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집 - 해외우리어문학연구총서 83
김하명 / 한국문화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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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서양의 것이 의식주를 비롯해서 문화생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가끔 고유한 우리 것을 만날 때면 향수에 젖곤 한다. 시골 길을 지나다가 만난 6,70년대식 다방을 발견하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향토 집에 걸려있는 그을린 솥단지를 보면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며칠 전(7월 22일) 시조집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저자가 직접 보낸 책이다. 반가운 마음에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시조는 우리 고유의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그 역사로 따지자면 700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다. 고려 중엽에 시작된 시절가조는 위력적인 서양 문학의 조류 속에서도 아직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경이롭게까지 생각되는 이 장르를 연면히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수와의 동행>이란 시조집을 낸 박영재는 이름 없는 시인다. 무명에 가까에 문학인이다. 하지만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고희(古稀)를 넘어 문단에 등용한 시인이다. ‘인생칠십(人生七十) 고래희(古來稀)’란 두보(杜甫)의 시구가 말해주듯 70이 넘으면 인생을 정리해야 할 연치이다. 자연 수명이 연장된 현대라고 해도 칠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란 극히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영천 박영재 시인은 70이 넘어 시를 공부해서 몇 년 전(2008년) <반석 위의 백합향>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데 이어 이번에 팔순 기념으로 <산수와의 동행>이라는 시조집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대단한 노익장이다. 앞의 시집과 시조집은 그의 끊임없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결정물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 꾸준히 연마한 그의 시들에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산수와 동행>이라는 시조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의 주류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대한 사랑과 찬양의 글들로 묶여져 있다. 시인의 고향인 강원도의 자연을 노래하고 그가 직간접적으로 여행한 장소의 여정을 소개하는가 하면, 이 아름다운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반신불수가 된 아픔을 토로한 시조도 있다. 그의 시조들을 읽으면서 자연이 그와 결합하면 훌륭한 시조가 되고, 사람이 자연과 조화하면 아름다운 의미를 낳는 공간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 자연을 노래한 사람들은 많다. 자연이 좋은 시적 소재가 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영재 시인이 <산수와 동행>에서 자연만 노래하고 그쳤다면 나는 많은 시집 가운데 하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조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있다. 문학의 기능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상존한다. 특히 현실 사회와의 관계 문제에서 그렇다. 어떤 이들은 문학은 문학 자체로 그쳐야 한다며 사회성이 깃든 시를 배격하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문학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나는 박영재 시인의 <산수와 동행>을 읽으면서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한 전형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의 문학관이 현실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올바른 역사적 현실 인식이 시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고 사랑을 얘기하며 인간을 읊조리더라도 사람을 규제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박영재 시인은 80을 넘어선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이다.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눈에 띄는 현상 하나가 있다. 인생을 마감해야 할 나이에 다다른 노인들의 이른바 극우 성향 시위이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과 '국민행동본부'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등 단체들의 분별없는 시위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 나라에는 진정한 어버이와 진정한 국민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묻게 된다. 침묵하는 다수 속에 분명 가스통을 매단 채 시민단체 건물을 돌진하며 빨갱이들은 북한 김정일에게도 가라며 막말을 퍼붓는 노인들과는 다른 대한민국 어버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영천 박영재 시인이 그런 분 중의 한 사람임을 그의 시조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연과 역사를 소재를 시조를 쓰면서도 분단에 대한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있고('恨') 또 30여 년 전 5.18광주 민주항쟁의 ‘무차별 살육광란’을 노 시인으로서 신에게 항의하고 있다('5월의 노래'). 뿐만 아니라 작년 초에 일어난 용산 철거민들의 정당한 주의주장을 공권력으로 무차별 진압한 사건을 규탄하고 있고('기축년 해넘이'), 서민 출신으로 서민 중심의 정치를 하다가 공고한 지배집단으로부터 사지로 내몰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직 대통령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날개 접은 부엉새').

이런 현실을 읽는 시적 자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포스트 모던의 문화 흐름은 시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권위와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까지 해체해가며 시를 만들어가는 젊은 시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것(시조)을 가지고 자연과 사랑과 인간을 주제로 노래하는 가운데 올바른 현실 인식이 투영되어 있는 시조를 박 시인은 소명을 갖고 읊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연로하지만 결코 연로하지 않은 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즐겁다. 박 시인의 시조를 해설하면서 원용우 박사는 '젊은 시를 쓰는 영천 시인의 시적 변용'이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데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을 글자로 표현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 몫으로만 생각되어져 왔다. 하지만 영천 박영재 시인은 이런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있다. 시는 부단한 자기 노력의 산물이고 사랑과 관심의 결정체인데,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진실하게 임할 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 확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박 시인이 상재한 시집 <반석 위의 백합향>(2008년, 조선문학사)과 시조집 <산수와 동행>(2010년, 이지출판)은 그 좋은 보기이다. 뜻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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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2010-07-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영재 시인이 최근 쓴 시조들을 모아 엮은 시조집 <산수와 동행>(이지출판)이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아 다른 책인 <시조집>을 빌어 박 시인의 시조집에 대한 서평을 올립니다. 알라딘에서는 박 시인의 <산수와 동행>을 확보해서 판매도서 목록에 올려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