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열린책들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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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가, 가슴아픈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까뮈. 그의 자전적 소설이며 마지막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최초의 인간'이란 그의 언명은 알제리의 할렘가에서 성장한 작가의 성장기 속에서 더욱 명징한 감동을 남긴다. 인간 이하의 환경과 억압 속에서도 '모든 인간'의 '권위'를 주장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고 오랜 동안 2층 버스 안에서 흔들거리며 학교에 오가며 수많은 세상에 대한 불안, 불만, 해석을 토로하는 작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창 밖에 보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 쳐진 거미줄 같은 소시민들의 '빨랫줄'이 바짝 타오르기 시작한 태양에 힘입어 빨래를 말리고 있는 풍경. 복작거리는 거리. 수업, 교사의 편향된 사관과 균형있는 '사실'을 추구하는 이제 막 중학생. 현실 이면의 것. 현실을 파고 들어 무한한 현실들의 고리를 찾는 것. 낡은 버스는 그것을 작가에게 가르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혈통과 용기와 노동과 잔혹하면서 동시에 관대한 본능, 그 모든 차원에서의 익명성 그리고 그 이름 없는 고장, 군중과 이름없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 그럼녀서도 비천함과 익명성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그 누군가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 그 역시 같은 종족에 있었다.'

<이방인>에 비하면 폭넓고 자상한 설명과 묘사로 쉽게 익힌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다 숙성된 문학적인 표현이 넘친다. <이방인>이 껄끄럽고 바짝 마른 '낱장'의 느낌이라면, <최초의 인간>은 방부 처리된 기름기가 느껴지는 '묶음'의 책이다.'그애도 간 당신들을 혐오해, 내가 볼 때 세상의 명에는 힘있는 자들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살아 있는 것 같아. 불명예도 바로 거기 있는 거야. 역사 속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드리 일단 각성하고 나면 그때는 무서운 세상이 되는 거야.'

까뮈와 싸르트르의 역사적 결별, 그 이후 까뮈는 너무나도 빈번히 그리고 무참하게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 악의에 찬 공격들은 알제리 전쟁과 카뮈의 노벨상 수상을 거쳐 그의 죽음의 순간에까지도 계속되었다. 까뮈의 노벨상과 싸르트르의 노벨상의 의미는 다르다. 까뮈의 비공산주의 정신과 싸르트르의 공산주의적 이상론. 까뮈가 더 예언적이었다는 사실이 옳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에 이르는 것도 아니었다. 팔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 보잘 것 없고 미미한 행위들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가난 속에서 살아 왔지만 자끄는 그 사무실에서 천박함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발견했고, 잃어버린 빛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최초의 인간에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임무, 카프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버린 인간을 그리는 장난을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차라리 인간이 되길 포기하는 편이 편안할 것이다. 딱딱한 갑피 안에서, 분화되지 않은 속가락 덕에 적어도 '골 때리는' 노동은 피할 수 있을 테니.

'진정한 사랑은 선택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마음은 특히 마음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피성이며, 불가피성의 인식이다. 그런데 그가 진정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한 것은 '불가피성' 뿐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오직 '어머니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를 되묻는 작가. 그에게 사랑은 '생명'과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읽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나의 유일한 사랑은 영원한 벙어리'라고 아프게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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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여행 3
카트린 클레망 지음, 양영란 옮김 / 동문선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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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생이니까 올해로 꼭 60세가 된 작가의 글, 요즘 읽어온 소설들이 영화 대본같은 착각을 일으킨다면 이 작품은 마치 설명문이나 에세이에 가깝다. 혹은 소설의 가죽을 뒤집어 씌우려고 무진 애쓴 것으로 보이는 논문이거나. 현대적 감성의 소설쓰기로 평점을 매긴다면 매우 낮은 점수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작가가 여러 수필, 논문, 기타 등을 여러 신문에 기고했던 경력이나 비소설 분야에선 탁월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졸작이라고 매도할 것은 없고 단지, 그 교양적(종교와 문명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지식)이란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소년 소녀의 눈높이에 맞게 친절하고 평이한 수준의 진술로 일관한다. 청소년은 물론 인문학적 기본 지식과 교양이 빈곤한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 하다. 종교 부분의 기술에서는 나도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그 '요점 정리' 부분은 과히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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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평선 - Q Mystery 35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8
제임스 힐튼 지음 / 해문출판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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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핏의 주연작 '티벳에서의 7년'과 비슷한 분위기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디 쯤에 '샹그릴 라'가 있을까 찾아 보기도 했다. 과연 라마승의 집단촌 등이 아마도 힐튼에게 '영감'을 준 곳이 아니었나 싶었다. '상그릴라'란 이상향의 이름은 작가가 순수하게 고안해낸 이름이지만 그 영향은 막대했다. 우리나라 촌구석(비하의 의미가 아닌 그만큼 외진 곳이란 의미임)까지 '샹그릴라'란 이름의 '다방'과 '디스코 텍' 요즘에는 심지어 '노래방'까지 성업중이다. 나는 그 창업주들이 과연 간판의 '내막'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겪었다.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힐튼을 접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은 '갑옷없는 전사'. 지금은 완전히 걸레가 된 지경이지만 삼진사에서 나온 고급 장정 전집 속에 끼여 있는 책이다. 아마도 'T.E 로렌스'의 작품과 같이 편집된 탓이다. 로렌스의 '사막의 반란'을 열 번은 읽었으니.(그에 대한 얘기는 해당 서평란에서 하자) 나는 모험 소설을 너무 좋아했다. 과거형을 쓰는 것은 요즘은 별로이기 때문이다. 힐튼은 그의 스타일이 하도 현란<?>하여 미국 소설가로 오인 받기 쉬운데 실은 써머셋 모옴과 비견될 만한 영국출신 작가다. 만년에 미국에서 잠깐 살았을 뿐이다. 주로 작품의 영화화를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가 쓴 작품 중에는 매우 미국풍의 제목이 많은데, We are not alone은 마이클 잭슨의 곡 제목과 동일하다. Good bye Mister chips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사 영어사에서 '영한 대역 문고' 시리즈 물로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길.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백작부인 역은 그 유명한 마를렌 뒤트리히가 맡기도 했다. 영화로도 봤는데, 원작의 섬세한 디테일은 살리지 못한 거 같다. 티벳의 광경이 세트장으로 대체된 탓이 크고 당시의 특수 효과가 너무 조잡해 '비행기의 불시착' 장면이 좀 허술하다.

어쨌든, 모험의 시작은 '불시착'으로 시작된다는 모범을 보인 소설로 꼽을 만하다. 이후 비숫비슷한 아류의 모험 소설이 나오고 있는데 그 것의 원조격으로 꼭 권하고 싶은 '모험소설의 고전'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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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통신
배수아 지음 / 해냄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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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관통하는 베일은 '권태'다. 현대인은 뭔가에 중독돼야 이 권태란 병(病)을 피해갈 수 있는데, 주인공들은 권태를 잔뜩 짊어져, 긁으면 물고기 비늘만큼이나 떨어져 나올 것만 같다.

그 뚜렷치 않은 흐릿한 은빛 바늘이. 도시의 새벽 같고 건물 같고 땅바닥 같은 넓죽한 회색. 참으로 권태롭다. 책을 덮을 부렵 시침이 3자(字)를 바야흐로 가리켜 가는데 '2'안의 어줍잖은 정적 속에서 참으로 권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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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보자의 꿈 홍신사상신서 52
루소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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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으로'를 외친 두명의 기억할 만한 인물. 물론 이는 서구 역사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속에는 그렇지 않은 인물이 오히려 적을 것이니.

180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핸리 데이빗 소로우와
1712년대 프랑스의 주네브란 소도시에서 태어난 장 자끄 루소.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우선 소로우는 '하버드'를 졸업한 당대의 최고 엘리트였던 것과는 달리, 루소는 정규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일이 없으며, 잡다한 잡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간 인물이란 점. 루소가 한 일 중에는 '악보 필사'도 있었고, '가정 교사'는 빈번했다. 가정 교사로 들어간 귀족 집에서 귀부인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기는 예사고, <에밀>이란 교육학 저서를 냈음에도 자신과 하녀 신분의 여자 사이에서 생긴 아이 일곱인가를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한 마디로, 루소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좋게 말하면 천재적인 감수성과 비상함으로 똘똘 뭉쳐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치기와 감성으로 상처받기 쉽고, 남의 험담을 잘하는 '덜 된' 인물이다. 이러한, 루소의 기질은 소위 <참회록>이란 책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여기 알라딘에는 '성 아우구스틴'의 '고백록'과 유별하려고 '참회록'이란 제목을 붙인 모양이지만, 내가 읽은 그의 자서전은 '고백록'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이었다.

이 책, <고독한 산보자의 꿈>도 1000원이면 '범우사'에서 나온 포켓북으로 살 수 있지만, '고백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고, 그 책의 한 챕터 정도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렇다면, 이 책의 역사상 '자서전의 백미'로 꼽히는 루소의 고백록 서두 부분을 좀 보자.

'나는 적어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자연이 나를 부어낸 거푸집을 부숴 버린 것이 잘한 일인지는 이책을 읽어 보면 판단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최대의 미덕은 이처럼 너무나 솔직한 토로이다. 그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해 써나가고 있다. 그에 비하면 <고독한 산보자의 꿈>은 조촐한 수필집에 불과하다. 어쨌든, 루소가 왜 '자연으로'라는 구호를 왜치게 되었는 지 그 소이의 문맥을 간략하게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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