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시인 가브리엘 셀레야의 시구에서 빌려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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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5-2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러시아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떠오르네요.정성스런 코멘트 잘 받았습니다.워낙 지식이나 인품이 척박한지라 감히 리뷰는 올리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페이퍼에다 쓰고는 며칠 지나면 숨겨버립니다-_-;; 봄이 늙어 어린 여름이 되려 하는데 날씨가 순조롭지 않군요. 늘 건강하시고 사는 것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날들 되기를 빕니다.(P.S. 밥되는 책읽기는 이미 즐겨찾는 서재랍니다.)
 
서바이버 메피스토(Mephisto) 9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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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러모로 펠라닉 시리즈의 최종본이나 최고작을 보는 듯 하다. 우선, 그의 전작에서 조금씩 보여주었던 테마들, 캐릭터들이 총천연색으로 무장하고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더욱 빠른 템포, 갖가지 요리 및 살림살이에 대한 정보, 사이비 종교 집단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적 구성력 등이 이 소설을 그의 최고작으로 뽑는 데에 이견을 좁힐 것이다. 신비한 능력을 가진 여인의 출현도 반복되며 그 능력은 거의 울트라 파워급이다.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이 조금은 애정을 주었을 주인공을 뺑뺑이 돌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펠라닉은 전작에서 다양한 중독증을 다뤘는데, 이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외모와 성형 중독증이 바로 그것이다. 끊임없는 다이어트 신화도 한 몫 거들 것이다. 작가의 주제는 바로 그 현대인들의 중독증이다. 그는 끊임없이 현대인들의 중독증을 관찰하고 작품화한다. 바꿔 말해 중독증이 있는 한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매우 행복하다. 처음부터 아주 생산적인(?) 길목에 자리를 튼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이 ‘현대인’이란 개념이 미국의 쁘티브루조아 집단에서 점점 더 광범위해지고 있다는 것. 이 현대인이란 개념범주에 한국의 부루조아들까지 가세할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이것은 결국 펠라닉을 살찌우는 결과만 낳을 것이니 비극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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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어선 길에서 (구) 문지 스펙트럼 17
귄터 쿠네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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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소품들로 이루어진 SF적 작품집이다. 단순한 SF라고 하기에는 배경으로 깔고 있는 사회 정치적 상황이 너무나 암울하며 현실적이다. 가장 인상적인 소품에는 ‘아담과 이브, 올림피아 2, 대리인’ 등이 있다.

역자는 ‘아담과 이브’를 ‘기술 및 상품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지만, 나는 그렇게 읽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우선 아담과 이브 설화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참고로, 폴 리쾨르는 구약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던 아담이란 인물이 사도 바울에 의해 재등장했다고 본다. 즉, 예수를 제 2의 아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담은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이 작품은 아담을 예수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제 3의 아담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지구는 파괴되고 인간종족의 한계상황은 처음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문제는 신의 부재다. 그 대신 최종적으로 남은 인간 남자 둘과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 그리고 베일에 싸인 설명서가 있을 뿐이다. 두 아담 중 하나는 매우 교활할 정도로 사태파악이 빠르다. 나머지 하나는 둔감하여 파트너에게 이용당할 뿐이다. 일단, 작가는 생물학적 성역활론을 비웃을 만큼 영악하다. 그리하여 둘 중 둔감한 남자가 이브로 재탄생한다. 여기서는 없는 신을 대신해 아담이 직접 성전환 수술을 집도한다. 재밌는 작품이다. 한편으로 우울하기도 하다.

<올림피아2>는 마치 비디오 드롬을 보는 듯하다. 재밌는 것은 변형된 기계가 텔레비젼이 아니라 그 속에 등장하는 아나운서란 점이다.

'대리인'은 소위 노인성 문학에 대한 조롱처럼 들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기 등장하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인격을 갖추고 있거나 혹은 죽음에 대비해 비장한 모습을 보이려고 들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고생들보다 한심하고 대책 없이 군다. 그 중 가장 대책없는 노인은 자신이 내건 내기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 이런 노인의 욕망, 그것도 롤리타 제곱 정도는 될 듯한 콤플렉스는 역설적으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가장 사변적인 작품은 동제의 ‘잘 못 들어선 길에서’다. 기계적 장치나 간결한 행위묘사보다는 인물의 독백 위주로 짜여진 이 작품도 매우 훌륭하다. 특히 ‘냄새’와 배설물에 대한 변태적(?)애착(이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도 있지만)이 매우 선명하게 묘사된다.

예컨대 ‘ 냄새만이 나를 실재와 연결시켜주지. 주위의 형상들은 언제나 붙잡을 수 없고 난공불락이며 접촉할 수도 없어’란 표현은 지젝의 ‘상징계, 실재계’에 대한 설명의 예화로서 훌륭하게 인용될만하다. 즉 상징계 속에 자리잡고 있는 큰 구멍, 트라우매틱한 경험들이 저 냄새란 말 속에 모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나의 ‘실재’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쿠네르트의 이 작품집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냄새’를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 사회 그리고 과거 독일 사회의 징후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냄새를 맡음으로서 우리는 다름 아닌 실재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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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조직론
박수연 외 지음 / 교육과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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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는 ‘초등학교 교사들의 성비율이 왜 교육전문직과 학교관리자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비를 이루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대해 ‘교육행정학 수업’ 시간에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납득할 만한 대답은 못 들었다. 담당 교수의 대답은 대충 이런 것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전문직 혹은 관리직(교장,교감)에 계신 분들의 연령을 생각해 보라! 그분들이 사범대나 교대에 들어갈 즈음만 해도 성비율은 지금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채용된 후에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입학당시의 성비율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답은 근본적으로 그 ‘당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가변의 폭’이 너무 크다는 점, ‘과연 그런 무수한 당시 중 특정한 시점을 지적했다하더라도 실증적인 데이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고위직으로 갈수록 여성이 줄어드는 현상은 학교급간별의 통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로 다른 교사 양성 및 임용체제를 갖춘 국가들간에도 어떤 특별한 구조적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 그래프는 여교사의 비율이 고등학교로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줄 뿐, 여교사가 초등 학교에서 고위직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앞서 언급한 현상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그래프로 유추해 보건대, 비교적 초등학교는 여교사가 강세를 보인 학교급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세가 과거라고 달랐을까? 지금의 초등학교 교장과 교감의 나이가 50대라고 상정하면, 이들의 출생연대는 대부분 육이오 바로 전후 정도가 된다. 그 당시에 교육대학은 2년제 사범대 형태였다. 정확히 이 때 입학한 여학생 수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위의 통계로 유추해 보건대, 중■고등학교보다는 많았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오늘날에 이르러서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다른 학교급보다도 고위직에 있는 여성이 많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자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교육행정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시각으로 남성을 위한 입장에서 스펙트럼 분광기를 사용하여 연구, 관찰 및 실시되어 왔다(Shakesshaft,1987; Owens, 1995) 실제로 교육분야는 주로 여성교사수가 남성 교사 수보다 훨씬 많으며 남성 교육행정가의 수가 여성 교육행정가의 수보다 훨씬 많다. 남성위주로 발달하고 수립이 된 교육행정 이론에 의하여 여성위주의 교사분야가 정의되고 관리 및 행정이 실시된다는 사실은 교육행정 분야와 교육조직론 분야에 편견이나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박수연, 박정애 , 2000, “교육조직론”, 교육과학사 pp 516 ~ 517, 재인용 및 인용]

Dwyer, Johnston, Lowry 에 의하면,[ 전게서, pp 517 ~ 518, 재인용] 여성교사들이 수석교사 교육행정가의 위치로 승진하는데 방해를 주는 요소가 많고, 여성 수석교사 또는 교육행정가로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매우 적은 현상을 ‘유리천정효과(glass ceiling effects)'라고 한다. (1996, p.92; Luthans,1998) 이는 여성교원이 승진을 하려면 유리와 같이 보이지는 않으나 지속적인 경력쌓기와 승진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천장에 놓여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 천장효과를 제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조언가 제도가 있다. 기업체에 비해 일반적으로 승진의 폭이 좁고 경쟁이 치열한 우리 나라 교직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여성교원의 승진이 더욱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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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홍신 엘리트 북스 1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홍신문화사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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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 꾸는 꿈은 가끔 이상한 입체성과 뚜렷한 선명함, 놀랄 만한 현실과의 유사성을 그 특색으로 한다. 때로는 기괴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 꿈의 상황이나 그 과정 전체가 장면의 내용을 충실케 한다는 뜻에서 예술적으로 완전히 부합하는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상세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어느 날 우연히 남미의 어디에서 제작한 '현대의 죄와 벌'이란 영화를 보고 죄와 벌을 다시 꺼내 읽었다. 영화속에서 로쟈(라스콜리니코프)의 희번덕거리는 검은 눈자위를 잊을 수가 없다. 도옙스키의 요사와 얼마나 가까웠는지 후줄근한 옷차림과 머리 모양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살기와 오만, 카리스마가 넘쳐흐르는 모델 같은 외모. 역을 맡았던 배우는 실제 남미의 모델일 것이다. 매우 개성적으로 잘생겼고 호리호리한 몸매였으니. 어쨌거나 그 희번덕거리는 눈자위를 보며 한참이나 눈에 안약을 넣었을까? 혹은 렌즈라도? 그도 아니면 배우는 선천적으로 이 배역에 맞춰서 태어난 것을까? 등을 고심하며 영활 봤다. 원작의 각색과 윤색에도 불구하고 이 로쟈의 스크린이 뚫어질 듯 나(관객)을 노려보는 연기는 자못 압권이었다. 루진(포르삐리 예심 판사)이란 자의 묘사도 그럴 듯 했다. 루진은 로쟈에게 말한다. 자수를 권하면서,

'당신은 노파를 죽여서 넘어서지 않았다면 수백만명 아니 그 이상도 아무 이유없이 죽여서 뛰어 넘어가려 할 위인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권력이란 자리에 앉기 위해 자신이 초월자라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 그러나 다만 깜냥이 작고 소심한 또 다른 면모가 당신의 행동을 축소시키고 말살시켰다. 당신은 감방안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찾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당신은 어딜가든 도망자로서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달아날 수도 없다. 차라리, 실제하는 감방하는 안으로 스스로 달려와라. 이는 살인을 단죄하는 사회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심리적 안위를 고려한 조언이다. 당신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자청하는 용기도 지닐 거라 믿고 있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두가지 면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 초월자로서 범죄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로쟈 못지 않게 루진이라는 자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못생기고 땅딸맞고 집요하고 잘난 로쟈를 괴롭히기만 하지만, 그의 뱃심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 우리는 흔히 로쟈가 자수한 것을 소냐의 기독교적 회유탓으로 돌리기 쉽다. 그러나 소냐와 대척점에서 그를 회유한 자는 다름아닌 이 젊은 예심판사였으며, 이 책을 기막힌 논쟁의 장으로 만드는 주역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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