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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여자들의 세상>

2013 제3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2013.3)





  대체로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영화를 본다. 가끔 비슷한 공연을 보고 또 비슷한 유머를 나눈다. 아사히 맥주와 신세계백화점 지하 베이커리로 이루어진 공동체, 도시생활자의 삶은 균일하게 개성적이게 되기 마련이다. 클래식 공연 시작 전, 어두워지기 전인 무대를 묵묵히 응시하는 사람들의 옆얼굴을 보며 이들을 이 공연장까지 이끈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될 때가 있다. 손보미의 소설 <여자들의 세상>은 그 어두워지기 전 무대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게 한다.


  그들은 결혼한 지 5년 정도 된 부부로 번화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중이고 그의 아내는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짧고 명확한 문장을 읽다보면 이 부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게 유일한 고민이던 부부. 그는 아내를 위해 ‘문화 콘텐츠를 다루는 전문 기관’에 근무중인 옛 애인을 만나게 된다. 검정 트위드 원피스, 체코식 맥줏집, 플란넬 잠옷, 장 자크 밀레노 감독의 영화, 그들이 선택한 것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게 한다. 구체적인 취향이 나열되고, 스타일이 직조된다.


  지난 해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폭우>의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무엇이 불길한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짙게 드리워진 파국의 그림자를 감지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세련된 남자는 갈등하고 의심한다. 선량하지 않은 남자를 만나고 있는 아름다운 옛 애인,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조금 피곤한 아내. 시온산의 영원한 사랑을 말하던 남자는 어느새 “그는 신성한 사랑의 맹세와 서약이 점점 사라져가고 탐욕과 추악함으로 점철된 음란함만이 이 세계에 남아있다고 느꼈다.”라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아내의 공연장을 방문한 피로한 사내들의 얼굴을 보며 “도대체 저들은 세상의 어떤 끔찍한 면을 보았을까......?”라고 생각하는 남자. 부족할 것 없는 이 세계에서, 남자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독자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 족속에 불과하니까”라고 대상 수상작 <소설작법>은 말한다. 그러나 소설 읽기가 곧 나의 삶을 응시하는 것이 되는 이런 소설을 만나면 절로 매혹되고 만다. 등단 7년차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2012년 3월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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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한 집

 정찬 (2013.2) / 문학과 지성사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한 소년이 엄마를 죽였다. 소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신문 기사라면 이런 문장으로 시작할 것이다. “‘존속살인범’이라는 말의 섬뜩함은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뽀얀 피부의 소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 사건을 서술하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빛이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이렇듯 소설은 불현듯 독자를 사건의 한복판에 던져놓는다.


  정찬의 소설 <정결한 집>은 “그러므로 어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나를 죽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소설적인 방식으로 건조하게 그린다. 소녀 명희와의 조우와 그들이 이야기하는 죽음과 폭력의 세계. 시체놀이를 하는 이들의 모습처럼, 소설은 불길함을 불현듯 던져놓는다. 죽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일주일에 세 번은 청소를 했을, 죽은 어머니가 없는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봤을, 마침내 난간에 누웠을 어떤 소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도록.


  “제가 죽음의 심연에 얼굴을 처박지 않았던 것은 저에 대한 의문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학자처럼, 우리는 죽을 걸 알면서도 안간힘을 써가며 산다. 병역기피자로 고초를 당했던 아버지도, 나치와 마오쩌둥 하의 인간들도,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지 푸른 망루의 사람들도 드리워진 폭력을 피할 수 없다. 폭력으로 이루어진 이 정결한 세계 속에 불현듯 던져진 우리에게, 정찬의 소설은 섭리 같은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작고 귀한 실마리가 된다.




*주 >

한겨레, <‘엄마 살해범’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던 그 소년>, 2012년 3월 9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13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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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 MD의 2011 추천작 중간점검

  2011년에도 수백 권의 책을 (만져) 보았습니다. 수십 권의 책을 만나고, 또 수백 권의 책을 떠나 보냈습니다. 그리고 올해가 갈 때까지 다시 수백 권의 책을 만나게 되겠지요. 이쯤에서 2011년 중간 결산! 외국소설 MD가 10권을 (링크 참조), 한국소설 MD가 10권의 소설과 5권의 시집을 골랐습니다.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책,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은 책은 눈물을 머금고 선택에서 배제했습니다. 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귀가도  / 윤영수 / 2011년 3월

   소설다운 소설,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그립다면 이 소설을 눈여겨 볼 일이다.  읽고난 후 무언가 치받치는 이야기. 읽고난 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변하는 이야기. 전통적이고 희박해진 가치에 관한 이야기. 선하고 약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바닷속 거대한 산맥처럼, 끝내 의지하고 사는 이야기. 윤영수의 연작소설집 <귀가도>는 귀갓길은 고단하여 아름답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삶의 순간, 예리하게 찍어낸 스냅사진 같은 장면에 마음이 쓰인다. 심상한 지하철 귀갓길 풍경의 속물성(도시철도999)이라든지, 평생을 학대받고 살아온 아내 혜순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편지를 쓰는 남편의 뻔뻔함(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라든지. 윤영수의 소설은 거대한 악, 스펙터클한 설정 없이도 충분히 이야기가 빛날 수 있음을 잘 말해준다.

  작가와의 만남 역시 좋았다. 좋아하는 작품을 읽고,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같은 감상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작가에게 직접 사인을 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꾸밈도 과장도 없는 정갈한 문구를 다시 본다.  

  특히 인상깊게 읽은 단편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일부를 첨부한다. 너무도 착하고 순박한 주인공 유순봉, 그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천웅씨에게 학대를 받고, TV 솔루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다. TV 너머,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나는 누구인가.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매일 감사노트를 씀으로써 십대 미혼모에서 세계 여성의 멘토가 되었노라 말한다. 그러나 그 성공담 뒤, 유순봉과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고맙다 말해도 대답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매일을 "어머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이가 끝내 "어머니, 사는 게 너무 힘이 듭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만 울고 말았다. 

 

책속에서

  피디가 수고했다며 선심 쓰듯 말했습니다. "미림이를 위해서, 성희롱은 딱 한 번뿐이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곤란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촬영팀은 뭐했느냐고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고요." 차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말했습니다. "저 사람, 지금 잡아가주세요. 되도록 빨리 데려가세요." 어머니, 어머니께 항상 감사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정말 힘드네요. 중계차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칵 죽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곁에 가면 안 될까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152쪽)

  "갖가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모양은 볼품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쭉쭉 하늘로 뻗어올라 가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나무도 많고요 그들이 다같이 모여 숲을 이룹니다." 내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무들끼리 서로 화내거나 싸우지 말고 잘 어울려 살면 좋겠습니다. 웬만큼은 양보해가면서요." "그럼요 유순봉씨 말이 맞습니다." 의사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163쪽)

 

 

저녁의 구애 / 편혜영 / 2011년 3월

  전업작가가 된 이후 편혜영 작가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집. 야릇한 표지처럼 기이한 이야기가 심장을 두드린다. 편혜영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병든 아이를 태우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달리며 병원을 찾는 길,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살견의 울음소리. <사육장 속으로> 히스테릭한 영화 같던 공포는 이제 일상을 잠식했고, 그리하여 더욱 정교해졌다. 

  매일 같은 시각 지하철을 타고, 매일 같은 시각에 복사실 문을 여는 학교 직원이 있다. 누군가 선로에 떨어져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 남자가 걱정한 것은 같은 시각 지하철을 탈 수 없고, 그러므로 같은 시각 복사실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일한 점심) 대학시절 등교길, 유일한 등교 수단이던 지하철이 어느 40대 가장의 자살로 막힌 적이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지각을 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나는 휴대전화로 지하철이 오지 않는 지하철 선로를 찍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꽃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한다. 매뉴얼에 따라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불안을 느끼는 것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곳이 바로 리빙 헬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편혜영의 소설이 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더 자주, 더 오래 빛나는 글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편혜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이미 책장을 넘긴다.

 책속에서

   기계는 돌아갔고 통조림은 만들어졌고 기한에 맞춰 납품되었고 선적되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휴게실에 모이는 것도 같았다. 뚜껑을 딴 통조림을 기준점 삼아 둥글게 모여 앉았다. 통조림 뚜껑을 딸 때는 밥을 먹는 것인지 제조 후 검사를 하는 것인지 잠시 헛갈렸으나 막상 먹기 시작하면 생산과정의 일부라는 듯 기계적으로 입을 놀렸다. 통조림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직원도 없었지만 내색하며 싫어하는 직원도 없어서 밥을 먹는 내내 모두 묵묵했다. (…) 기계에서 풍기는 소음과 공장 안에 떠도는 냄새 때문에 미감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고 떠들어댔지만, 다음 날 시간에 쫓겨 그냥 뚜껑만 딴 통조림으로 밥을 먹었을 때는 다시 입맛이 돌았다. (통조림 공장 中)
 

 

  

  화투치는 고양이 / 이화경 / 2011년 2월

   발군의 역사소설 <꾼>을 선보였던 이화경 작가의 소설집. 대개 특정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특정한 스타일, 특정한 분위기의 변주임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 소설집은 각 소설마다 주제와 분위기가 너무도 상이해 더욱 즐겁게 읽었다.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이라는 말을 외우지 못해 창피를 당하고 스스로 말문을 닫은 소녀. 뒷방의 할아버지에게 화투를 배우며 생의 비의를 깨닫는다. 생쥐 고기를 먹듯 고약한 삶의 시작을. (화투 치는 고양이),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의 생일, 언니의 남자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친구를 보며 생의 폭력성에 소스라치는 소녀의 감수성. (지구에 오신 걸 환영해요)의 이야기는 소녀들처럼 섬세하다. 반면 육식성 형에 가려 초식성 삶을 살아온 남자의 실존(초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겁고, 비전향 장기수인 노신사가 봉사자로 온 여인을 만나며 애정과 오욕, 자기혐오와 그리움을 그려낸 이야기(예사로운, 예사로운 사랑)는 애틋하기 그지없다. 사랑과 공포와 그리움과 유머, 다채로운 이야기의 공통점은, 어떤 이야기를 펼치든 제법 읽을짐하다는 것이다.

책속에서

 당신이 고통받고 힘들 때, 내게로 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할 따름이오. 미조(迷鳥)를 아시오? 보통 때에는 그 지방에 살지도 않고 날아들지도 않지만,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예기치 않은 폭풍 따위로 인해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새 말이오. 당신의 불안한 눈빛, 무척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안면 근육의 미세한 경련을 대문 앞에서 맞닥뜨리면서, 감옥 안으로 잘못 들어온 한 마리 새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소. 그러나 누군들 미조가 아니겠소. 우리 모두 지상에 깃들 처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헤매는 떠돌이새가 아니겠소. 

<예사로운, 예사로운 사랑> 113쪽

 

 

 

염승숙 / 노웨어맨 / 2011년 3월  

 

   "산다는 건,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는 거란다." 이 소설집은 갑자기 비를 맞은,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일이면 손이 사라질 남자, 내일이면 목욕탕에서 때를 밀 수도 없는 사실에 절규한다. 소설은 환상과 현실을 적절히 조합해 치열한 현실의 모습을 그려냈다.

  표제작 <노웨어맨>이 인상적이었던 건 신용, 파산, 구제, 대출, 회생 등의 현실적 제약이 물리적인 것으로 변해 인간의 표면에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가짜를 만들어 파는 남자, 자신의 아버지가 노웨어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절규, 아무 것도 아니라니.  

보이지 않는 것들에 항상 매혹되어왔다는 작가의 말을 읽는다. 손목을, 존재를 잃고 사라져가는 사람들. 이 소설집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책속에서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는 증후군처럼 번져나가는 노웨어맨 현상에 대한 기삿거리들로 넘쳐났다. 노웨어맨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인지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인지, 그 뜻은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하고, 장공수는노웨어맨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그리고 불쑥불쑥 머리꼭지까지 치받는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가짜인데, 진짜를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인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노웨어맨이라니, 아무것도, 아니라니. <노웨어맨, 68쪽>
 

 

 

 

 

 김이설 / 환영 / 2011년 6월  

2010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독자 낭독회에서 작가를 만났다. 고요하고 순한 분이 이토록 독한 글을 쓴다는 사실이 놀라워 다시 보았다. 언젠가 소설집을 내게 된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 싶다고 말하던 작가가 두번째 경장편을 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을 고시원에서 만나 아이를 낳고, 옥탑방에서 사는 삶. 아이를 맡기러 간 시댁에서 금반지를 훔치는 여자, 여자는 스스로 현실이 된다. 여자는 돈을 벌기 위해 백숙집에서 일을 하고, 스스로를 팔고, 그러면서도 살아남겠노라 다짐한다. 가족이 남긴 빚, 아이의 장애, 모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나는 누구보다도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193쪽)" 라고 하며. 이토록 질기고, 독하고, 모질 수 있을까. 김이설의 소설은 과도한 교화도, 과도한 감정이입도 없이, 실현불가능한 값싼 희망 대신 '현실'을 치밀하게 쌓아올린다.   

책속에서

 "여기가 처음이라더니, 할 만해?" 
어느새 다가온 이모님이 무 한 조각을 내밀었다. 알싸하고 달짝지근한 겨울 무였다. 
"돈 버는 일이 다 그렇죠, 뭐." 
나는 무를 우물거리며 치마를 탁탁 털었다. 괜히 멋쩍었다. 부스스한 먼지가 일었다. 
"젊으니까 그런 일이라도 하지. 너네들은 좋겠다." 
"날씬하고 젊으니까 손님들이 너만 찾고. 넌 더 좋겠더라." 
좋은 일인가.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 옷을 벗고 받는 돈이었다. 금반지도 생기고 화장품도 생기고 옷도 생겼다. 그래도 옥탑방에 살고, 통장의 잔액은 늘지 않았다. 나는 능숙하게 다리를 벌렸지만, 물가에 서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81쪽)

 

 

 

 하재영 / 달팽이들 / 2011년 3월

  남자친구가 여자에게 말했다. 넌 달팽이 같다고. 관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달팽이 껍데기 속으로 파고든 삶. 소설 속 여자의 삶은 도시 원룸생활자의 삶의 전형이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며 텔레비전, 인터넷, 작업, 잠으로 생활을 나눠 단조로운 삶을 산다. 가끔 들려오는 옆집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상상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 언제나 상상하던 모습은 불륜에 빠진 직장여성. 그러나 실제의 그녀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주인공의 완전무결한 원룸이 흔들린다.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 위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인사하기보단 타이밍을 맞춰 마주치지 않게 나가려는 나 역시 그들과 같다. 같이 밥먹어주는 아르바이트가 존재하고, 열등감에 폭식을 해 몸을 불리는 여자가 존재한다. 껍데기 속에 스스로를 가둔 사람들에 관한 유머러스하고 씁쓸한 이야기.

책속에서
 

 "왜 불륜관계라고 생각하셨어요?" 
중년남자가 끼어든다. 나는 입을 다문다. 왜 그렇게 생각했던가. 
"글쎄..... 아무튼 그 여자는 퇴근하고 나면....." 
"피해자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어요. 대학생이었거든요." 
또 중년남자.   
"그랬.....나요?"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B102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그녀는 잠자리에서 끊임없이 괴성을 지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유부남인 옛 애인과 불륜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나 쇼핑을 즐기고 정장을 자주 입는 사람이었나 (...) 절도, 살인, 강간, 납치..... 세상은 여섯 달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B102호의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기사에 등장하는 익명의 피해자들이 모두 그녀인 것만 같다.  <달팽이들. 51쪽> 

 

 

 

 최제훈 / 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1월 

  <퀴르발 남작의 성> 역시 2010년 가장 돋보이는 한국소설 중 하나였다. 최제훈 작가가 내놓은 첫번째 장편소설. 진정한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소설의 숲. '악마'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지닌) 카페 주인의 초대장을 받은 회원들이 눈덮인 산장에 모여 온갖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르소설적 문법에 충실한 밀실살인으로 보이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속 주인공들의 이면, 거짓말이 밝혀지고, 소설이 소설을 물고 오고,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소설인지 소설 속 소설인지 알 수 없는. 

  잔인한 상상이 이어지는 이야기. 모질고 여문 이야기에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 가장 완벽한 소설을 향한 욕망도. 최제훈의 소설에선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느껴진다. 그게 최제훈의 소설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다. 

책속에서  

산장에는 이제 한 사람만 남았다. 메이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약도 없는 시간을 버틴다. 죽은 자들의 살로 허기를 달래면서. 
괜찮아,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우선은 그것만 생각해. 내가 살아 있는 한 거야? 그런데, 내가 누구지?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알 수 있겠지. 살아 있는지, 누가 살아남은 건지..... 이젠 못하겠어. 나..... 너무, 졸려. 나도 그래.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버텨보자. 이젠 그냥 자도 되지 않을까? 게임은 이미 끝났잖아. 정말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해? 감당할 수 있겠어, 잠이 들면 찾아올지도 모를 여섯번째 꿈을? 여섯번째 꿈...... 그게 뭐가 됐든, 알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그러니 기운 내자. 만일 우리가 지금 악마의 꿈속에 들어와있는 거라면,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악마가 잠을 깰 때까지. 그럼, 이번에는 내가 먼저 시작할게.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일곱 명은 산장에 모였어. 하지만 정작 우리를 초대한 악마는 오지 않았지.....   <π, 275쪽>

 

 

   
최수철 / 침대 / 2011년 6월  

  "죽음은 삶을 위한 침대이고, 삶은 죽음을 위한 침대다. 천하만물, 우주만상은 각기 서로에게 침대다. 만인은 각자 서로에게 침대다."(94쪽) 지적인 문장을 선보여온 최수철 작가가 6년 만에 발표한 묵직한 소설. 그러나 무게감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침대가 되어 백여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침대가 겪은 사람과 세상, 삼라만상이 짤막짤막하게 스쳐 지나간다. 탄탄하면서도 능수능란한 구성 속, 무궁무진한 인간사의 세파가 스친다.

  침대를 둘러싼 명상록을 읽는 듯한 스타일이 명확한 이야기 속. 마음에 드는 문장을 툭툭 발견한다. 예컨대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에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침대에 누울 수는 있어도 꿈꾸는 법을 잊었고, 사라진 꿈을 되살려낼 방법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193쪽)"같은. 침대에서 태어나 침대에서 사랑하고 침대에서 살며 침대에서 사망하는 게 우리의 삶, 침대의 항해는 기기묘묘하다. 묘하고 어둑어둑한 에로티시즘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책속에서 

한 남자에게 다소 특이한 애인이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연락이 잘 되지 않다가, 며칠 간격을 두고 한밤중에 그의 방으로 몰래 찾아들었다. (...) 장례를 치르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녀는 두 사람의 추억이 침대를 중심으로 이뤄져왔고, 심지어 침대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목수에게 부탁하여 그 침대로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그 속에 뉘었다. 그러고는 관뚜껑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몰래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그의 곁에 누울 때, 그녀의 귓가에서는 생전에 그가 밤마다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
당신은 내가 죽으면 내 관속으로도 들어올 여자야." (287쪽)

  

 

 
 백가흠 / 힌트는 도련님 / 2011년 7월

  문학인이라고 할 때 느끼는 어떤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가 적어도 내겐 있다. 감각을 불콰하게 자극하는 야생적인 이미지를 살려내는 소설가 백가흠, 그의 세번째 소설집은 문학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포트레이트에 가깝다. 지금 백가흠이 쓸 수 있는 글과, 지금 백가흠이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의 본령, 그리고 지금 백가흠이라는 작가가 위치해있는 곳이 소설집에 담겨있다.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건 용기있는 일이다. 마지막 소설 한 편만 쓰고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결심을 한 소설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세상에는 못나게 구는. <힌트는 도련님>의 주인공 소설가가 소개받은 예쁜 여자에게 스스로가 소설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교보문고로 여자를 데려가는 부분은 백미다. 인기없는 책이라 찾을 수 없다며 민망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습고 매력적이다. 

  색과 지향이 확실한 밀도있는 단편의 향연 덕택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백가흠스러웠던 소설, <쁘이거나 쯔이거나>에서 끝내 아내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매매혼으로 한국을 찾은 아내를 학대하던 사내들의 폭력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역시 백가흠이구나 싶다가도, 왜소증에 걸린 사내의 삶의 풍경을 보여주었던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를 보며 슬쩍 웃게 된다. 독해져야 한다, 소설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책속에서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이 좀체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누군가 이 와중에 방귀를 뀌었는지 탁한 냄새가 사람들을 자극시킨다. 벨을 눌러야 하는데 손이 닿질 않는다. 그는 살을 맞대고 같이 왔던 여자에게 천장에 붙어있는 벨을 눌러달라고 부탁한다. 여자가 벨을 눌러준다. 손이 빠져나간 그녀의 가슴에 그의 턱이 가 닿는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알고 있는지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뚫고 정류장에 내리는 일이다. '독해져야 한다.' 그는 속으로 다짐한다.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억지로 틈 사이로 밀어 넣는다. 그의 왜소한 몸이 조금씩, 조금씩 사람과 사람 사이, 틈 없던 틈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간다.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157쪽>

 

 

 

 그녀석 덕분에 / 이경혜 지음 / 2011년 3월 

 청소년 소설은 생기있어 좋다. 밝은 소설이든, 밝지 않은 소설이든 청소년 소설의 이야기는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건강한 데가 있다.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청소년 소설을 낸 이경혜 작가의 두번째 작품인 이 책은, 단편 세 편과 중편 한 편으로 이뤄져 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건강과 활기가 넘치는 그 나이의 치기와 떨림, 그리고 고민이 담겨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그녀석 덕분에>는 바퀴벌레가 내가 되고, 내가 바퀴벌레가 된, 호접지몽 같은 이야기이다. 고3인 내 자리를 대신한 바퀴벌레와, 바퀴벌레 대신 자유를 찾은 '나', 기발한 설정 속 철학적 메시지가 있다. 진짜 나보다 더욱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바퀴벌레, 바퀴벌레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하고 싶던 것이 음악임을 깨닫는 나. '나'가 나답게 살 수 없다면, 더 나다울 수 있는 존재에 '나'를 양보하는 게 옳지 않은가. 비단 청소년만의 고민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깊이가 있다. '그녀석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진짜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 청소년의 것으로만 남겨두기엔 아쉬운 게 사실이다.    

 

 

한국소설/시 MD가 추천하는 2011년의 시 역시 가능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읽혔으면 싶은 시집을 선정하려 노력했습니다. 허수경의 새 시집은 도저히 넣지 않을 도리가 없어 넣었습니다.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을 덧붙이는 건 무의미한 듯해, 시집만큼은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발췌하는 것을 중심으로, 덧붙이는 말을 최대한 갈음하려 합니다.

  

허수경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2011년 1월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시인의 말을 본 순간, 이 시집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수수께끼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뜨건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냥 말해보는 거야 

적혈구가 백혈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차곡차곡 접혀진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넣는 것처럼

 

 

 

 박형준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2011년 7월

시인의 낭독회, 사회를 맡은 젊은 시인은 감히 서정의 귀환이라 이름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가슴 떨리는 제목처럼, 이 시집을 읽으며 몇 번이나 마음이 아팠다. 소개할 수 있는 시가 한정되어 있어 아쉬울 뿐.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전문)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펄럭거리는 잎맥 자국이 있다
대야의 물로 성(性)을 씻는 여인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민달팽이가 긴다 

녹색 셀로판지로 된 
여인숙 출입문 밖에 바다가 와 있다
여인이 사라지고
대야의 물 환하다
쭈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깊어가는 거울 속

(전문)

 

 
계단의 끝 - 여림을 추억함

나는 반지하도 아니고 일 층도 아닌 지층에 산다. 그림자는 매번 계단 끝에 굴러떨어진다. 산비탈에 선 남양주장례식장, 얼어 있는 낙엽, 비 내리는 봄밤 내가 사는 집 현관에 옹이처럼 달라붙은 살구꽃. 그 순간의 이미지로 계단 아래 살고 있다. 그리고 늦은 밤에 귀가하면 나는 그림자와 함께 계단의 끝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김언희 / 요즘 우울하십니까? / 2011년 4월 

 제목부터 쎄다. 시는 더 쎄다.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 상스러운 단어와 키치적인 그림의 조합. 어쩐지 나빠지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이 시집을 읽는다. 이 시집을 읽으면 뭔가가 풀리는 느낌이다.    

 

마그나 카르타
- 선언하면서 동시에 절규할 수 있다면  


아침부터 썩어 있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소
껌껌한 콘크리트 방주를 타고 밤마다 대홍수의 꿈을 꿀 권리가 있소
머리 위로 똥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꿈을 밤마다 꿀 권리가 있소
에미 애비도 몰라볼 권리가 있고 딱 오 분만 모친의 부고(訃告)를 즐길 권리가 있소
곡(哭)을 하면서 다리를 떨 권리가 있고 병풍 뒤에서 휘파람을 불 권리가 있소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페니스 안젤리쿠스로 번번이 고쳐들을 권리가 있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수음을 할 권리가 있소
수음을 하면서 숨이 끊어질 권리가 있소
더이상 미래가 궁금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젓가락 행진곡만 삼십 년을 칠 권리가 피가 나도록 칠 권리가 있소 (...)
먼눈이 또 멀 권리가 있고
무엇보다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소
대공원의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
똥을 눌 권리가 있는 것처럼

 

 

 

 김윤이 /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 2011년 3월

   
 흑발, 소녀, 누드. 시집의 제목부터가 서정이다. 내 속의 미숙함이 사무칠 때 이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언덕 위의 집 


온 산 활활 물들이는 소리, 등성이 타고 앞마당까지 내려왔더랬죠 잡목들 파수 서던 언덕 위의 집. 날 앞서 늙는 씨앗 수북 배달됐더랬죠
지금도 마당가에는 배냇젖을 뗀 감꽃마냥 져요 뚝, , 성급하게
해가 져요,

하학종이 들리고 사람 태우지 않는 화물열차 지나가요
기ㅡ일게 기ㅡ일게
나는 코스모스 돌아 집으로 가요 풋감을 드시는 그리운 할머니, 나는 왜 자라지 않나요

 


  
 

유희경 / 오늘 아침 단어 / 2011년 6월
  

이 시집의  제목을 본 이후, 가끔 오늘 아침 내가 떠올린 첫 단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사라져가는 것들, 나는 그 뒷모습에 자주 매혹된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할 수있을까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무를 사러 나왔는데 밑동 잘린 눈이 내린다 당신, 무얼 상상했기에 이리도 하얀 눈이 내리나 그렇게,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한 사내가 넘어진다 일어나 툭툭 털어내는, 그의 잠바가 흐리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고요 그 중간쯤을 올려다본다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 나는 오독오독한 그런 상황이 참 재밌어 또 슬프다 함께 사라져버릴 것들 그리고 잊혀가는 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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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이형 소설 <큰 늑대 파랑>은 물렁해서 불행한 청춘의 이야기를 섬뜩한 목소리로 건넨다. 시위대와 함께 투쟁하는 대신 이화예술극장에서 <저수지의 개들>을 보고 누군가의 자취집에서 '오에카키'로 늑대 파랑을 창조한 네 명의 청춘. 십년 후 사라는 제인 오스틴과 에쿠니 가오리의 가상 대담 따위 원고를 끼적이며, 집 안에서만 서식하는 고도비만 프리랜서 라이터가 되었다. 마지막 섹스는 대학 3학년, 인터넷에 연재하는 SF물의 로맨스마저 현실감이 없다.

사라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삶은 별 게 아니었다. 훌륭한 드립커피나 적절한 순간에 흘러나오는 펫 숍 보이스의 노래, 닥터 하우스의 귀여운 미소, 좋은 책의 한 구절 같은 것들이면 충분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물렁한 청춘들에겐 그 작은 행복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드립커피 마저도, 닥터 하우스마저도 수입 없이는 향유할 수 없다. 한때는 신기한 상상력을 발휘하던 광고의 매력에 빠져있었을 재혁. 시시껄렁한 광고회사에서 이주 노동자 밴드를 착취해가며 PT를 지휘한다. 결과는 그들의 딸의 사망. 네 시간의 취침 후 일요일까지 이를 악물고 출근하는 대기업 외주 사보 기자 정희의 삶은 어떤가. 그리고 그들의 십년 전, 빛나는 사라, 재혁, 정희의 모습을 사랑했던 아영, 2주에 한 번 의무적으로 선을 보는 그녀의 삶은 어떤가. 세상은 그들의 꿈과 열정을 저당잡았다. 사라, 재혁, 정희, 혹은 아영. 이들처럼 꿈을 저당잡힌 사람의 이름을 열 개 이상 헤아려볼 수 있다. 인풋과 아웃풋이 터무니없는 적자 거래를 하고 있는..

 


2.  



   알랭 드 보통을 연상시키는 재기발랄한 소설가 제프리 무어의 <기억술사>에는 낭만적인 메모리 마스터들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노엘 부런, 그는 색깔과 형태로 세상을 느낀다. 그와 아버지는 시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가장 고차원적인 감각에 대해. 

   "제일 꼭대기에 있는 건 바로 시야. 최소한 옛날에 쓰인 시들 말이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피와 영혼 속에 그만큼 멀리, 그만큼 깊이 파고들지 못해. 셰익스피어가 베토벤보다 더 위대하단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소리 '그리고' 의미를 갖고 있었으니까. 어른이 되더라도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해. 시는 천상에 있고, 티브이는 지옥에 있다." (23p)

  "이 세속적인 세상, 영혼이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건 오직 시인들뿐이야. 그걸 기억해라, 노엘." (27p)

"왜 오로지 시만 외우고 싶어하는 거지?" 보르타 박사와 그의 연구원들은 소리나 리듬이 기억을 도와주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시는 창조의 정점이기 때문이에요." 노엘은 대답했다. "시만큼 피와 영혼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걸 절대로 잊어선 안 돼요." (33p)
  

   시는 천상에 있다, 영혼이 죽어버린 세상, 남은 건 오직 시인 뿐이다, 시만큼 피와 영혼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 것은 어떤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떨림과 전율, 시인이 느낀 감각에 빚을 지기 위해.

 


3.

시를 읽는 것은 예를 들면,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동작을 멈출 줄 아는 도롱뇽 같아. 끝에 닿기 전에 한 번쯤 정지하는 일 말야. 언니는 동물도감을 펼치고 도롱뇽 꼬리를 부엌칼로 잘라 낸다. 쪽문을 드나들다 키가 큰 언니는 매일 밤 흰 목을 구부린다. 난간에 걸친 달이 몸속에 뼈를 세울 때마다 언니는 어깨가 아프다. 그를 찾아가도 될까?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으므로 언니는 밤마다 짐을 꾸린다

- 첫사랑, 이영주, <언니에게> 중


어깨가 아픈 목이 흰 언니를 만나기 위해서고,

또 예를 들면,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와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는. 블랭크 블랭크. 너의 야윈 등이 보이고 마른 뼈들과 뼈마디의 적막과 그 적막이 내뱉는 힘줄보다 질긴 고백. 블랭크 하치. 실패한 곡선에도 밤은 올까. 너는 단 한번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나는 너에 대해 말하는 일에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느껴진다.

- 블랭크 하치,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중

 

   체온이라는 슬픈 온도, 같은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시를 읽는 것과 시인의 꿈에 빚을 지는 것이 같은 일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1967년,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던 폴 오스터 <보이지 않는> 속 자신만만한 시인 지망생 '워커'에게도 시인이 된다는 것은 생계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이미 일가를 이룬 시인 허수경도 정독 도서관에서 웃으며 말했다. 고고학과 시의 공통점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시인의 웃음에 나도 웃었다.
 
 



4.

"혁명을 하기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풍경을 읊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中) 시대다. 읽기도 쓰기도 빵이 되진 않는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름답고 잔혹한 문장에 떨려하는 것은, 황홀하지만 호사스럽고 무용한 취미다.

그러나 계속 시를 읽으련다. 시를 소비해서라도 시인에게 진 빚을 까야 할 것 같아서. 교통카드를 찍듯, 마일리지 카드를 긁듯, 대출금 자동이체를 하듯. 가끔은 이 빚에 대한 지불에도 합당한 절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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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가 일어선다. 그림자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걸, 가여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전자상가에서 소박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은교와 무재. 도저히 삶을 견딜 수 없어질 때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일어서는 그림자를 붙잡는 것에 대한 초현실적 상상에서 출발한 이 소설, 따뜻한 죄책감이 흐른다. 소설이 떠오르게 만드는 어떤 기억이 아프다.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 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17~18p) 
   

 

 

무재의 아버지. 개연적으로 빚을 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가족을 부양하다 논리적 인과관계에 따라 개연적으로 빚을 지고, 개연적으로 사망한다. 전자상가의 사람들이 개연적으로 각자의 아픔을 겪고 개연적으로 일어선 그림자를 지니게 된다. 그들의 고통이 개인 문제가 아닌, 개연적인 어떤 구조 때문이라는 걸 그들은 안다. 그림자를 눌러두기엔 그의 존재가 지닌 가치가 지나치게 가볍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너무 쉬이 가볍게 말하기 때문이다. 철거가 예정되어 있는 전자상가, 상가에서 아버지는 장사를 했다. 사람들은 쉽게도 상가가 있던 곳을 슬럼이라고 말한다. 그곳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도.  

아버지가 여기서 난로를 팔았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나 누나들하고 와 보면 멀리서부터 그가 가게 앞에 의자를 내어 두고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중략) 손에 기름이 밴다고 순대 밑동에 신문지를 감아서 내어 주던 모습이나, 집으로 돌아갈 때 동전 몇 개를 쥐여주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한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장사를 어떻게 했을까 싶은 만큼 말도 서툴고 여러 모로 서툰 점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함께 순대를 먹으며 앉아 있다가도 사람이 지나가면 슬쩍 일어나서 무엇을 찾느냐고, 뭐가 필요하냐고 말을 걸곤 했어요. (중략)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하고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p) 

    

   아버지에 대한 무재씨의 기억이, 그 지극히 절제된 서술이 몹시도 슬펐다. 의연할수록 슬픔은 더욱 와닿기 마련이다. 죽어가기 여드레 전, 절제된 서술로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담긴 소설 <팅커스>에도 그런 의연한 슬픔이 드러나 있다. 죽어가는 남편을 보면서도 애써 웃어보는 아내의 시선이 기억에 남아 기록해본다. 

사타구니의 암으로 인한 첫 번째 방사선 치료를 받았을 때 두 다리가 해변의 죽은 바다표범처럼 부어오르고 나무토막처럼 단단해진 것도 어쩌면 운동 부족 때문인지 몰랐다. (중략) 그의 아내는 밤에 침대에서 남편의 파자마 속 다리를 만질 때면 떡갈나무나 단풍나무가 떠올라, 지하실 그의 작업장으로 내려가 사포와 착색제를 가져다 마치 가구처럼 반질반질하게 다듬고 붓으로 색을 칠하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한번은 내 남편이 탁자라니,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으려다 큰 소리로 씨근거리기도 했다. 그런 뒤에 너무 마음이 안 좋아 울고 말았다. (14p)

 

  

  아버지는 많이 말랐다. 반세기 넘게 사용한 몸은 조금씩 마모되기 시작한다. 이삼 주에 한 번 아버지의 발톱을 잘라 드린다. 아버지의 발톱은 꼭 아버지처럼 말랐다. 고목나무처럼 마른 아버지의 발톱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언젠가 이 발톱이 영영 말라버릴 날이 올 것임을 생각하면 선득해지곤 한다. 백의 그림자와 팅커스를 읽으면서 고목나무 껍질처럼 마른 아버지의 발톱을 떠올렸다. 그 순간엔 눈물이 나서 쑥스럽게도 지하철 역 앞에서 혼자 훌쩍대고 말았다. 

  누군가 발견하거나, 발견하지 않거나.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있다. 안간힘을 써서 그림자를 누르며, 그림자를 따라가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며. 그보다 큰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고, 추억하며. 오가는 길이 번거로울까 스무 개의 알전구에 다시 한 개의 알전구를 추가해주는 오무사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몇만원 짜리 중고차를 타고 데이트를 하는 소박한 연인의 마음으로.

  새해엔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무재와 은교, 그들이 떠난 먼 길, 반드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은교씨와 무재씨가 그 새벽녘 꼭 누군가를 만났길, 뜨거운 국물도 마시며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라도 주억거려봤길 바란다. 무재씨와 은교씨의 소박한 말투를 타 분야 MD님과 흉내내며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숫기없고 간이 덜 밴 말투를 따라하다 보면 조금쯤 기름기가 빠지는 느낌이다. 

  올해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를 꼽자면 이 책을 만족스럽게 프로모션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반면 이 책의 초판 1쇄를 지니고 있다는 건 먼 훗날 몹시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현재 판매중인 도서도 초판 1쇄일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만난 가장 희고 맑은 슬픔, 황정은의 白의 그림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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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2010-12-2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부분들 때문인지 엠디님의 아쉬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의 그림자'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곧 읽어보겠습니다. 엠디님도 새해엔 조금 더 따뜻하시길. : )

한국소설MD김효선 2010-12-29 11: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타가 있어 고치러 들어왔다 실시간으로 보았네요. ^^; 읽어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강력 추천합니다. ㅎㅎ 따뜻하게 연말 나시고 새해도 따끈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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