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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섹스 2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섹스와 젠더의 대립적 구분을 서구사회의 이분법적 담론 역사의 연장이라 보며, 그 사이의 구분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는 주디스 버틀러는 '그렇다면 젠더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젠더는 끝임없이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무엇'이라고 단정한다.
기존 우리의 섹슈얼리티론에 의하면,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이며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다. 따라서 섹스와 젠드의 관계는 임의적일뿐 전혀 필연적이지 않다. 젠더론은 인간의 성정체성이 반드시 성염색체에 따른다는 생물학적 성역할론 지지자들 보다 논리적으로 우위를 점한지 오래다 . 특히 여성성에 대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란 보부아르의 명제가 이를 대표해 왔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여성 사이의 차이는 없는가? 버틀러의 질문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버틀러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젠더 자체의 확정성을 무시한다.
어쩌면 섹스가 한 주체의 섹슈얼리티를 반절이상 지배하더라도 젠더는 다양하게 변조를 띨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남성적 섹스와 남성적 젠더를 지녔음에도 여성의 차림과 화장법에 매료된다. 이처럼 버틀러는 젠더 자체가 끊임없는 위장이라고 못 박는다. 그러므로 저 크로스드레스라 명명되고 있는 퀴어족은 여성을 흉내내고 있으나 여성은 아니다. 여성이란 끊임없는 흉내내기일 뿐, 어디에도 '여성' 그 자체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여성'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여성을 흉내낼 뿐이다.
이 경이로운 소설은 버틀러를 인용하지 않으나, 마치 그 이론을 구체화하기 위해 쓰여진 것만 같다. 칼 혹은 칼리오페는 칼리오페일 때 여성을 흉내내었으나 진정으로 여성인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여성'이란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고뇌한다. 칼일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의문없는 상태에 이르러서도 끝내 남성을 흉내낼 뿐, 자신이 다른 남자와는 다를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런 남자'란 집단 구성원들 역시 '그런 남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중이란 걸 모를 뿐이다.
이 책은 본국에서 출판된 직후에 국내 번역 출간되어 내용 자체가 소위 뜨끈뜨끈하다. 소재는 '나의 그리스식 웨딩'과 '성적 소수자 이슈'를 짬뽕시켰다.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데 칼리오페는 성적으로 복잡할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도 소수적 인종에 속하는 그리스 계다. 여기 올려진 후기에는 '성정체성'에 대해서만 많이들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스 조부, 부친에 대한 추억과 오마쥬, 그리고 그들의 대를 이어 현대를 살아가는 '나'다.
'홀로코스트 산업' 이나 부시 대통령 부자들에 대한 언급, 마리화나, 앤드로지니들에 대한 의학적 보고 등은 이 소설이 얼마나 현대적인 가를 반증하기도 한다.
한편, 문체적으론 하나의 명주실을 보는 듯 하다. 누에가 자아내는 실처럼, 작가의 이야기는 진짜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뽑아져 나온다. 단지 한마리의 누에만 있으면 된다. 역사는 누에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세련된 기술은 근래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2004년 최고의 소설이다. 그 문체가 경이로운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이어져 나가는 것 뿐 아니라, 제목만큼이나 적장한 중간 목소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성별을 크로스하여 여성 혹은 남성 주인공을 내세워 말을 걸어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화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물흐르듯이 진행되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런 바에야 정확히 중간의 목소리를 찾는 다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중간이란 말이 아니다. 다만 심리적이고 문학적으로 정확히 중간이란 말이며, 이것의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나 적어도 작가와 나에게는 서로 통하는 어떤 '느낌'이다.
이 중간의 목소리는 다만 둘 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어떤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둘 다인 여하한 퍼스낼리티와 섹슈얼리티를 직조한다. 동시에, 그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니면서 둘을 아우르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예컨데 그것은 흑인의 목소리도 백인의 목소리도 아니며 , 과격하지도 온건하지도 않다. 언젠가 누구든 한번쯤은 들었던 목소린데 찬찬히 들여다 보면 신선한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