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잡링크라는 구직알선 사이트 설문 조사 결과가 인터넷 언론들의 탑에 오르면서, 그 댓글들을 읽어나가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 
 아직 본 주제로 오른 글이 그닥 많지 않아 결론 내릴 순 없겠으나, 거개가 남성적 이름을 가진 성토로 가득한 남자들의 글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 몇 님들의 글은 내게 큰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글들의 요점은 '여성들 자신의 군복무에 대한 언급 회피는 전통적인 '성역활'의 고착에만 기여할 뿐이다.'란 것인데, 여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이데올로기에 여전히 희생양으로 남아있으며(물론 군대를 가야하므로, 남자는 드러난 희생자들) 그것을 '양심상 잘못된 것이라'생각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면서, 사회적으론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의 스탠스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때, 난감하기 짝이없다. 소위 '여성학' 강좌에서 여성의 군복무에 대해 토론한 적도 없으며, 내가 알기론 '군가산점 폐지'에 초점을 맞춘 양성의 혈투만이 우리 사회에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신선할 뿐더러, 시급하게 느껴진다. 


 다만 접근해 가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언론을 쥐고 흔들다 해도 과언 아닌 인터넷 매체의 댓글 수준과 수위는 거의 집단적 폭동과 연소자 관람불가의 하드 느와르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왜 여성의 의무참여를 부르짖는 남성들은 여성을 '공공의 적'으로 취급하는가?
 그것이 여성에게도 궁극적으로 좋을 것이라고 호소하는 글들은 없다. 단지 '여성의 육아와 출산'을 비하하고, '사회문제'에 백치인 무리(소위 찌지리)로 단정지으며, 여성부와 여성단체를 '폐미'와 똥폐미들로 똥칠하며, 군대 생활이 여성들의 '달콤한 맬로 드라마'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힘들고 무서운 곳이란 사실을 환기시킬 뿐이다. 
 결국, 그런 협박과 비난이 여성 동지들을 움직일 수나 있을 것인가?(더 문제는 그런 댓글 중에 여자가 하나 끼여 있을 시에는 아주 '마녀 재판'이상의 것이 펼쳐진다는 점) 


 오히려, 이런 저열한 태도는 '군가산점폐지'에 악이 오를대로 오른 일단의 남성동지들만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왜 여기 엠비시 토론 프로 게시판 처럼 '고상한 선동'이 드문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아까 여자들을 향해 쏟아졌던 모함과 모욕들이 그대로 그 글을 올린 남성 동지들의 대부분에게로 전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근본적인 철학에 대해 얘기하련다. 여군이 편입되면,기존의 의무복무기간이 짧아지며, 성역할에 대한 대대적인 인식변화가 예고된다. 여자들도 국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으므로, 무임승차하지 않고, 그에 따른 권리회복도 있을 것이다. 좋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군대의 규모를 줄이려고 하거나, 군수산업에 대한 혜택과 로비를 없애려고 하기 보다는 '과연 여자만 군대에 쳐넣으면' 과연 정말로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된단 말인지?
 나는 '양병거'에도 많은 관심을 쏟어 온 사람이다. 만일 이들의 시나리오대로 여자들을 '대거 양병거'로 만들면 될 것인가? (국방세를 한달에 50만원씩 낸다던가, 유럽사회처럼 각종 사회봉사로 때우던가 하는)


 그런데 법원과 군관계인사들은 '종교적 이유의 양병거'조차도 용인하지 않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생물학적인 성이 여자란 이유는 '종교적 이유'보다 강하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 현재는 일종의 '양병거'로 볼 수 없는가?

 왜 모든 권리와 의무의 이행이 총구에서부터 나온다고 보는가? 물론 너무 허황된 바램이겠으나, 현재의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꾸고, 전쟁영화 속 영웅 중에 여자들도 많이 끼워 넣고, 드라마에서 여군 출신을 '최대로 미화'하고 그러면 '모병제'로만 바꿔도, 여자들의 대거 자원입대가 예상된다. 물론 군의 입장에서는 남자군인들만 거둘 때보다 소위 '유지비'가 배로 들 것이다. 생필품이며, 병영이며 새로 다시 꾸며야 할 테니까. 그런 비용은 '여성 납세자'로부터 걷어도 좋을 것이다. 

 남자들만이 '양심상의 이유로 군대를 거부'한다고 생각하는가? 여자들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멜로드라마에 썩어 있어서 그런것만이 아니다. 미군이 강해서 미국이 세계적으로 칭찬받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쟁으로 돈 버는 것은 남자들의 역사만으로 족하다. 왜 정치적 참여와 의식교육으로 여성의 성역할이 바뀌리라고는 말하지 않는가? 왜 수많은 여성 차별적인 법제도는 그대로 두자고 하는가? 여성군복무를 부르짖는 분들은 과연 여성이 군대를 가는 것만으로 이러한 문제가 일소되리라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예로 든 '80개국의 징병제'나라 리스트가 이를 방증한다. 

*MBC 100분 토론 시청자 게시판에 올린 내용 그대로 복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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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모험
아흐멧 알탄 지음, 이난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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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책 커버의 다소 부조리한 그림이 소설의 상황을 매우 직관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경린의 코멘트가 뒷 커버에 남겨져 있기도 하지만, 영화로만 본 그의 '내 생애 단 하루뿐인 아주 특별한 날'이란 특별하게 긴 제목과 불륜이라는 언제라도 파격적일 소재의 소설은 이 책과도 많은 점을 공유한다.

 작가는 결혼 제도를 신뢰하지 않으며 합리적인 것으로도 간주치 않는다. 그것은 결혼이 '감정의 약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결혼이 보험처럼 철저히 합리화 되어 있어서, 감정 따위의 개입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면 모를까, 불륜이란 거의 전적으로 '감정의 모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서로만 봐 주길,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함꼐 하자는 그 '모두가 애초에 확신할 수 없었던 그 약속'과 함께 시작한 결혼은 시작부터 위태로웠던 것.

그런데 거꾸로 사람들은 불륜을 저지를 때 바로 그 현장이 위태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의 진실은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불륜의 현장이야말로 인간의 본연의 발로이며, 결혼이야말로 가장 인공적인 모래성이란 것.

이 소설이 그 범상치 않을 것도 없는 불륜 소설과 내러티브가 다를 게 없었다면 끝까지 앍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류의 분위기 서술에는 생리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알레르기성 체질이라서

무의식적으로 후진국으로 치부해온 터키의 부르조아 중년 여성의 이 감정의 모험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공명을 일으킬 만하다. 비단 불륜만이 아니라, 연애를 할 때에 여자들이 느낄만한 그런 세세한 감정의 변화들, 질곡들을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으므로

강추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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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루는 영화의 접근은 크게 두 가지다. 거대담론과 미시담론. 이 영화는 후자의 포즈를 취한다. 영화사에서만 찾는다면, 역시 유럽영화인 '바르샤바', '글루미 선데이' 등과 그 접근법, 플롯이 닮아 있다. 매우 협소한 공간, 사랑을 둔 삼각관계, 그들의 은밀한 공간 밖에서는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퇴폐와 타락은 그 역사적 상황을 굴절해 보여주는 이상한 거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삼각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록 인간과 이데올로기 혹은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과의 관계는 더욱 더 괴리되고, 인간은 소외된 채 일그러진다.

다시 말하면, 이런 영화들은 역사 해석에 있어 어떤 정공법을 따르지 않는다. 어떠한 해석 중에 하나만을 슬쩍 제시할 뿐. 게다가 전쟁 혹은 혁명을 다루는 영화답지 않게 '꾸민 영화'다운 매력도 있어, 전혀 무겁지도 않다.

여자 주인공의 지속적인 노출은 이런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훌륭한 '무기'
그로 인해 한국영화계는 배우 하나를 잃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영화 속의 여배우의 '몸'은 역설적인 두 가지 사실을 방증한다. '너무도 아름답다.'와 '여배우의 훌륭한 몸은 무거운 주제를 상업적 성공 혹은 대중과 연결시키는 가장 손쉬운 KNOT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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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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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온 순진한 여성이 스위스까지 끌려가서 매매춘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코엘료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이런 사회성 짙은 작품에서도 강한 게, 마리아의 모험이 온전히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됐다는데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 여성을 사는 남성의 대다수는 40대에서 50대까지에 이른다. 이 소설에서처럼 마리아에게 '빛'을 느꼈다는, 젊은 화가같은 사람은 사실 매매춘여성으로서 낚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부인과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누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처럼 성에 질리거나, 혹은 여성을 테스트하여서 자신의 애인으로 두려는 젊은 변태성욕자 따위를 실제로 그들이 상대할 확률도 저조하다. 대부분은 자신의 부인과 차마 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머릿 속에 든 건 있는 자들이 벌이는 1시간 남짓한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들 대부분이 고학력, 중산층 계층이란 것도 재미있는 통계적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매매춘을 둘러싼 모험을 아주 밀도 높게 그린 이 소설과, 우엘백의 '소립자','플랫폼'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분석할 가치가 있다. 후자는 매매춘을 소비하는 중산층, 삼십대 후반의 남자의 시각 즉,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술한다. 두 소설 공히, 매춘관광을 아주 자세하고 건조하게 그리고 있다.


반면에, 전자는 매매춘을 공급하는 하류계급 출신의 이십대 초반의 미숙한 여성의 시각, 즉 '마리아,혹은 그녀'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작가는 그녀에 대해 논평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녀가 일기를 쓰는 태도 혹은 남자 및 사랑을 대하는 입장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그녀가 매우 어리석거나 순진하다고 여기게끔한다. 그러면서도 아주 친절하게도 그녀가 그런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지적으로 보이려고 꽤 노력한다는 사실까지도  덧붙인다.


이렇게 같은 소재를 놓고, 두 작가가 접근하는 방법은 아주 대조적이다. 결말이나 문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성매매 소비자의 시각에서 그려진 소설(군)들의 결말은 매우 암담하다. 작가에게 희망이란 어디에도 없다. 들뢰즈와 같은 욕망과  욕망을 통한 소시민의 혁명을 꿈꾸는 그는 너무나 전복적이다. 반면에, 성매매여성의 꿈과 성공담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은 코엘료의 이 작품은 다분히 현실타협적이다. 결말 역시 '예쁜 여자' 신드롬 계열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여성의 심리 묘사에서 꽤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소묘를 그려보이지만, 그런 레이스같은 요란스러운 장식을 빼고 나면, 사실 별 볼일 없는 고민과 내면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작가가 요즘 남한에서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여성 성매매'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정치 사회적인 그의 스탠스는 어디에도 어떻게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허점이다. 참고로, 유럽에서는 노르웨이 같은 매매춘에 이중적인 나라를 제외하곤, 대부분 성매매의 소비자인 남성을 강하게 규제하는 방향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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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1-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혼혈아님~!

이파리 2004-11-2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여성에 대한 소유욕(과거에는 하나의 재산이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이 순결주의(정조대)와 학대로 나타나고, 여성들은 거기서 자유와 탈출을 꿈꿉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적 현실적으로는 많은 고난이 있지요. 그래서 불륜이나 이혼으로 나타납니다.(이 두 문제에 있어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엄청난 차이와 차별이 존재합니다.)

여성의 탈출 욕구는 과거나 현재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야래자로 대별되는 이물혼인이나, 아버지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마리아. 여성들의 모임장소인 우물가에 버려져 있었던 알영이나 박혁거세.

어떤 사람은 여성의 최초 자영업이 매춘이었다고 부르짖기도 하더군요. 왜 여성은 남성의 성욕 배출구나 재산으로 취급되어 지는 걸까요.

이런... 횡설수설입니다. ^^ 잘 읽고 갑니다. 혼혈아님~*
 

이따금 소위 지식인을 표방하는 이들도 텔레비전 드라마에 혹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나 섹스 앤 씨티는 여러가지 이유가 보태지며 이들 부류에게 옹호되고 있기도 하다.  소위 지식인들의 트랜드라고나 할까. 색스 엔 씨티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케이블 라인을 설치하지 않아 시청하지 못한 경우는 대화에서 소외될 정도로 이것들의 시류성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MBC 드라마인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 노혜경같은 드라마 작가군들이 그랬듯이, 드라마 작가는 시류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를 희망하기 마련이다. 소위 이 사회 돌아 가는 꼴에 대해 한마디씩 꼭 던지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도 결혼보단 그런 욕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겠다.

솔직히 나는 이 드라마를 매우 띄엄띄엄 봤기 때문에 그 줄거리 돌아가는 걸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팩트의 오류는 누군가 지적하면 그만이다. 지적하지 않으면 나로선 남들이 안 읽어 주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만이고.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몇 가지 점에서 강한 의문을 남기기도 했으며, 한편으로 '한겨레 21'의 내가 애독하고 있었던 기사들의 기자가 이 드라마에 대해 30대 비혼 여성이며 인텔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교양 및 지식을  발휘하여 써 줬기에  탄력을 받은 바 그 내력을 고하려 한다.

# 노처녀에도 등급이 있다.

이 드라마를 매우 호의적으로 본 기자는 이 드라마가 기존의 노처녀-주인공 드라마와는 차별되게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우정을 '자매애'로까지 그려내고 있다며 이 점을 크게 홍보해 주고 있다. 여기에 나는 물음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연 '친구의 남자는 넘보지 않는 거야'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이 과연 '자매애'의 요체인가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런데 드라마를 들여다 보자. 드라마속 인물의 이름은 모르므로, 그들로 분한 연기자의 이름을 거명하자면,  이태란은 명세빈이 침발라 놓은 생선 즉, 30대 항문외과 전공의에게 눈독을 들이며, 이를 안 제 3의 친구인 변정수는 아까 언급한 저 '경구'를 날리며 이태란을 한방 먹인다. 그런데 문제는 명세빈에게 제 2의 남자가 있다는 것. 그의 이름하여 '이현우' 나는 흘러간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절감했다. 그 쳐진 눈커풀과 어눌한 대사로 30대 노련한 여연기자들을 어찌 상대하려 맘을 먹으셨는지..

각설하고

이현우의 존재는 이태란 대 명세빈 뿐아니라, 명세빈 대 변정수 의 관계까지도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 변정수는 아주 일찌감치 이현우에게 침발라 놓은 상태이므로

문제는 이현우나 항문과 의사나 둘 다 의사인데다가 명세빈만을 좋아하게 되기 때문.

여기에 바로 노처녀들간의 사회적 위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사실 이 위계성은 현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세 명 미모 수준이 거의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1. 명세빈 : 어설퍼도 공중파 방송의 기자였다(상도 받았다) 경혼 경력 무, 집안 빚 무. 신용 상태 양호

2. 이태란 : 회복 기미 없는 병중의 아버지, 벗겨먹으려고만 하는 고모와 그의 딸, 실직 상태. 재취업 가능성 희박

3. 변정수: 유명한 색정광, 노골적이며 집요함. 이혼 경력 유, 혼혈아 출산 경험

이러한 조건 변수를 보더라도 작가나 시청자가 누구를 우위에 둘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여성 트랜디 드라마의 거의 적법한 규정처럼 이현우는 1을 무조건 추종하고, 연모하고, 러브 콜을 보낸다.  1,3의 여자는 이런 관계에 추임새를 보내는 광대에 지나지 않을 뿐. 특히 변정수는 그렇게 망가지고도 지속적으로 CF를 따낼 수 있는지, 자연인 변정수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 가족은 노처녀 앞에서 폭력적이다.

이런 가족 폭력에 가장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인물은 바로 명세빈, 브라운관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는 가족들의 최대 관심사요, 신경 써 줘야 하는 대상이다.

명세빈이 직장에서 돌아오는 신, 이미 카메라는 가족들을 담고 있다. 그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란 것이 들어보면 알파요 오메가가 오메가가 명세빈 시집 보내기다. 그러다보니 명세빈이 들어올라치면 가족들은 미끼에 걸린 고기 낚아 올리듯 드세지기 마련이다. 명세빈 집중 공략. 그것이 그 가족들의 사랑의 표현인 듯.

손위 올케는 과거 명세빈의 동창이었으면서도 가장 확실한 대적자다. 그녀는 정말 이름 그대로 '그녀'로서 자신의 볼품 없는 남편을 내세우며 '그래도 나는 결혼했다'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며, 과시하려 든다. 내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쇼일 뿐. 자신에 대한 불만족 혹은 며을 향한 열등감을 소위 공격 기제로 해소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녀의 언어 폭력은 웃기지도 않으면서도 명세빈을 무너뜨린다.(기자 정도나 되서 그 정도의 어거지에 무너지는 설정도 웃기지만)

가족들은 명의 충실한 검열관들이다. 하나같이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혹은 그녀의 현현만이 그들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능케 한다.  이러한 판옵티콘 같은 검열과 관리 체계 속에서 명의 야망과 사회적 위신은 어디론가 내동이쳐도 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결혼을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동생에게 무시당한다. '살도 안쪘는데..'

비혼은 비만만큼이나 이 집안에서 큰 야유거리이며, 걱정거리인셈. 이것이 한국의 표준적인 노처녀 가정이라고? 그렇다면 열심히 일한 당신은 떠나야 한다. 명세빈이여. 일단 그 폭력적인 가정에서 떠나라. 그리고 나서 결혼이 필요하면 해라. 그런데 그렇게 결혼해서 만든 당신의 가정에서 또 그런 노처녀가 안 나오란 법이 없다. 한국의 표준적 가정은 그렇다고? 그렇담 뭐하려 기를 쓰고 노처녀들이여 그런 가족을 만드려 드는가. 당신들의 딸이 결혼할 적앤 그런 불상사가 없을 거라고? 누가 알겠는가

# 노처녀는 사회적 질병. 훈계받고 질책 받아야 할 존재

기자의 드라마 비평이 오르고, 한겨레 21 자유게시판은 모처럼 문화적 이슈로 활기를 띠었다. 정치적 문제도 , 양병거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웃긴건 반이상이 기자의 개인적 노처녀 체험 고백성 맨트를 건드리며,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남자는 그가 왜 아직 노처녀인지를 조목조목 진단하고 처방전까지 제시한다.

요는 현대의 인텔리 노처녀들의 만성질환인 '늙었으나 우리는 지적이고, 유치하지 않다'는 미덕이 허위란 것이다. 그것은 노처녀이기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노처녀 이기 떄문에 유일한 것이라나?

그런 믿음을 갖는 노처녀야말로 더 유치하고 15살 소녀의 멘탈리티를 갖었단 것이 그의 집단 심리 분석이다.

참으로 편벽스러운 이 결론에 나는 몇 가지 댓글을 달아 놓기도 했지만, 이러한 결론이 반증하는 것은 한국 남자들의 소아병적인 여성관이다.  그들의 유치한 견해로는 모든 여자들이 '남자를 얻기 위한 전투'를 하는 걸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들은 근엄하게 서서 그들의 전투가 끝나길 기다린다. 고로 그들은 전투가 끝나도 흐트러짐 없이 걸어나오는 여자를 택할 것이란 거다. 예컨데 그 길고 관리된 메뉴큐어 발라진 손톱에 하등 흠집도 없는 암컷을 택하리란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한국 남자들이 그렇게 근엄하게 서서 관리자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게 또한 현실이니 그의 무지막지한 보편론은 여성에 와서가 아니라, 남성에 와서 깨지기 마련이다.

#  그대 왜 결혼을 원하는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결혼은 미친짓이다'란 대중소설에 영합해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양혜승이란 가수의 가사는 정말로 치졸하기 이를데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진실을 반영한다면 , 이런 것일 듯.

'결혼'이란 소재가 아직도, 여전히, 굳건히 모든 연령대의 주된 관심사란 것.

동거도 있고, 이혼도 있건만 모두 '결혼'에 대해 열광하거나 고민한다. 그럼에도 우린 아직 남성에게 결혼이 뭘 의미하는지, 남성이 왜 결혼을 원하는가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여성의 결혼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결혼을 감행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올 불륜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그런데 왜 반대 급부적으로 여성의 결혼은 그렇게 이슈가 되는가.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드라마를 인용하면서

여자는 일하고 커리어를 쌓다 보면 어느새 30이다. 그 때 상대를 찾으려 보면, 그 나이 대 남자들은 갈수록 어린 여자만을 찾는다. 더 연상을 고르다 보면 이혼경험이 있거나 유부남이다. 연하를 찾다보면 사회적으로 불안정하다. 결국 진퇴양난인것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 대작전을 벌이는 '노처녀'만이 주된 화제가 되기 마련인듯

그런데 그런 노처녀들이여, 왜 그대는 결혼을 원하는가?

단지 나이들어 혼자인 것이 패배로 인정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라면, 왜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는지,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감추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여기서 치졸한 음모론을 내밀려는 건 아니지만, 노처녀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직장과 가정의 담론 속엔 음모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 담합을 피해가는 법

나는 결혼을 강요하고, 결혼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절차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다수자의 횡포요 담합이라고 본다. 그들은 '인간은 본래 하나였는데 좌웅이주가 되었다는 둥'의 전설까지 빗대며 인간은 둘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동성애는 그럼? 하면 함구하며 얼굴이 뻘개질지 모른다. 이성이래도 격이 전혀 다른 사람 예컨데 외국인 노동자를 결혼상대자로 소개한다면? 차라리 혼자 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관습적 카르텔을 뚫고 지나가는 법은 사실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같은 드라마를 아예 만들지 않기 , 그런 드라마가 나오면 박수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기 이런 게 기본적일 것이다. 물론 저 진보적이라 표방하는 매체의 또한 가장 진보적일 듯한 기자 중 하나가 노처녀로서의 자신의 삶을 너무나 극명히 토로하는 르포성 비평을 내보냈다고 하더라도. 나는 저 드라마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다.

주위에서 드라마의 인물같은 맨트를 내뱉는 자가 있다면 (예컨데 올케) 그 사람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킬 정도의 말빨은 되야 독신으로서 그럴듯하게 살아남지 않을까? 자기 스스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그런 좌충수는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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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1-10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드라마를 한번도 안 봤지만^^ 글이 재밌어서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