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 어두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원자탄, 목회 믿음의 거장 13
김학중 지음 / 넥서스CROSS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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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두운 세상이다. 사위(四圍)가 깜깜하다. 정치도 경제도 앞이 안 보인다. 문화라고 예외인가. 그래도 우린 절망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선진들에게 길을 묻는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삶에서 어두운 터널을 뚫고 간 방법을 배운다. 이 책을 통해서… .

 

문고판보다 조금 큰 책(4×6판 변형), 쪽수도 150밖에 안 되니 결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손양원을 통해 사랑과 화해, 그리고 진리가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보인다.

 

이 책 <손양원>의 저자는 김학중 목사이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386세대 목회자이니 아직도 젊다. 안산 꿈의교회 담임으로 적지 않은 규모의 목회를 하면서 이런 묵직한 책까지 저술하는 그의 저력이 부럽다.

 

그는 '믿음의 거장 시리즈'란 주제로 20 명의 인물을 선정 단계적으로 책을 발간하고 있다.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거장들의 전기(傳記)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이다. <손양원>은 그 시리즈 13번 째 책. 이 책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많이 공급한다.

 

책은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책 앞 머리말과 생애 개관, 책 뒤 생애 연보와 참고 문헌이 덧붙어 있다. 앙증맞은 예쁜 소책자에 담을 건 다 담고 있는 셈이다. 형식(예쁜 외모)에 붙들려 책을 손에 잡긴 오래간만이다. 이 책 각 장의 제목은 이렇다.

 

1장 / 올곧은 믿음의 씨앗을 뿌리다. 2장 / 이 땅에서의 사명을 깨닫다. 3장 / 믿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품다. 4장 /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5장 / 오직 믿음으로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

 

각 장 제목만으로도 손양원 목사의 삶 전체가 눈에 잡힌다. 손양원 목사는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 만 5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것에서, 말씀에 충실한 신앙인에 더해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손양원을 다시 읽는 기쁨이 적지 않다. 이기주의가 극도로 팽배하고 사회의 윤리 도덕이 형편없이 추락한 세태에 손양원을 책으로 만나는 일은 소중하다. 그의 삶을 통해 사회를 둘러 볼 수 있고,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인 나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양원이 실천한 '원수사랑'이 삶의 진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학중이 쓴 이 <손양원>은 각주를 생략해서 그렇지 중후한 연구 도서에 속한다고 봐도 좋다. 연구 도서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하기 쉬운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손에 잡으면 자연스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쉽게 씌어졌다는 것, 이 책의 특장(特長)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평신도 신학생 목회자 등 누구에게나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으로 소개하고 있다. 딱 맞다. 글을 쉽게 썼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인물 연구는 역사성을 갖게 마련이고 한자(漢字)를 써야 할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고유명사 몇 곳 이외엔 한자 사용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쉬운 접근을 배려한 결과일 것이다.

 

손양원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정보도 들어 있다. 가령 손양원의 창씨개명 대촌양원(大村良源)은 일제가 일방적으로 정한 호칭이었다는 것(87쪽), 손양원 목사가 1944년 9월 9일 교우들에게 쓴 편지는 유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인데, 이 책에 소개되어 있어 반가웠다(102쪽).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런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 좋겠다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김학중의 <손양원>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정의가 상실되고 진리가 왜곡되어 횡행하는 때여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손양원을 읽음으로 우리 마음이 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

 

오탈자에 띄어쓰기도 거의 완벽에 가깝다. 저자와 출판사가 같이 신경을 많이 썼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몇 곳은 꼭 지적해야 하겠다. 책이 판을 거듭해 스테디셀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손영준(11쪽)은 손연준(孫燕俊)으로(손양원의 옛이름이 아니라 호적명임), 김은주(19쪽)는 김은수(金恩洙)로(손양원의 모친) 고쳐야 한다. 그리고 경남성경학교(52쪽)는 경남성경학원으로, 범태고(90쪽)는 범냇골로, 손양원의 목사 안수 연월 1946년 3월(111쪽)은 1946년 2월로 수정해야 할 것들이다.

 

손양원 목사는 세계 기독교사에 내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진이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도 '옥중 성자'로 불리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은 그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 불가하다. 이것을 저자 김학중은 손양원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의 승리라고 단언한다.

 

맞다. 손양원도 위대하지만 그의 가족도 함께 위대하다. 책을 읽으면 그 이유가 나온다. 손양원 목사가 남긴 정신을 이어받음으로써 그 위대함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시라. 이것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의 일독을 권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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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의 옥중서신
임희국.이치만.최상도 편역.해제 / 넥서스CROSS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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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명성에 비해 미진한 손양원 연구
 
명성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경우가 있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는 전자의 예가 되지 않나 싶다.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손양원 목사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훨씬 미진하다.
 
그의 출생 날짜에서부터 각종 학교 입학과 졸업 날짜 그리고 목회 관련 일시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다음과 같은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에 대한 전기(傳記)가 먼저 나오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행 되었다는 것.
 
전기는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 칭찬 일변도)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실성(事實性)이 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손양원의 경우엔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전기가 나왔다. 안용준이 쓴 <사랑의 원자탄>은 그의 순교 1년 전인 1949년에 1부가 출간되었다. 1952년에 2부가, 그리고 1980년에 1부와 2부를 합해 한 권으로 출판했다.
 
이 책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국내뿐 아니라 수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읽혀졌으며 영화로도 제작 방영되어 신앙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그들의 연구에서 <사랑의 원자탄>에 의존한 바가 컸다.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전기물에 의존해 인물을 연구할 때의 한계는 많이 지적되어 왔다.
 
손양원을 소개한 몇 가지 도서들
 
이런 손양원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방면에서 여러 사람들이 노력해 왔다. 손양원 연구의 기본 자료는 그가 쓴 일기, 옥중 서신, 설교문 그리고 체형조서(경찰 진술, 검찰 신문 조서)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손 목사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이런 자료의 실체적 접근으로 손양원 연구가 더욱 진전되기를 바란다.
 
손 목사의 친구 안용준에 의해 오래 전 출판된 <산돌 손양원목사 설교집(상․하)>(1962년)이후 여러 권의 관련 책자가 출판되었다. 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가 엮은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2002, 보이스사)를 비롯해 작년 10월에 출판된 이만열 엮음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201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이르기까지의 책들은 각 부분을 선별해서 소개하는 성격이었다.
 
이번에 (사)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이사장 이성희 목사)에서 간행한 <손양원의 옥중서신>은 손 목사의 글 중 편지를 전부 모아 소개했다. 손 목사가 주로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총 93편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2012년 자료 보관소인 손양원순교기념관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20편이 훼손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많은 노력 끝에 출판된 <손양원의 옥중서신>
 
그래서 현재 73편만 남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글자가 바래져 판독 불가의 우려가 있었다. 이번에 이것을 디지털 작업으로 사진을 찍어 싣고 현대어로 풀어서 붙인 것이 <손양원의 옥중서신>이다. 권두 해제를 포함해서 1부가 144쪽, 2부 260쪽으로 모두 404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1941년 9월부터 1945년 7월까지, 그러니까 손양원이 광주형무소에 있을 때 그리고 종신형과도 같은 장기 구금을 언도 받고 경성구금소와 청주보호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주고받은 서신들이다. 손양원이 아내 정양순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은 옥중서신이 아니지만 포함시켰다.
 
서신의 형태는 우편엽서와 봉함엽서 그리고 봉함편지이다. 형태에 따라서 내용의 다과(多寡)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짧은 내용은 우편엽서를 그리고 긴 내용은 봉함편지를 사용했다. 봉함엽서와 봉함편지는 검열에 걸려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편집 순서는 작성 일자, 소인 일자, 수신 날짜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 1부는 편지를 현대어로 고쳐 누구나 읽기 쉽도록 했고, 2부는 이것을 디지털 작업으로 사진을 찍어 실었다. 또 그 옆에 원문을 활자화해서 함께 실었다. 해제자는 1부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2부는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둘 다 일반인과 연구자들이 교차해서 읽으면 또 다른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이 편지에 송수신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손양원을 비롯해서 모두 19명이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교회 신자들과 주고받는 서신 속에서 손양원의 인간됨과 신앙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옥에 있으면서 부모님께 갖는 효성의 마음, 지아비의 역할을 못하는 데서 아내에게 갖게 되는 미안함, 자식들에겐 자상한 아버지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문장 하나하나에 그대로 서려 있다.
 
시대의 참 스승 손양원 목사
 
그것뿐 아니라 한 교회의 담임 목사로써 옥중에 갇혀 있는 자신으로 인해 성도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영적 손실을 마음 아파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다짐을 아울러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손 목사는 6.25 전쟁 때 주위의 간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피난을 가지 않고 애양원의 한센인 성도들과 함께 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승다운 스승이 드문 시대, 목자다운 목자가 귀한 시대에 손양원 목사가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서 갖게 되는 언행이 불일치, 믿음과 실천이 따로 작동하는 모습이 일반화된 때문이 아닐까. 우리 목회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신행일치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손양원 목사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것도 신행일치의 결과이다. 독립운동가 손양원과 믿음의 보수자 손양원, 둘 가운데 후자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족 문제엔 타협의 여지가 있었지만 신앙 문제엔 결코 타협하지 않은 데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본 책에 실려 있는 손양원의 편지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 참 목자의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 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은 편지 자료를 모아 놓은 책이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원문을 현대어로 옮긴 것도 편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한 작업이어서 오역(誤譯)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편역에 참가한 임희국 이치만 최상도 교수는 손양원 연구 권위자들로서 이 방면에 무게 있는 성과물들을 생산해 온 사람들이다.
 
권두 해제를 중심으로 제기하는 몇 가지 지적 사항
 
어려운 작업을 잘 감당한 세 사람의 연구자들을 치하하면서 권두 해제를 중심으로 몇 가지 지적하는 것도 서평자의 몫이겠다. 이것은 책의 가치를 낮춘다기보다 내용을 보완하여 튼실하게 하며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자료집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평가의 여지가 넓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먼저, 손양원의 이름에 대한 것이다. 본명을 연준(燕俊)이라고 한 것은 현재 쓰고 있는 이름을 양원(良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준과 양원 두 개의 이름은 본명과 현재 명의 관계가 아니라 연준은 호적상의 이름이고 양원은 족보상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두 번째, 손양원의 생년월일을 과연 1902년 7월 7일로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손양원은 호적에 1902년 6월 3일 출생으로 되어 있다. 6월 3일은 음력이고 그 해 이날의 양력 날짜는 7월 7일이다. 지금까지 써 오던 6월 3일을 본인의 이력서 한 장(권두 해제 앞에 등재)에 의해 양력(7월 7일)으로 바뀐다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칠원공립보통학교 재학 기간을 1914년에서 1919년으로 적고 있다. 재학 기간이 6년인 셈인데, 손양원이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학제는 4년제였다. <칠원초등학교 100년사>에 1919년 졸업생 명단에 손양원(호적명 손연준으로 되어 있음)이 있다. 졸업으로부터 6년 전이 되는 입학 연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넷째, 칠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 해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그 학교의 정식 명칭은 '사립중동학교'였다. 이 학교 중등과에 입학해서 1년을 수학하다가 아버지 손종일의 옥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내려 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학교 명칭 등 고유명사에 대한 적확한 기록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책을 통해 얻은 의외의 소득
 
이 책의 서신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대 밖 수확이다. 장남 동인이 광주에서 '성경학원'을 다니다가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 두었다는 것(29쪽 주1.), 또 동인이 부산 범일정 소재 통 만드는 공장(富士工場, 주인 박신출 집사)에 다니기 전 잠시 해운대 '백남주' 장로가 운영하던 '백일상점'에서 일 했다는 것(32쪽), 여기서 광주 성경학원 수학과 백일상점의 주인 장로의 이름이 백남주라는 것은 내게 새로운 정보가 된다.
 
또 손양원 목사의 처남이 동경대학을 다녔다는 것(64쪽)도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다. 당시 함안 대산면에서 동경대학에 유학 갈 정도면 실력도 실력이겠거니와 가세(家勢)도 탄탄하지 않았을까 싶다. 할아버지(손종일 장로)가 생명보험금을 얼마나 탈 수 있을지를 언급한 데서 가난 속에서도 최소한의 문화생활(생명보험 가입)을 했다는 것(137쪽)을 알 수 있다.
 
감옥을 '영어(囹圄)'라고 한다. 법(令)을 어긴 개인(吾)을 가두어 둔다는 말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갇혀 생활한다는 것은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손양원은 감옥에서도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체형조서 진술을 보면 감옥 안에서도 찬송과 말씀 묵상 그리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복심법원에 항소한 것도 형의 감량보다 법원 관계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손양원은 감옥 안에서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편지에는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참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다. 또 아버지에 대한 불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성도들을 돌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행간마다 배어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제 강점기 감옥에서 겪은 신앙인의 이중 고통
 
일제 강점기, 감옥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데엔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은 뻔하다. 사상범들에겐 더욱 그랬다. 가족 외엔 편지 내왕을 할 수 없어서 일가친척으로 위장하고 서신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었다. 손씨 가족으로 위장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손양선(본명 황양희)과 손수남(본명 김수남)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
 
손 목사도 가급적 교회 관련 내용을 빼고 일상적인 소식만 전하라고 부탁할 정도이니 검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된다. 손양원 목사의 편지 중 검열에 걸려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또 몇 줄씩 먹줄로 지운 뒤 전달된 것도 있다(315쪽).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서러움에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이중의 아픔을 겪은 옥중 생활이었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을 읽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지 않다. 손양원 목사가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大村良源), 그리고 편지 곳곳마다 교도관에 대한 고마움과 일본에 충성하는 말이 들어가 있다는 것 등은 읽는 내내 마음에 거슬렸다. 물론 검열을 의식한 형식적 문구이고 그것이 일제 강점기 감옥생활의 풍습이었다고 해도 '손양원'을 바라보는 시각에 호의적일 수 없다.
 
손양원을 독립투사보다는 굳건한 신앙의 보수자라고 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6.25 때 끝내 순교를 당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하고 애쓴 분들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시간과 공력을 쏟아 부은 장면들이 페이지마다 읽혀진다.
 
손양원 전집 발간을 기대함
 
손양원 목사의 편지들을 번역 주석하려면 한글과 한자 그리고 일본어에 정통해야 할 것이다. 편역 및 해제를 맡은 분들이 이 일을 훌륭하게 해 냈다. 손양원 목사가 직접 남긴 기록들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편지에 이어 일기와 시, 산문 그리고 설교문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잔존한다.
 
(사)손양원정신문화계승사업회에서는 손양원 목사가 남긴 자료들을 디지털로 사진 현상하고 활자화해서 전집 형태로 계속 발간한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된다면 손양원 연구가 갈수록 속도감이 붙을 것이고 체계화 될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우리가 내 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서는 인물에 대한 왜곡과 폄하의 기술은 배척해야 한다. 또한 미화 일변도의 기록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가에게 최상의 덕목은 정직과 진실"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손양원의 옥중서신>이 출판되기까지 수고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며 독자 제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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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 자료총서 47
이만열.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엮음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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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에 대해 서평을 쓰기는 처음이다. 서평의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 자료집은 그만큼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쓸 수 있다는 뜻도 되리라. <산돌 손양원 자료선집>은 지난 10월 손 목사의 고향인 함안군 칠원읍에 소재한 손양원기념관 개관에 맞춰 출판되었다. 기념사업회 회장인 이만열 교수 편으로 되어 있지만 기념사업회 엮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결합된 자료집인 것 같다.

 

산돌 손양원 목사는 참 목자요 기독교인뿐 아니라 전 국민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해 5년 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는 것, 여순사건 때 공산주의자 청년들에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빼앗겼다는 것(순교), 그 뒤 6.25 전쟁 때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양떼들과 끝까지 함께 하다가 인민군에 의해 그 역시 총살당했다는 것 등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들이다. 이런 단편적 내용 뒤에 숨어 있는 그의 기독교적 사랑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가톨릭 침례교를 시작으로 장로교단이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일제의 종교 정책을 따랐다. 그러나 평양의 주기철, 경남의 한상동, 호남의 김형모 등을 비롯해 소수의 목회자들은 이것은 십계명 제1, 제2의 우상숭배 계명에 위배된다며 참배를 거부했다. 손양원 목사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제는 신사비종교론(神社非宗敎論), 즉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애매한 명분을 내세워 목회자들을 회유했다.

 

손양원 목사의 참된 목자로서의 모습은 순교당한 두 아들에 대해 임한 자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 청년 안재선을 처형 직전에 구하여 양아들로 삼았다. 이 때 한 말이 순교한 두 아들은 천국 갔지만 저 죄인(안재선)이 죽으면 지옥 갈 것이 뻔한데 그대로 둔다면 목자의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 된다며 그를 구해 양자로 삼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이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의 원자탄'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퇴각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함으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피난 가라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고 한센인 성도로 구성된 애양원교회를 끝까지 지키다가 순교당한 것이다. 삯꾼 목자가 판을 치고 있는 이 때 그의 행동은 참 목자 상(像)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박형룡 박사는 손 목사의 추도식 때 설교를 통해서 그를 '성자(聖者)'로 존호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우리가 세계에 내 놓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자이다.

 

이런 손양원 목사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훨씬 미진하다. 일찍이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을 출판한 이래 그에 대한 글들이 종종 발표되었지만 종합적인 연구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이렇다 보니 손 목사의 출생 연도부터 수세(受洗) 날짜 각급 학교 입학과 졸업 날짜, 목사 안수 받는 날짜 등 어느 것 하나 통일된 것이 없다. 연구의 부진의 결과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자료집의 출판은 그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손양원 목사에 대해 연구할 자료들을 집대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료 선집이라고 했지만 손양원 연구에 필요한 것들은 거의 망라하고 있다. 전국을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 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을 이 자료집 발간으로 수고를 덜게 되었다. 이 자료 선집은 국판 55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담고 있다. 분류하자면 1.일지 일기 2.편지 3.설교 4.재판 기록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문투를 현대문으로 일일이 바꾸어서 정리, 읽는 이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고 있다. 각 편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일기는 그야말로 개인의 사소한 기록이다. 손양원 목사는 기록을 해서 보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성자 손양원 목사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일기는 그의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접할 수 있게 한다. 동인이 머리 깎음, 이 날 양원도 머리 깎은 날(32쪽), 지갑 산 날(46쪽), 일기장 산 날(50쪽), 남창 교우 일동 사진 박은 날(62쪽), 양 새끼 낳은 날(66쪽),영순 양 이 해 넣은 날(73쪽), 목욕 새 옷 입음(新衣着, 76쪽) 등의 내용을 읽을 땐 웃음이 피어오르기조차 했다. 성자의 인간적 면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손 목사가 야학을 했다는 것('금야부터 야학 시작' 29쪽), 손양원 목사의 아호를 '산돌'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한자 '활석(活石)'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라는 사실(35, 41쪽), 손 목사에게 처제가 있었음('처제에게 편지 온 날', 43쪽), 그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그러니까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할 때부터 이미 사찰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1931년 9월 21일 2인 시찰인(視察人) 돌아감', 61쪽) 등.

 

또 동생 문준과 갈등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쓰고 있고(87쪽), 손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는 그 해 목사 안수 받기를 바랐으나 신사참배 반대 문제에 부딪쳐 해방 후인 1946년 2월에 가서야 안수를 받게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해방 뒤 국기배례도 일제 때의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속한다고 하여 그가 적극 반대 의견을 개진 급기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며 예를 표하는 주목례로 바꾸게 했다. 신앙이 민족 위에 있다는 예증이 될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많은 설교를 기록으로 남겨 두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이번 자료선집에 모아 221편으로 정리했다. 어떤 이는 손 목사의 설교에 대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내용이 초보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이어서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설교를 정독한 나의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평이(平易)하지만 그 가운데 영적 파워를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그대로 회중에게 전해도 될 정도로 설교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가 구속된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신사참배 반대가 주 이유가 되겠지만 그가 한 설교도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본인 손양원 목사가 경찰서와 검찰에 자주 불려가 피의자 심문조사를 받았지만 그 주위 인물들, 예를 들어 애양원교회의 장로 집사들도 증인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일제의 검찰과 경찰은 두 개의 설교를 문제 삼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것은 '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와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라는 설교였다. 일제 천황제를 비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은근히 강조한 설교이다.

 

원문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심문 과정에서 증인들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계 대전과 천재지변으로 조선 교회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괴롭힌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의 정세 하에서 조선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는 재림 주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돕기 위해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현하 교회가 요구하는 교역자', 505쪽에서 정리한 것).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공중 권세 잡은 사탄 마귀가 멸망하고 악한 정치가 사라질 때가 되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각국을 통치할 심판장으로 오셔서 세상을 평정하신다. 전쟁과 한재, 수재와 악병이 사라지고 또 애양원교회 성도들인 나병 환자들도 전쾌(全快)된다. 따라서 영원히 평화롭고 행복한 하나님 나라가 출현하게 된다."('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 505-506쪽에서 정리한 것). 그의 설교를 일별하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연구하기 위해서 제공되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체형조서(體刑調書)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만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심에서 받은 형량은 1년 6개월이었지만 전향, 즉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함으로 위험 분자로 찍혀 전향할 때까지 구속 생활이 이어지게 되었다. 체형조서는 그가 일제에 잡혀 가서 경찰과 검찰로부터 받은 심문 조서를 말하는데, 손 목사의 답변에서 그의 신앙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일찍이 <사랑의 원자탄>을 쓴 안용준 목사를 비롯해서 손 목사에 대한 중요한 글은 많은 부분이 이 체형조서에 근거한 것들이다. 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는 체형조서를 시기별로 정리해서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보이스사, 2001년)라는 제목을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체형조서 발굴에는 원택연 장로의 도움이 컸다. 해방 후, 그가 광주지방검찰청장으로 근무할 때 안용준 목사가 원 장로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발굴해 낸 것이다.

 

일제 하 구속되었던 사람들의 체형조서를 살펴보면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상당량 발견된다. 일반적인 죄를 지어 구속된 사람들은 죄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일이 많다. 또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확신범(確信犯)들은 모든 것을 조국 독립에 맞추어 진술했기 때문에 사실과 배치되는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는 목회자로서 신앙 양심에 근거해 진술했기 때문에 대부분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뚸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선집을 많은 이들이 읽어보기를 바란다.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교양을 확보하고 정신적 자산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세상이 점점 팍팍해져 간다. 개인의 잘못이 물론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의 변형인 신자유주의는 사람보다 물질, 상호보완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며 심한 이기주의를 양산해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당위라면 더불어 살기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교재로 <산돌 손양원 자료선집>을 권하고 싶다. 신앙과 민족을 위한 삶은 이타적인 삶을 살 때 가능하다. 산돌은 그런 전형을 보여주고 이 세상을 뜬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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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다섯 그리움 일곱 - 강여울 풀씨처럼 6
오혜령 지음 / 이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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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령 영성묵상 기도집이라고 했다. 두 가지 어휘가 집혔다. 오혜령과 기도집이 그것이다. 오혜령이라. 그는 일찍 극작가로 문명을 떨쳤던 사람 아닌가. 그는 연세대 영문과 오화섭 교수의 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역시 같은 학교 경영대학장을 지낸 나의 지인(知人) 오세철 교수의 친 누나이기도 하다.

 

나는 오혜령을 문학하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여종으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다는 게 놀라웠고 또 한편 고맙기까지 여겨졌다. 이 책 표지 안쪽에 있는 지은이 소개를 보니까 그는 현재 '평화의 집' 원장, '평화교회' 전도사, '평화영성수련원' 원장으로 1인 다역(多役)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의 영성 묵상 기도집 <그리움 다섯, 그리움 인곱>은 서시(序詩) '당신 힘과 견줄 수 없사와' 뒤에 30일 동안 묵상한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꽃들이 만발하고 또 빠른 것은 씨를 맺는 6월(June)을 특정하고 있지만 거기에 얽매여 읽을 필요는 없다. 매일의 묵상을 쉬운 언어로 조탁(彫琢)해 놓았지만 영적 파워가 가볍지 않다.

 

기왕에 출간된 개인 묵상 기도집(祈禱集)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미안스럽게도 읽고 영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성경 단어를 나열하는 데에 머문 것이 많았고 또 어떤 것들은 서투른 어휘 구사로 묵상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들도 없지 않았다. 문학성의 결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혜령의 <그리움 다섯, 그리움 일곱>은 그렇지 않았다. 책 이름 앞에 붙여 놓은 '영성 묵상 기도집'이란 말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 내용은 이 묵상 기도집을 읽고 각자 소화해 보기 바란다. 느낌의 각도는 다양하다 할지라도 받는 은혜는 동일할 것이다. 이것은 먼저 읽은 내가 보증한다.

 

이 자리에선 책의 구성과 체제에 대해서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먼저, 제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이다. 성경에서 다섯은 보통 수(數), 일곱은 완전수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그리움 다섯'은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정서를 말한다. 신앙인은 여기에 자족해서는 안 될 터. 그래서 '그리움 일곱'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묵상의 나래를 맘껏 펴 보겠다는 글쓴이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책은 글 반 꽃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으로 또는 그림으로, 어떤 때는 독립된 사진으로 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글을 받쳐주는 배경 그림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톡톡히 돕고 있다. 무엇보다도 묵상의 글을 이끌어 내는 성경 요절이 문두(文頭)에 놓여 있어 전체 글을 풀어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묵상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책의 가치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의해 결정되기 쉽다. 그러나 형식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다고 해도 오탈자 비문(非文) 띄어쓰기 맞춤법 등에 틀린 데가 많다면 좋은 책으로서 인정받기 어렵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나는 오혜령의 이 책을 꽤 신경 꽤 신경 써 읽었지만 부자연스런 곳을 한 군데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단하다.

 

문인으로서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리라. 오혜령은 지금까지 많은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해 왔다. 이 묵상 기도집만 해도 '강여울 풀씨처럼'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 그의 글은 산소와도 같아서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데 귀하게 사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영적으로 더 신실한 기도집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복잡하면서도 팍팍한 시절, 오혜령의 묵상 기도집을 읽음으로써 영혼의 쉼을 얻기를 바란다. 아울러 노익장(?)을 과시함으로 많은 독자들을 기쁘게 만드는 오혜령 원장님의 영육간 건강과 건필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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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 연구
고성은 지음 / 삼원서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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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박사 과정 공부를 하면서 만난 고성은 목사는 목회자요 교수요 또 지역 주민을 잘 섬기는 봉사자로서 1인3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의 일을 하다 보면 모두가 다 엉성해지기 쉬운데, 세 가지 다 튼실함을 보여주고 있는 그를 나는 주목해왔다.

 

교회사로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마친지 6년이 경과해서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각오를 하고 있다. '진인사 대천명'이란 이런 때를 두고 생긴 말인지 모른다.

 

고성은 박사와 통화할 일이 있어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한 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논문을 쓰는데 참고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더니 박사논문 대신 그가 보내 온 것이 이 책이다. 제목이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 연구>(삼원서원, 2012).

 

그러니까 그의 박사 논문을 수정 보완해서 책으로 출판해 낸 것이다. 박사 논문은 그 주제에 있어서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박사 논문을 쉽게 쓸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박사 논문은 일반 학술서로 출판해도 하등 손색이 없어야 한다.

 

고 박사는 그런 점에서 본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 인물을 선택해서 다루고 있다. 신홍식이 그 주인공이다. 신홍식은 한국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도 생소한 인물인 것으로 보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인물은 아니다.

 

책 서론에 신홍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초기 목회자이자 한국 사회의 민족운동가인 신홍식…"

 

책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보니 신앙과 사회를 조화롭게 관계 지워 목회하는 사회복음주의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명으로 활동한 것,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 사회 계몽운동 참여한 것, 그리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한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역사 연구의 대상은 다양하다. 내가 생각할 때 보다 의미 있는 연구는 기존의 것을 보족(補足)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전자를 유(有)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무(無)에서 유를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명에 가까운 신홍식을 역사의 수레에 떳떳하게 등재한 공이 결코 적지 않다.

 

400쪽이 넘는 학술 서적을 출간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따라야 한다. 200쪽 가량의 박사 논문을 토대로 했다고 해도 그렇다. 책을 집필하는데 참고한 자료를 보니 이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권말에 수록한 22쪽에 걸쳐 정리해 놓은 참고 자료는 신홍식에 대한 직간접의 자료뿐 아니라 인접 자료까지 망라되어 있어 과히 신홍식 연구의 담수호라 할 만하다.

 

책의 구성도 탄탄하다. 모두 7장으로 짜여진 목차 안에 신홍식 삶과 신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귀한 사진들을 관련 내용에 연결해서 삽입해 놓은 것은 독자의 편의를 위한 것인 동시에 저자의 논지 강화를 위해서도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초대 교회 이해를 구하는 이라면 이 책의 정독을 권한다.

 

읽고 아쉬웠던 점이 없지 않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인물 연구는 한 사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중심으로 관련되는 사람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저자가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이 부족한 것 같다. 또 권말 찾아보기에 인명만 정리되어 있는데, 사건 등의 용어 찾아보기도 함께 포함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고성은 박사는 여러 가지 일을 빈틈없이 수행해내는 사람이다. 목회도 따뜻하게 하고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인기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사 관련 자료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적지 않다. 고 박사의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 연구>의 일독을 평자가 강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눈치 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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