갔다. 나는 그의 늘 웃는 얼굴을 보면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렸다. 왜인지 모르겠다.

 

방인근 목사님의 <싱글벙글 하나님>을 시집이라고 했지만 그의 글들을 볼 때 '시'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어 두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의 특징은 언어의 조탁, 의미의 농축, 해석의 융통성 등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것에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해석의 융통성 문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운문이다. 읽으면 가락이 생성된다. 그런데 꼭 운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문장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와 술어를 기본으로 하고 수식어와 목적어 등이 갖추어진 문장, 즉 산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들이다.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운문보다는 폭이 좁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신앙관이 확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목회일기, 수도일기, 예촌일기가 그것이다. 목회일기는 글쓴이가 오랜 시간 목회하면서 느낀 따뜻한 이야기를, 수도(修道)일기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의 모습을, 예촌(藝村)일기는 목회자의 문학적 향기를 하나로 묶어 놓은 글들이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볼 때, 목회일기가 바로 수도일기이고 또 수도일기가 예촌일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요 순수한 문학까지 삶에 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첫 장을 열면 '아내 송두옥이가 전하는 德談(덕담)'이라는 제목의 글이 등장한다. 학교 다닐 때 위문편지밖에 써 본 일이 없는 사모님에게 책 서문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방 목사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출판할 때 그 방면의 저명인사에게 추천사를 부탁해서 칭찬 일색인 글을 덧붙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글보다 30년 반려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겠다. 목사님의 목회와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더불어 성장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책의 가치와 글쓴이의 인격을 한껏 높여주는 것이 된다. 목회 일념은 자칫 세상과 일정 거리를 두기 쉽다. 신앙을 그만큼 좁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방인근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트인 시야를 엿보고 상쾌함을 느꼈다. 포스트모던으로 요약되는 21세기에서 열린 마음과 트인 눈은 다양한 사람을 영적 정신적으로 지도해야 할 목회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그럼에도 일부 목회자들의 폐쇄적인 언행이 오늘날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어 안타깝다.

 

방 목사님의 따스한 눈이 더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세상을 차별 없이 보려는 그의 마음 때문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중요하고 사람이 소중하지 이 사회의 제도로부터는 자유롭고 싶어 한다. 교파를 따지고 종교를 나누는 것, 이런 것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 등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의 트인 눈은 심지어 교계 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주의 신앙인들이 종북 좌파라고 손가락질하는 '운동권'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집회장을 지나다가 최루탄 파편을 주워오고 민주열사들의 추모식에 참석해서 문익한 목사님이 외치는 '박종철 열사, 이한열사~'란 처절한 외침에 공감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찾아 실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외 지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순수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에서 출발하지만 문학에서 도움 받는 측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수필가고 시인이기도 하고 교계 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문필가이기도 하다. 이 책 <싱글벙글 하나님>에서만 보더라도 많은 문학인이 등장한다. 그것은 국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외국까지 넘나든다. 당장 생각에 남아 있는 문학인만 해도 '난쏘공'의 조세희, '토지'의 박경리, 천상 시인 천상병, '상록수'의 심훈, 장애인 수필가 장영희에 이어 독일의 괴테, 미국의 티즈데일,리차드 바크 등 종횡무진(縱橫無盡)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박람(博覽)을 엿볼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그는 소설 하나 꼭 써 놓고 저 세상으로 가겠다고 다짐한다. '어느 수도자의 지구별에서의 29,200일'이라는 제목까지 정해 놓고 말이다.

 

방인근 목사님은 사유의 자유함을 만끽하며 살아온 분이다. 그렇다고 그의 신앙이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되 세상을 보는 눈은 열려 있어 누구든 만나 대화하고 사랑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전천후 목회자라고나 할까. 그는 신앙에 있어서는 청교도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삶은 '오와 열 맞춰서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의장대의 행렬보다 한 잔 걸친 놈 마냥 자유를 만끽하는 걸음새가 좋다'(92쪽)고 생각하는, 사유(思惟)가 지극히 넉넉한 사람이다. 자유로움으로 묘비명까지 준비해 두고 있다. "한 마리의 작은 새 /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로 / 날아 오르다" 느 9:6에서 따왔을 법한 이 시구가 얼마나 좋았으면 이 책에 다섯 번이나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그의 뚝심이 한 교회(수유리교회)에서 30 년 넘게 성공적인 목회를 하게 했으며, 은퇴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때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철역 접경 지역 좁은 땅에 15층 빌딩을 예배당으로 건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리 재미로 읽는 책이라고 해도 지식 습득의 의미를 상실한다면 책으로서의 가치가 줄어든다. 나는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색다른 지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합해 '뫔'이란 글자를 만든 것(64쪽), '그미'가 'She'의 대용어라는 것(34쪽), 상록수(常綠樹)라는 말이 보통명사로 사용되기 이전 심훈이 소설 '상록수'를 발표함으로써 대중어가 되었다는 것(51쪽), '휘갑을 치다'는 말의 뜻이 다시는 더 말 못하도록 말 막음하다는 뜻이 있다(98쪽)는 것도 내가 몰랐던 것들이다. 책을 읽으면 몇 개의 오탈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출판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싱글벙글 하나님>에는 딱 하나, 이것도 그냥 보아넘겨도 될 오자가 하나 있었다. 밝고 맑다는 뜻의 한자말 '明淨'에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아주 작은 글자로 '명청'이란 토를 달아놓은 것이 그것이다.

 

방인근 목사님의 <싱글벙글 하나님>을 읽으면서 떠나지 않은 생각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지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확장되고 있는 때이다. IT 산업의 발전이 그것에 기여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먼저 성경에 통달하고 그것에 근거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충실히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유의 결정이 글이고 그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은퇴 후에 더 바쁜 사람들이 있다. 그가 쓰고 싶은 소설 제목에 들어갈 숫자 '29,200일'은 80년에 해당한다. 80세까지 이 땅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수를 운위하는 시대가 되었다. 건강하게 글도 쓰고 주님 사랑을 전하면서 아름다운 여생을 보내기를 바란다. 출판된 지는 좀 되었지만(2007년) 구해 읽으면 신앙과 생활 양면에 의외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방인근 저 <싱글벙글 하나님>이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고 있네요. 아마 출판된지 오래 되어 책이 구비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같은 저자의 작품집을 빌려 서평을 올립니다.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인근 저 <싱글벙글 하나님>(도서출판 이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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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 쓰러져도 여덟번 일어난다
김두관 지음 / 출판시대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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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정치인을 두 부류로 구분했다. 정치인과 정치꾼이 그것이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전자는 스테이츠맨(statesman)쯤 될 것이고 후자는 폴리티션(politician)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는 이를 이렇게 구분해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냥 정치인으로 부르면서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면서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정치와 무관하게 자기 영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치인같은 사람'하면 대부분 정색을 하며 무척 싫어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김두관을 우리 풍토에서 정치인으로 부르기가 좀 아깝다는 생각을 해온 터다. 그는 이장 출신으로 민선 군수를 두 번이나 지내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정무특보와 제일야당의 최고위원까지 지낸 사람이다. 정치에 대해 웬만한 사람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를 왜 나는 정치인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정치인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국리민복을 큰 소리를 외쳐 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출세와 영달에 매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자리 앞에는 정의 짓밟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불의한 권력 앞에 줄서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또 그런 자리와 알량한 양명이라도 취할 때면 과거를 까마득히 잊고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김두관은 적어도 그런 부류는 아니다. 오늘(3월 1일) 창원 컨벤션센터 전시장에서 그의 출판기념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좀 망설였다. 먼 길도 길이려니와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행사 참석이 아주 어색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1980년대 중반 사회운동을 함께 한 인연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후 그와 개인적 정분을 나누며 지내온 사이다. 작년 내가 다리 수술로 입원을 했을 때 그는 병실로 고졸한 한국 란을 보내 쾌유를 빌어준 것도 나에게 고마움으로 간직되어 있다. 언론을 통해 그가 금년 6월에 있을 지자제 선거에서 경남도지사에 세 번째 도전할 예정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김해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님과 연락해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고 행사장에 도착하니 큰 건물 주위가 아주 혼잡했다. 비가 축축히 내리는 일기임에도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남해 등 고향에서 단체로 온 몇 대의 관광버스를 빼고는 거의 승용차였다. 승합차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창원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이다. 도청 이전이 확정되고 건설된 도시여서 아주 짜임새가 정연한 도시이다. 이런 도시를 계획도시라고 할 것이다.

그런 도시에 건설된 컨벤션센터여서 규모가 컸다. 넓은 2층 행사장이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몇몇 아는 사람들과의 인사도 그냥 악수만 하고 헤어져야만 할 정도였다. 실내 곳곳에 그의 앞날을 기약하는 펼침막들이 펄럭이는 가운데 행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정치인의 것이 아닌 출판기념회에는 자주 다녔다. 입구에서 방명록에 기록을 하고 봉투에 넣은 출판 기념 책자를 선물로 받고 저자의 인사말을 듣고 간단한 다과를 들며 친교를 나누다가 돌아오는 것이 내가 경험한 출판기념회들이다.

하지만 이번 김두관의 출판기념회는 형식과 내용이 전혀 달랐다. 참석한 사람들의 규모가 벌써 초대형이었고(아마 3천명은 훨씬 넘을 듯), 먹거리라곤 행사장 한 귀퉁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하느라 힘겨워 보이는 커피가 고작이었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출판된 책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출판시대 간)를 정가를 다 받고 판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느 출판기념회에 참석해서는 몇 권씩 더 받아 참석하지 못한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김두관' 하면 젊은 정치인을 연상한다. 그의 생각이 늘 새롭고 정치 아이디어가 싱싱하고 추진력이 진취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도 벌써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중진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행사장에 참석한 면면들을 봐도 그렇고 또 기념식을 영상으로 축하해온 사람들 화환과 축전으로 함께 해준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모두 우리나라를 이끌어왔고 또 일끌어 가는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었다. 김두관의 현 자리를 가늠할 수 있고, 앞날을 예측해 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각계각층'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참석자들은 정말 다양했다. 종교계 인사들만 보아도 개신교 불교 가톨릭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지역도 영남은 말할 것도 없고 호남과 경인지역의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오르내렸다. 내빈을 소개할 때도 행정부 입법부를 대표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개되었고 심지어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사람들과 국회의원 보좌관들까지 소개되었다. 소개하는 데 30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소비되었지만 지역과 계층 그리고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친구를 가지고 있는 김두관의 교유 폭을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김두관이 직접 쓴 책은 아니다. 전문 인터뷰어 김덕문이 그와 묻고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김두관이 직접 쓴 것 이상으로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정확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지방분권에 대한 그의 신념에 가까운 철학이 배어 있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의외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두관은 지방자치에 대해 일가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노무현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된 것을 당시 언론과 정계에서는 의외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지방자치에 대해 갖고 있는 식견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낸 책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용도 천편일률적이어서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나라가 발전하고 살기 좋아지니 뽑아달라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책은 글쓴이의 머리말만 읽어도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간에서 나는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를 정독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 정치가 우리나라 발전을 어떻게 막아 왔으며 막고 있는가를 변화를 갈망하는 눈으로 보는 한 정치인의 미래가 잘 진술되어 있었다. 언론노조 위원장을 지낸 신학림이 그의 절친한 친구라는 것도 나는 처음 알았다. 이 책 말미에 '김두관을 믿는 열 가지 이유'를 40년 친구로서 그가 말하고 있는데, 그는 김두관을 결점이 없는 것이 결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두관을 생각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살아온 인생 역정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진정 국민의 사랑스런 정치 지도자로 생각되는 이유는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 직접 경험한 고난을 뼛속 깊이 체험한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을 경험한 자만이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아는 법이다. 가난을 위하는 체 하는 정치인은 많아도 가난을 정말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내가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김두관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진정 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 사자성어로 하면 '칠전팔기(七顚八起)'란 말이다. 이 말 속에는 굽힘이 없는 의지와 노력의 땀방울이 서려 있다. 또 옳은 길이라면 죽어도 걸어가는 고집이 녹아있는 말이다. '칠전팔기'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링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삶의 여정 속에 대기만성의 꿈을 이룬 대통령이기 때문에 노예 해방 등 미국 역사에 큰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두관이 도백을 거쳐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최고 지도자로 성장해 가기를 바란다. 그가 도지사가 되면 도민을 위해 무언가 달라질 것이며, 그가 이 나라 최고 지도자가 된다면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정치꾼은 많다. 하지만 진정한 정치인은 드물다. 나는 김두관이 국민 전체에 꿈과 희망을 선사할 진정한 정치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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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자녀 비전 투어 바른신앙 시리즈 8
김종희 지음 / 뉴스앤조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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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책들이 있다. 내겐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말랑말랑한 책에 속한다. 첫째 책이 얇을 것, 둘째 읽기 쉬운 글일 것(시나 수필 따위). 서울 다녀오는 기차간에서 손에 잡은 책이 바로 이 두 조건에 충족되는 것이었다.


책 제목도 좀 요상하다. <목사 자녀 비전 투어>. 한자(漢字)에서 나온 한글과 영어에서 나온 한글의 조합, 거기에다 네 개의 단어가 열병식 하듯 서 있는 모양의 제목이다. 도서출판 <뉴스앤조이>에서 펴냈고 지은이는 김종희로 되어 있었다. 김종희라면 지금 교계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 대표가 아닌가.


그가 10명의 십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을 여행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짧지 않은 3주 동안이나. 십대 청소년 10명은 사는 곳도 연령도 다양한데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목사의 자녀라는 것, 틴에이저(Teenager)라는 것도 공통점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특별한 이 여행은 <뉴스앤조이>와 목회멘토링사역원에서 주선한 일이다. 이 두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이 김종희이다. 그러니까 이런 선한 일은 김종희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요 경비를 모았고 또 실제적인 책임자로 아이들을 3주 동안 인솔하고 다녔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애시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천만 원의 경비가 소요되는 비전 투어를 작은 언론사 대표와 두 사람의 스태프가 해 냈다는 것은 아무리 명분 있는 일이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사람이 하는 일은 직간접적으로 겪은 선 경험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김종희 대표가 목회자의 자녀로서 겪어야만 했던 어려웠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선행이 성사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와 함께 미국을 여행한 아이들은 모두 작은 교회 목회자 자녀들이다. 그는 여행기에서 '목회자 자녀 비전투어'를 하게 된 목적을 첫째로 작은 교회에서 힘든 목회를 하는 미자립 교회 목사님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둘째 그런 목회자 아버지 밑에서 준(準) 성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꿈(비전)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10명의 목회자 자녀를 3주 동안 미국을 여행하게 하는 데는 4천 여 만원의 경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대형 교회가 아닌 작은 언론사에서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런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님만 믿고 백전노장 골리앗과 겨뤄보겠다는 어린 다윗의 마음. 그러나 김 대표는 이 일을 거뜬하게 해 냈다. 해 냈을 뿐만 아니라 매 해 이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듯이 그의 다짐대로 이 프로그램이 잘 추진되어 지속적인 결실들이 맺어지길 바란다.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각지를 여행하고 쓴 이 책 <목사 자녀 비전 투어>는 두텁지 않은 책이다. 그것도 문고판 크기로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고도 남는 사이즈다. 그렇다고 이 책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속에는 작은 교회를 잘 아는, 아니 그런 교회의 목회자와 그 자녀들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녹아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1년을 여행하고도 한 편의 기행문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주간을 여행하고도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다. 목적이 분명해서 대의명분이 있고, 거기에 큰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작은 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문고판 183쪽으로 되어 있다. 지은이 김종희 대표의 머리글로 시작해 세 개에서 여섯 개까지의 꼭지를 거느린 여덟 개의 이야기를 시공(時空)을 달리하며 써 내려 갔다. 마지막으로 학생과 부모 소감문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붙였다. 지은이의 배려하는 마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UCLA에서 함께 한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과의 만남, 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을 품고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 그랜드캐니언, 인디언 박물관, 마틴 루터 킹 기념관, CNN과 코카콜라 체험관 등 그림과 영상으로만 보아온 곳들을 자유의 마음으로 구경한 아이들의 경탄을 글쓴이는 어떤 때는 좀 과장 되게 또 다른 때는 다소 압축해서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런 멋있는 광경들을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며 그리고 있는 눈이 더욱 따사롭다.


나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친근하게 읽혀질 책이다. 특히 목회자와 그 자녀들이 읽으면 생각보다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든 목회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와 다른 상황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마음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기행문을 읽고 이것보다 큰 유익이 달리 있겠는가.


목회자 자녀를 PK라고 한다. Paster's Kid의 준말이다. 목회자 자녀는 예외 없이 태어나서부터 준 성직자의 삶이 강요된다. 아버지가 목회자란 이유로 거룩하고 경건한 삶, 다른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크지 않은 이런 삶은 솔직히 아이들에게 족쇄가 될 수 있다.


이 점이 이 책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아무에게나 쉽게 털어 놓을 수 없는 감춰두었던 마음을 여행에 참여한 10 명의 아이들은 3주 동안 수다 떨며 해소했다는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으로. 그리고 자유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국 여행을 '힐링 여행'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선한 손길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어려운 작은 교회 목회자 자녀들을 정성으로 섬긴 현지 교회와 교민들로 인해서이다. 사랑과 인심이 메말라 가는 세태라고들 하고, 세상이 자기밖에 모르는 무한경쟁으로 치닫는다고 한탄들을 하지만 약자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이다.

 

농촌의 작은 교회 목회자로서, 세 아이를 둔 아빠로서 읽고 공감하는바 적지 않았다. 큰일을 해낸 그리고 앞으로도 할 지은이 김종희 대표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잘 추진되어 혼탁한 교계 나아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를 바란다. 먼저 읽은 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또 사랑의 마음으로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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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찬믿음 1
찰스 M.쉘돈 외 지음 / 예찬사 / 198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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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추락 속에 손에 잡은 책 한 권

 

기독교의 위상이 날로 추락하고 있다. 누굴 탓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경각심을 갖고 거듭남의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교계에 희망이 없다. 이럴 즈음에 내가 이 책을 손에 잡은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사회복음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이었다. 미국의 월터 라우센부시(Walter Rauschenbush)를 피해갈 수 없어 그에 대한 글을 읽었다. 라우센부시가 영향 받은 사람 중 찰스 M. 쉘던(Charles M. Sheldon)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쉘던은 미국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목사이자 저술가로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조항래 역, 도서출판 예찬사, *이 책 제목이 눈에 거슬린다. 아무리 다중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책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을 인성적 측면만 생각하고 정한 제목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뒤로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로 표기하겠다. 실제로 10 종이 넘는 한국어 번역본 중 대부분이 이렇게 책 제목을 달았다)는 소설에 속하는 글이다. 원 제목은 In His Steps이고 부제(副題)가 'What Would Jesus Do?'이다. 그러니까 부제를 한글 역(譯)의 책명으로 삼은 것이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보다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가 더 설득력 있는 제목이라 생각했을 법하다.

책의 발단 부분에 나오지만 주인공 헨리 맥스웰(Henry Maxwell) 목사가 주일 예배 때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본문으로 '주의 발자취를 따라서'란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It was to this that God called you, for christ himself suffered for you and left you an example, so that you would follow in his steps."). 이 본문이 쉘던의 소설 In His Steps에서 시종일관(始終一貫) 긴장 속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회의 가치 기준이 혼란스럽고 윤리 도덕이 추락할수록 사람들은 절대적인 잣대를 요구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는 설의법적 표현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성행했던 WWSD(What Would Jesus Do?) 물결은 이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

 

오늘날도 이 소설을 쓸 때와 비슷한 가치 혼란의 시대이다. 절대 진리가 발붙일 여지가 없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곧 진리라는 전도(顚倒)된 가치관이 횡행하고 있는 사회아다. 따라서 찰스 쉘던의 소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가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그리스도인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보다는 안락하고 부담 없는 세속적 신앙생활을 원하는 추세이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쪽을 행해 달려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한낱 자기 필요에 의해 달았다가 떼어내는 장식물로 전락하고 말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이 소설은 신앙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체코의 헨리크 시엔크비치(Henryk Adam Alexander Pius Sienkiewicz)가 쓴 Quo Vadis와 함께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가 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보아도 좋다. 또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강조하는 책으로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The Cost of Discipleship('나를 따르라'는 제목으로 출판)과 함께 이 책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어떤 비평가는 본회퍼의 책은 식자층에게 그리고 쉘던의 이 소설은 다중(多衆)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In His Steps의 시대 배경은 19세기 중반이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여파가 미국에도 몰아닥쳐 부(富)가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고 있었다. 빈곤층이 양산되어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만 했다. 공간적 배경은 레이몬드(Raymond )이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의 삼포(三浦)처럼,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공간적 무대 무진(霧津)처럼 가상의 도시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예수님 닮기(Imitation) 운동이 사람들을 통해 전개된다.

 

상류층 신앙인들의 기득권 내려놓기

 

이 책은 전부 31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다양한 캐릭터의 사람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레이몬드 제일교회 담임 헨리 맥스웰 목사, 건전한 기독교 언론을 추구하는 레이몬드 데일리 뉴스(Raymond Daily News) 사장 에드워드 노만(Edward Norman), 기업의 부정을 고발하며 개혁하고 한 철도회사 간부 알렉산더 파워즈(Alexander Powers), 미성(美聲)의 성악가이며 자신의 재능으로 빈민 선교 집회 찬양 사역에 헌신하는 레이첼 윈슬로우(Rachel Winslow), 많은 재산의 상속녀이며 그 재산을 사회복지 사업에 쏟아 붓는 버지니아 페이지(Virginia Page), 링컨 대학 학장이며 이후 레이몬드 시의 금주운동을 주도하는 도날드 매쉬(Donald Mash).

 

면면을 살펴 볼 때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살아갈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도 거룩한 주일 날, 이들이 출석하는 경건해야 할 예배당에서…. 그 이름은 잭 매닝(Jack Manning), 이 사람은 인쇄공이었는데 공장 자동화의 물결이 밀려오는 과정에서 실직을 당한 노동자이다. 즉 자동식자기(自動植字機, linotype)의 도입으로 사람의 손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구직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사이 아내는 숨을 거두었고(영양실조에 의해였을 것) 아이는 동료 인쇄공의 집에 위탁해 놓고 있었다.

 

그 실직자가 예배 시간에 강대상 쪽으로 나와서 던진 말은 지금까지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해 오던 제일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고 말았다. 마치 바리새인들을 나무라던 예수님 같았다고나 할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아까 여러분은 '주와 함께 가려네'라고 찬송을 부르셨는데 과연 그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의 행적은,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스스로 고난을 당하고 자신을 부정하면서 길 잃은 자와 고통 받는 자를 구원하려고 노력한 것이었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 제 아내가 뉴욕 시의 한 셋방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어린 딸을 함께 데려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 여러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21쪽).

 

산업혁명의 여파 속에 실직한 인쇄공의 죽음

 

믿는 자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Following In His Steps)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o?)는 앞의 말을 반복 강조한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인쇄공 실직자의 장례를 치르고 맥스웰 목사는 획기적인 선언을 한다. 1년간 온전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로. 교인들의 호응도 커 약 50 여 명이 이 운동에 동참해서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에 헌신하기로 서약한다. 위에 예거한 사람들이 그 운동의 주축들이다.

 

데일리 뉴스 사장 에드워드 노만은 주일에도 발행하던 신문을 쉬기로 하고 술과 담배 광고를 금지하며 흥미 본위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철도회사 간부인 알렉산더 파워즈는 자기 회사가 연방정부의 주간통상법(州間通商法)을 조직적으로 어기는 것을 고발함으로써 해직된다. 뛰어난 음성으로 고액의 연봉 제의를 뿌리친 레이첼 윈슬로우는 렉탱글 빈민 마을에 들어가 찬양으로 봉사한다. 고액 재산의 상속녀인 버지니아 페이지는 자신의 재산을 기독교 사회복지 사업에 쾌척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정신으로 신문을 발행해 적자 경영에 빠진 데일리 뉴스에 거금을 지원한다. 지금까지 대학 교수로 자족하던 도날드 매쉬 학장도 상아탑을 벗어나 지역의 금주 운동에 뛰어 들어 지도력을 발휘한다. 이 사람들이 내걸고 실천한 슬로건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였다.

 

소설은 픽션(fiction)의 영역에 속한다. 즉 허구(虛構)이다. 그러나 있을 법한 허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찰스 M. 쉘던의 In His Step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30개 언어로 3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면서도 신학자들과 문학평론가들이 도외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허구와 공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작가 찰스 쉘던은 복음을 보다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소설의 방식을 택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재평가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있다. 현실 안주형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교계 상황을 직시할 때 이런 형식의 글로 사람들을 예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다면 비판이 아니라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 될 것이다.

 

재조명되어야 할 찰스 M. 쉘던의 소설들

 

쉘던의 In His Steps는 17세기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Pilgrim Progress)>과도 비교된다. 존 번연도 침례교 목사이자 작가였다. <천로역정>은 우화소설로 역대 신앙서적 중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졌다는 점도 그렇다. 찰스 쉘던은 미국 회중교회 목사였고, 교회의 대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이 소설 외에도 이것의 속편에 해당하는 Jesus is Here 등 여러 권의 소설을 출판했다. 모두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적 삶을 강조한 것들이다. 쉘던은 In His Steps를 쓰기 전 직접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여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말과 행동과 믿음의 불일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신자유주의의 풍랑 속에 세상적 윤리와 질서가 교회에 그대로 이식되어 예수님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맘몬주의(Mammonism), 승자독식주의, 인본주의 등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윤리 의식조차도 희미해져 무딜 대로 무디어진 상태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 모두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우리의 신앙이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저술가인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을 회색 지대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경고의 말이다.

 

찰스 M. 쉘던은 이 소설의 대미를 이 땅에 이루어질 이상적 사회 건설과 함께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환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동안 등장했던 인물들을 총 출동시켜 맥스웰 목사가 바라고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독자들이 원하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해피 엔딩이다. 교회의 문간마다 성도들의 가슴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표어가 붙어 있는 것 같다. 이 땅에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한 마디 덧붙일 것, '고통을 다른 이에게 대신 받게 하려는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사업가든 시민이든 간에 반드시 예수님에게로 가는 희생의 행로를 따라 그 분의 발자취를 밟아가야 할 것입니다. 맥스웰 목사가 마지막 설교에서 강조한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자본주의의 폐악 속에서 벗어나야 할 그리스도인

 

얼마간의 헌금과 몇 시간의 봉사 활동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으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득권을 내 놓고 가진 것을 솔선해서 나누어야 한다. 초대교회처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행 2:44-46)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초대 교회 정신이 우리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는 길이다. 쉘던이 이 소설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상류층 사람들이 자기 것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하라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 수 없다. 이 소설의 에드워드 감독(Bishop Edward)과 나사렛 에비뉴 교회의 칼빈 브루스(Calvin Bruce) 목사처럼 자신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사역한 교회를 내려놓고 주님이 걸어가신 고통의 길을 기꺼이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쉬운 일일까. 우리와 같은 연고주의가 뿌리 깊은 교계의 상황에서.

 

교계가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 있다. 세속적 삶에 신앙을 편승시켜 나만을 위한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소설에서 시종 주창하고 있듯이 거룩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선택할 일만 남았다. 교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서구 기독교의 과거를 그대로 닮아가는 모습이다. 지금 유럽의 기독교는 어떤 상태인가. 외형만 덩그러니 남고 텅텅 빈 예배당,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 이 시간부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물음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WWJD 운동이 이 땅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하는데 쉘던의 이 소설이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일독을 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n His Steps의 마지막 '단어'로 글을 맺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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