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소설 MD의 2011 추천작 중간점검
2011년에도 수백 권의 책을 (만져) 보았습니다. 수십 권의 책을 만나고, 또 수백 권의 책을 떠나 보냈습니다. 그리고 올해가 갈 때까지 다시 수백 권의 책을 만나게 되겠지요. 이쯤에서 2011년 중간 결산! 외국소설 MD가 10권을 (링크 참조), 한국소설 MD가 10권의 소설과 5권의 시집을 골랐습니다.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책,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은 책은 눈물을 머금고 선택에서 배제했습니다. 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귀가도 / 윤영수 / 2011년 3월
소설다운 소설,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그립다면 이 소설을 눈여겨 볼 일이다. 읽고난 후 무언가 치받치는 이야기. 읽고난 후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변하는 이야기. 전통적이고 희박해진 가치에 관한 이야기. 선하고 약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바닷속 거대한 산맥처럼, 끝내 의지하고 사는 이야기. 윤영수의 연작소설집 <귀가도>는 귀갓길은 고단하여 아름답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삶의 순간, 예리하게 찍어낸 스냅사진 같은 장면에 마음이 쓰인다. 심상한 지하철 귀갓길 풍경의 속물성(도시철도999)이라든지, 평생을 학대받고 살아온 아내 혜순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편지를 쓰는 남편의 뻔뻔함(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라든지. 윤영수의 소설은 거대한 악, 스펙터클한 설정 없이도 충분히 이야기가 빛날 수 있음을 잘 말해준다.
작가와의 만남 역시 좋았다. 좋아하는 작품을 읽고,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같은 감상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작가에게 직접 사인을 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꾸밈도 과장도 없는 정갈한 문구를 다시 본다.
특히 인상깊게 읽은 단편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일부를 첨부한다. 너무도 착하고 순박한 주인공 유순봉, 그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천웅씨에게 학대를 받고, TV 솔루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다. TV 너머,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나는 누구인가.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매일 감사노트를 씀으로써 십대 미혼모에서 세계 여성의 멘토가 되었노라 말한다. 그러나 그 성공담 뒤, 유순봉과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고맙다 말해도 대답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매일을 "어머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이가 끝내 "어머니, 사는 게 너무 힘이 듭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만 울고 말았다.
책속에서
피디가 수고했다며 선심 쓰듯 말했습니다. "미림이를 위해서, 성희롱은 딱 한 번뿐이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곤란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촬영팀은 뭐했느냐고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고요." 차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말했습니다. "저 사람, 지금 잡아가주세요. 되도록 빨리 데려가세요." 어머니, 어머니께 항상 감사드려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기가 정말 힘드네요. 중계차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칵 죽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곁에 가면 안 될까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152쪽)
"갖가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모양은 볼품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쭉쭉 하늘로 뻗어올라 가구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나무도 많고요 그들이 다같이 모여 숲을 이룹니다." 내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무들끼리 서로 화내거나 싸우지 말고 잘 어울려 살면 좋겠습니다. 웬만큼은 양보해가면서요." "그럼요 유순봉씨 말이 맞습니다." 의사의 칭찬에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163쪽)
저녁의 구애 / 편혜영 / 2011년 3월
전업작가가 된 이후 편혜영 작가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집. 야릇한 표지처럼 기이한 이야기가 심장을 두드린다. 편혜영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병든 아이를 태우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달리며 병원을 찾는 길,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살견의 울음소리. <사육장 속으로> 히스테릭한 영화 같던 공포는 이제 일상을 잠식했고, 그리하여 더욱 정교해졌다.
매일 같은 시각 지하철을 타고, 매일 같은 시각에 복사실 문을 여는 학교 직원이 있다. 누군가 선로에 떨어져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 남자가 걱정한 것은 같은 시각 지하철을 탈 수 없고, 그러므로 같은 시각 복사실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일한 점심) 대학시절 등교길, 유일한 등교 수단이던 지하철이 어느 40대 가장의 자살로 막힌 적이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지각을 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나는 휴대전화로 지하철이 오지 않는 지하철 선로를 찍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꽃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한다. 매뉴얼에 따라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불안을 느끼는 것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곳이 바로 리빙 헬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편혜영의 소설이 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더 자주, 더 오래 빛나는 글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편혜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는 이미 책장을 넘긴다.
책속에서
기계는 돌아갔고 통조림은 만들어졌고 기한에 맞춰 납품되었고 선적되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휴게실에 모이는 것도 같았다. 뚜껑을 딴 통조림을 기준점 삼아 둥글게 모여 앉았다. 통조림 뚜껑을 딸 때는 밥을 먹는 것인지 제조 후 검사를 하는 것인지 잠시 헛갈렸으나 막상 먹기 시작하면 생산과정의 일부라는 듯 기계적으로 입을 놀렸다. 통조림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직원도 없었지만 내색하며 싫어하는 직원도 없어서 밥을 먹는 내내 모두 묵묵했다. (…) 기계에서 풍기는 소음과 공장 안에 떠도는 냄새 때문에 미감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고 떠들어댔지만, 다음 날 시간에 쫓겨 그냥 뚜껑만 딴 통조림으로 밥을 먹었을 때는 다시 입맛이 돌았다. (통조림 공장 中)
화투치는 고양이 / 이화경 / 2011년 2월
발군의 역사소설 <꾼>을 선보였던 이화경 작가의 소설집. 대개 특정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특정한 스타일, 특정한 분위기의 변주임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 소설집은 각 소설마다 주제와 분위기가 너무도 상이해 더욱 즐겁게 읽었다.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이라는 말을 외우지 못해 창피를 당하고 스스로 말문을 닫은 소녀. 뒷방의 할아버지에게 화투를 배우며 생의 비의를 깨닫는다. 생쥐 고기를 먹듯 고약한 삶의 시작을. (화투 치는 고양이),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의 생일, 언니의 남자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친구를 보며 생의 폭력성에 소스라치는 소녀의 감수성. (지구에 오신 걸 환영해요)의 이야기는 소녀들처럼 섬세하다. 반면 육식성 형에 가려 초식성 삶을 살아온 남자의 실존(초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겁고, 비전향 장기수인 노신사가 봉사자로 온 여인을 만나며 애정과 오욕, 자기혐오와 그리움을 그려낸 이야기(예사로운, 예사로운 사랑)는 애틋하기 그지없다. 사랑과 공포와 그리움과 유머, 다채로운 이야기의 공통점은, 어떤 이야기를 펼치든 제법 읽을짐하다는 것이다.
책속에서
당신이 고통받고 힘들 때, 내게로 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할 따름이오. 미조(迷鳥)를 아시오? 보통 때에는 그 지방에 살지도 않고 날아들지도 않지만,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예기치 않은 폭풍 따위로 인해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새 말이오. 당신의 불안한 눈빛, 무척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안면 근육의 미세한 경련을 대문 앞에서 맞닥뜨리면서, 감옥 안으로 잘못 들어온 한 마리 새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소. 그러나 누군들 미조가 아니겠소. 우리 모두 지상에 깃들 처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헤매는 떠돌이새가 아니겠소.
<예사로운, 예사로운 사랑> 113쪽
염승숙 / 노웨어맨 / 2011년 3월
"산다는 건,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는 거란다." 이 소설집은 갑자기 비를 맞은,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일이면 손이 사라질 남자, 내일이면 목욕탕에서 때를 밀 수도 없는 사실에 절규한다. 소설은 환상과 현실을 적절히 조합해 치열한 현실의 모습을 그려냈다.
표제작 <노웨어맨>이 인상적이었던 건 신용, 파산, 구제, 대출, 회생 등의 현실적 제약이 물리적인 것으로 변해 인간의 표면에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가짜를 만들어 파는 남자, 자신의 아버지가 노웨어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절규, 아무 것도 아니라니.
보이지 않는 것들에 항상 매혹되어왔다는 작가의 말을 읽는다. 손목을, 존재를 잃고 사라져가는 사람들. 이 소설집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책속에서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는 증후군처럼 번져나가는 노웨어맨 현상에 대한 기삿거리들로 넘쳐났다. 노웨어맨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인지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인지, 그 뜻은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하고, 장공수는 ‘노웨어맨’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그리고 불쑥불쑥 머리꼭지까지 치받는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가짜인데, 진짜를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인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노웨어맨이라니, 아무것도, 아니라니. <노웨어맨, 68쪽>
김이설 / 환영 / 2011년 6월
2010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독자 낭독회에서 작가를 만났다. 고요하고 순한 분이 이토록 독한 글을 쓴다는 사실이 놀라워 다시 보았다. 언젠가 소설집을 내게 된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 싶다고 말하던 작가가 두번째 경장편을 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을 고시원에서 만나 아이를 낳고, 옥탑방에서 사는 삶. 아이를 맡기러 간 시댁에서 금반지를 훔치는 여자, 여자는 스스로 현실이 된다. 여자는 돈을 벌기 위해 백숙집에서 일을 하고, 스스로를 팔고, 그러면서도 살아남겠노라 다짐한다. 가족이 남긴 빚, 아이의 장애, 모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나는 누구보다도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193쪽)" 라고 하며. 이토록 질기고, 독하고, 모질 수 있을까. 김이설의 소설은 과도한 교화도, 과도한 감정이입도 없이, 실현불가능한 값싼 희망 대신 '현실'을 치밀하게 쌓아올린다.
책속에서
"여기가 처음이라더니, 할 만해?"
어느새 다가온 이모님이 무 한 조각을 내밀었다. 알싸하고 달짝지근한 겨울 무였다.
"돈 버는 일이 다 그렇죠, 뭐."
나는 무를 우물거리며 치마를 탁탁 털었다. 괜히 멋쩍었다. 부스스한 먼지가 일었다.
"젊으니까 그런 일이라도 하지. 너네들은 좋겠다."
"날씬하고 젊으니까 손님들이 너만 찾고. 넌 더 좋겠더라."
좋은 일인가.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 옷을 벗고 받는 돈이었다. 금반지도 생기고 화장품도 생기고 옷도 생겼다. 그래도 옥탑방에 살고, 통장의 잔액은 늘지 않았다. 나는 능숙하게 다리를 벌렸지만, 물가에 서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81쪽)
하재영 / 달팽이들 / 2011년 3월
남자친구가 여자에게 말했다. 넌 달팽이 같다고. 관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달팽이 껍데기 속으로 파고든 삶. 소설 속 여자의 삶은 도시 원룸생활자의 삶의 전형이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며 텔레비전, 인터넷, 작업, 잠으로 생활을 나눠 단조로운 삶을 산다. 가끔 들려오는 옆집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상상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 언제나 상상하던 모습은 불륜에 빠진 직장여성. 그러나 실제의 그녀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주인공의 완전무결한 원룸이 흔들린다.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 위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인사하기보단 타이밍을 맞춰 마주치지 않게 나가려는 나 역시 그들과 같다. 같이 밥먹어주는 아르바이트가 존재하고, 열등감에 폭식을 해 몸을 불리는 여자가 존재한다. 껍데기 속에 스스로를 가둔 사람들에 관한 유머러스하고 씁쓸한 이야기.
책속에서
"왜 불륜관계라고 생각하셨어요?"
중년남자가 끼어든다. 나는 입을 다문다. 왜 그렇게 생각했던가.
"글쎄..... 아무튼 그 여자는 퇴근하고 나면....."
"피해자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어요. 대학생이었거든요."
또 중년남자.
"그랬.....나요?"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B102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그녀는 잠자리에서 끊임없이 괴성을 지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유부남인 옛 애인과 불륜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나 쇼핑을 즐기고 정장을 자주 입는 사람이었나 (...) 절도, 살인, 강간, 납치..... 세상은 여섯 달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B102호의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기사에 등장하는 익명의 피해자들이 모두 그녀인 것만 같다. <달팽이들. 51쪽>
최제훈 / 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1월
<퀴르발 남작의 성> 역시 2010년 가장 돋보이는 한국소설 중 하나였다. 최제훈 작가가 내놓은 첫번째 장편소설. 진정한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소설의 숲. '악마'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지닌) 카페 주인의 초대장을 받은 회원들이 눈덮인 산장에 모여 온갖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르소설적 문법에 충실한 밀실살인으로 보이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속 주인공들의 이면, 거짓말이 밝혀지고, 소설이 소설을 물고 오고,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소설인지 소설 속 소설인지 알 수 없는.
잔인한 상상이 이어지는 이야기. 모질고 여문 이야기에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 가장 완벽한 소설을 향한 욕망도. 최제훈의 소설에선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느껴진다. 그게 최제훈의 소설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다.
책속에서
산장에는 이제 한 사람만 남았다. 메이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약도 없는 시간을 버틴다. 죽은 자들의 살로 허기를 달래면서.
괜찮아,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우선은 그것만 생각해. 내가 살아 있는 한 거야? 그런데, 내가 누구지?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알 수 있겠지. 살아 있는지, 누가 살아남은 건지..... 이젠 못하겠어. 나..... 너무, 졸려. 나도 그래.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버텨보자. 이젠 그냥 자도 되지 않을까? 게임은 이미 끝났잖아. 정말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해? 감당할 수 있겠어, 잠이 들면 찾아올지도 모를 여섯번째 꿈을? 여섯번째 꿈...... 그게 뭐가 됐든, 알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그러니 기운 내자. 만일 우리가 지금 악마의 꿈속에 들어와있는 거라면,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악마가 잠을 깰 때까지. 그럼, 이번에는 내가 먼저 시작할게.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일곱 명은 산장에 모였어. 하지만 정작 우리를 초대한 악마는 오지 않았지..... <π, 275쪽>
최수철 / 침대 / 2011년 6월
"죽음은 삶을 위한 침대이고, 삶은 죽음을 위한 침대다. 천하만물, 우주만상은 각기 서로에게 침대다. 만인은 각자 서로에게 침대다."(94쪽) 지적인 문장을 선보여온 최수철 작가가 6년 만에 발표한 묵직한 소설. 그러나 무게감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침대가 되어 백여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침대가 겪은 사람과 세상, 삼라만상이 짤막짤막하게 스쳐 지나간다. 탄탄하면서도 능수능란한 구성 속, 무궁무진한 인간사의 세파가 스친다.
침대를 둘러싼 명상록을 읽는 듯한 스타일이 명확한 이야기 속. 마음에 드는 문장을 툭툭 발견한다. 예컨대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에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은 침대에 누울 수는 있어도 꿈꾸는 법을 잊었고, 사라진 꿈을 되살려낼 방법을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193쪽)"같은. 침대에서 태어나 침대에서 사랑하고 침대에서 살며 침대에서 사망하는 게 우리의 삶, 침대의 항해는 기기묘묘하다. 묘하고 어둑어둑한 에로티시즘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책속에서
한 남자에게 다소 특이한 애인이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연락이 잘 되지 않다가, 며칠 간격을 두고 한밤중에 그의 방으로 몰래 찾아들었다. (...) 장례를 치르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녀는 두 사람의 추억이 침대를 중심으로 이뤄져왔고, 심지어 침대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목수에게 부탁하여 그 침대로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그 속에 뉘었다. 그러고는 관뚜껑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몰래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그의 곁에 누울 때, 그녀의 귓가에서는 생전에 그가 밤마다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죽으면 내 관속으로도 들어올 여자야." (287쪽)
백가흠 / 힌트는 도련님 / 2011년 7월
문학인이라고 할 때 느끼는 어떤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가 적어도 내겐 있다. 감각을 불콰하게 자극하는 야생적인 이미지를 살려내는 소설가 백가흠, 그의 세번째 소설집은 문학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포트레이트에 가깝다. 지금 백가흠이 쓸 수 있는 글과, 지금 백가흠이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의 본령, 그리고 지금 백가흠이라는 작가가 위치해있는 곳이 소설집에 담겨있다.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는 건 용기있는 일이다. 마지막 소설 한 편만 쓰고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결심을 한 소설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세상에는 못나게 구는. <힌트는 도련님>의 주인공 소설가가 소개받은 예쁜 여자에게 스스로가 소설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교보문고로 여자를 데려가는 부분은 백미다. 인기없는 책이라 찾을 수 없다며 민망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습고 매력적이다.
색과 지향이 확실한 밀도있는 단편의 향연 덕택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백가흠스러웠던 소설, <쁘이거나 쯔이거나>에서 끝내 아내의 이름도 알지 못한 채 매매혼으로 한국을 찾은 아내를 학대하던 사내들의 폭력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역시 백가흠이구나 싶다가도, 왜소증에 걸린 사내의 삶의 풍경을 보여주었던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를 보며 슬쩍 웃게 된다. 독해져야 한다, 소설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책속에서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이 좀체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누군가 이 와중에 방귀를 뀌었는지 탁한 냄새가 사람들을 자극시킨다. 벨을 눌러야 하는데 손이 닿질 않는다. 그는 살을 맞대고 같이 왔던 여자에게 천장에 붙어있는 벨을 눌러달라고 부탁한다. 여자가 벨을 눌러준다. 손이 빠져나간 그녀의 가슴에 그의 턱이 가 닿는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알고 있는지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뚫고 정류장에 내리는 일이다. '독해져야 한다.' 그는 속으로 다짐한다.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억지로 틈 사이로 밀어 넣는다. 그의 왜소한 몸이 조금씩, 조금씩 사람과 사람 사이, 틈 없던 틈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간다.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157쪽>
그녀석 덕분에 / 이경혜 지음 / 2011년 3월
청소년 소설은 생기있어 좋다. 밝은 소설이든, 밝지 않은 소설이든 청소년 소설의 이야기는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건강한 데가 있다.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청소년 소설을 낸 이경혜 작가의 두번째 작품인 이 책은, 단편 세 편과 중편 한 편으로 이뤄져 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건강과 활기가 넘치는 그 나이의 치기와 떨림, 그리고 고민이 담겨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그녀석 덕분에>는 바퀴벌레가 내가 되고, 내가 바퀴벌레가 된, 호접지몽 같은 이야기이다. 고3인 내 자리를 대신한 바퀴벌레와, 바퀴벌레 대신 자유를 찾은 '나', 기발한 설정 속 철학적 메시지가 있다. 진짜 나보다 더욱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바퀴벌레, 바퀴벌레의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하고 싶던 것이 음악임을 깨닫는 나. '나'가 나답게 살 수 없다면, 더 나다울 수 있는 존재에 '나'를 양보하는 게 옳지 않은가. 비단 청소년만의 고민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깊이가 있다. '그녀석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진짜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 청소년의 것으로만 남겨두기엔 아쉬운 게 사실이다.
한국소설/시 MD가 추천하는 2011년의 시 역시 가능하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읽혔으면 싶은 시집을 선정하려 노력했습니다. 허수경의 새 시집은 도저히 넣지 않을 도리가 없어 넣었습니다.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을 덧붙이는 건 무의미한 듯해, 시집만큼은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발췌하는 것을 중심으로, 덧붙이는 말을 최대한 갈음하려 합니다.
허수경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2011년 1월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시인의 말을 본 순간, 이 시집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수수께끼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애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은?
이별만 있었네 (..)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횟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뜨건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냥 말해보는 거야
적혈구가 백혈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차곡차곡 접혀진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넣는 것처럼
박형준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2011년 7월
시인의 낭독회, 사회를 맡은 젊은 시인은 감히 서정의 귀환이라 이름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가슴 떨리는 제목처럼, 이 시집을 읽으며 몇 번이나 마음이 아팠다. 소개할 수 있는 시가 한정되어 있어 아쉬울 뿐.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전문)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펄럭거리는 잎맥 자국이 있다
대야의 물로 성(性)을 씻는 여인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민달팽이가 긴다
녹색 셀로판지로 된
여인숙 출입문 밖에 바다가 와 있다
여인이 사라지고
대야의 물 환하다
쭈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깊어가는 거울 속
(전문)
계단의 끝 - 여림을 추억함
나는 반지하도 아니고 일 층도 아닌 지층에 산다. 그림자는 매번 계단 끝에 굴러떨어진다. 산비탈에 선 남양주장례식장, 얼어 있는 낙엽, 비 내리는 봄밤 내가 사는 집 현관에 옹이처럼 달라붙은 살구꽃. 그 순간의 이미지로 계단 아래 살고 있다. 그리고 늦은 밤에 귀가하면 나는 그림자와 함께 계단의 끝을 향해 다시 올라간다
김언희 / 요즘 우울하십니까? / 2011년 4월
제목부터 쎄다. 시는 더 쎄다.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 상스러운 단어와 키치적인 그림의 조합. 어쩐지 나빠지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이 시집을 읽는다. 이 시집을 읽으면 뭔가가 풀리는 느낌이다.
마그나 카르타
- 선언하면서 동시에 절규할 수 있다면
아침부터 썩어 있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소
껌껌한 콘크리트 방주를 타고 밤마다 대홍수의 꿈을 꿀 권리가 있소
머리 위로 똥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꿈을 밤마다 꿀 권리가 있소
에미 애비도 몰라볼 권리가 있고 딱 오 분만 모친의 부고(訃告)를 즐길 권리가 있소
곡(哭)을 하면서 다리를 떨 권리가 있고 병풍 뒤에서 휘파람을 불 권리가 있소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페니스 안젤리쿠스로 번번이 고쳐들을 권리가 있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수음을 할 권리가 있소
수음을 하면서 숨이 끊어질 권리가 있소
더이상 미래가 궁금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젓가락 행진곡만 삼십 년을 칠 권리가 피가 나도록 칠 권리가 있소 (...)
먼눈이 또 멀 권리가 있고
무엇보다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소
대공원의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
똥을 눌 권리가 있는 것처럼
김윤이 /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 2011년 3월
흑발, 소녀, 누드. 시집의 제목부터가 서정이다. 내 속의 미숙함이 사무칠 때 이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언덕 위의 집
온 산 활활 물들이는 소리, 등성이 타고 앞마당까지 내려왔더랬죠 잡목들 파수 서던 언덕 위의 집. 날 앞서 늙는 씨앗 수북 배달됐더랬죠
지금도 마당가에는 배냇젖을 뗀 감꽃마냥 져요 뚝, 뚝, 성급하게
해가 져요,
하학종이 들리고 사람 태우지 않는 화물열차 지나가요
기ㅡ일게 기ㅡ일게
나는 코스모스 돌아 집으로 가요 풋감을 드시는 그리운 할머니, 나는 왜 자라지 않나요
유희경 / 오늘 아침 단어 / 2011년 6월
이 시집의 제목을 본 이후, 가끔 오늘 아침 내가 떠올린 첫 단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사라져가는 것들, 나는 그 뒷모습에 자주 매혹된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할 수있을까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無
무를 사러 나왔는데 밑동 잘린 눈이 내린다 당신, 무얼 상상했기에 이리도 하얀 눈이 내리나 그렇게,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한 사내가 넘어진다 일어나 툭툭 털어내는, 그의 잠바가 흐리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고요 그 중간쯤을 올려다본다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 나는 오독오독한 그런 상황이 참 재밌어 또 슬프다 함께 사라져버릴 것들 그리고 잊혀가는 것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