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 두란노 목회와신학 총서 9
손동식 지음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손동식 교수는 신진 학자이다. 그만큼 필력이 살아 있고 의욕이 넘쳐난다. 그의 첫 저서가 될 것이다. 믿음의 책들로 유명한 '두란노 아카데미'에서 출판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목회자면 누구나 '두란노 아카데미'를 통해서 책 한 권 쯤은 출판하고 싶어한다. 
 

책 제목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의 설교 이야기]이다. 왜 하필 왕자(王子)란 명칭을 붙였을까? 10여 년 전, 미국의 한 설교 전문지(Preaching)에서 지난 1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에서 스펄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설교의 황제, 설교의 대가 아니면 설교의 황태자란 호칭을 붙여주지 않았는가.

 책을 읽어 가다가 손 교수가 붙인 명칭에서의 '왕자'는 '프린스(prince)'가 아닌 '왕자(王者)'임을 알 수 있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명성을 알고 있는 만큼 내용도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에 대한 질문에 막히기 십상이다. 그의 명성에 비례해서 그를 깊이 있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럴 즈음에 손동식 교수가 이 책을 상재함으로써 스펄전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스펄전이 설교의 왕자라면 오늘 목회를 하는 우리에게 설교에 대해서 많은 자양분까지 공급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까지 설교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공부했다. 하지만 대부분 원론적인 얘기여서 그렇고 그런 책으로 내겐 남아 있다. 그리고 신학 이론서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독심(讀心)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손 교수의 이번 책은 이런 흐름을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가 들어간다. 이야기의 특징은 재미있어야 하고 또 쉬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그랬다. 나는 기존의 설교학에서 느꼈던 부담을 그의 책을 독파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정말 재미있게 그리고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수필집이나 소설책이라도 이것만큼 쉽게 읽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다. 저자의 넓고 깊은 지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손 교수는 영국에서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의 설교를 비교연구해서 박사(Ph. D.)를 취득한 사람이다. 그만큼 정확한 문헌에다 현장 답사, 관련 분야의 영역까지 두루 섭렵하고 이 책을 썼다. 이것이 설교에 도움을 주려고 쓴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설교뿐만 아니라 목회 전반에 걸쳐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말미에 부록으로 '주제에 따른 스펄전 설교의 실제'가 붙어 있다. 1부 '설교의 왕자, 스펄전'은 스펄전에 대한 약전(略傳)에 해당된다. 그의 설교를 공부하기 전 인간 스펄전을 알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가끔 글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날 때 당황한다. 가령 문학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작품과 동떨어진 생활을 할 때 그의 작품까지 버리고 싶어진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니 어느 영역보다 언(言)과 행(行)의 일치가 요구되고 설교와 삶의 등치(等値)가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 1부는 스펄전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는 진실한 복음주의자였지만 목회를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고 사회 곳곳으로 확장해서 사역한 것에서도 그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보육원과 양로원을 운영하고 빈민학교를 설립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교육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쩌면 한 세기 반 전에 활동했던 그는 목회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보수 신학자든 진보 신학자든 스펄전을 선입견 없이 소개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의 목회와 설교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2부는 스펄전의 설교가 회중에게 왜 설득력 있게 다가갔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말씀 중심에 두고 회중을 염두에 둔 전달 방법을 구사한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스펄전은 설교 준비는 철저히 하되 전달은 즉석에서 현장감 넘치게 함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사라지게 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가지 자기 자신의 설교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그림 언어(Picture Language), 센스 어필(Sense Appeal), 드라마티즘(Dramatism)울 들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3부에서는 설교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소명의식을 갖고 말씀은 전하되 사람을 의식하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기도이다. 설교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중보기도의 필요성도 역설하고 있다. 설교 본문 선택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순전한 복음에 기반할 때 순전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4부에서는 설교자와 성령님과의 관계성을 논하고 있다. 설교에서 성령의 도움심이 왜 필요한가를 역설하고 있다. 성령은 설교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유를 성령이 지식 지혜의 영이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령은 설교의 전부이기 때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펄전이 살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가 가신지 한 세기가 지났건만 죽은 그의 설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왜인가?

손 교수는 사상은 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은 상대적 진리가 아닌 절대적 진리이다. 그 진리의 말씀에 이탈함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제도 살아 있었고 오늘도 살아 있으며 내일도 살아 있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설교의 목표를 회중의 회심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설교의 핵심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주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책 뒤에 붙어 있는 부록은 보통 군더더기로 여기기 쉽다. 책의 부피를 일정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 붙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부록은 그런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손 교수가 스펄전의 설교에 대해 기술한 것들의 좋은 예가 부록으로 첨부된 설교들이기 때문이다. 설교문 앞에 설명해 놓은 저자의 글이 한 세기 전의 설교를 오늘날의 설교처럼 읽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이 설교문들도 기도 끝에 엄선한 것들인 것 같다. 오늘 날 목회에 필요한 덕목들-사역, 섬김, 소명, 겸손과 교만, 가정 , 성령-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다.

세속화의 물결이 전방위적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 세기 반 전 스펄전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대중 추수적인, 즉 대중의 구미에 맞춘 설교를 경계하고 있다. 대중은 늘 편하고 쉽고 이기적 유익성을 좇게 되어 있다. 고정된 율법도 타파해야 할 일이지만 말씀에 어긋난 세속화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스펄전에 대한 책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의 일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책의 장점, 아니 서술상의 장점을 한 가지 첨언하고 싶다. 오늘날을 시각화의 시대라도 한다.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간단하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시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쓴 것 같다. 대표적으로 손 교수는 설명에 열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 이것은 글의 핵심을 요약정리해서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서비스 기법이다. 책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것도 그 방면을 두루 알고 있는 전공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필법일 것이다.

스펄전은 철저하리만큼 강해 설교를 주장한 사람이고 또 현장에 적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설교문을 보면 본문은 대부분 말씀 한 절이고 길어야 두 절이다. 강해 설교는 본문이 많아야 전할 내용이 풍성해진다. 그런데 단 한 절에서 우리 책 20 쪽 분량의 설교가 나올 수 있다니. 손 교수는 그 비결을 우리에게 겸손하게 알려주고 있다. 본문은 단 한 절을 선택했을지라도 전후 문맥에 대한 성경 읽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좋은 정보이고 시사임이 분명하다.

손 교수는 젊은 학자이다. 그의 책은 그래서 톡톡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표현력도 아주 풍요롭다. 글쓰기에 탄탄한 기반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책을 쉽게 손에 잡게 만들고 또 짧은 시간에 독파하게 만든다. 한 가지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스펄전의 전달법'에서 '그림 언어'를 설명하는 부분(32쪽)인데, '공감각적 표현'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복합 감각적 표현과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공감각적 표현은 반드시 감정의 전이 현상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등에서 보는 것처럼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앞의 예에서는 둘 다 시각에서 청각으로)전이될 때 공감각(synaesthetic)이라고 한다. 한 문장에 감각이 두 개 이상 병렬되어 있고 감정의 전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냥 복합 감각적 표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설교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과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한 사람의 젊은 학자를 가지게 되었다. 손 교수가 학위를 받고 귀국한지가 오래지 않다.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연구와 발표를 거듭해서 이렇게 중후한 책을 출간한 것은 그의 기쁨을 넘어 우리의 기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늘 해도 부담으로 작용하는 설교, 그 부담을 줄여 주는 데 손 교수의 역할이 기대된다.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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