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주희>로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박민정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괜찮은 사람> 강화길 작가의 목소리로 전합니다. 인터뷰 원문은 문학동네 94호에 실렸습니다.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서울의 어떤 백일장에 참가했다 돌아오던 내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아쉽게도 상장은 아니었고, 전년도 수상자들의 작품을 묶은 책이었다. 나는 그 작품집을 꽤 오랫동안 보관했다.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봄밤의 나그네」라는 소설로 장원은 아니었고 3등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나는 그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심사평에 따르면 제법 괜찮은 작품이었고, 내 관점으로 말하면 정말 좋은 소설이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그네를 타는 소녀가 있다. ‘나’는 아이가 부럽고, 마음이 조금 아프다. 왜냐하면 ‘나’는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빠는 집을 나갔는데, ‘나’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롭고 힘들다. 이야기의 말미, ‘나’는 소녀를 데리러 온 나그네를 본다. 그가 소녀를 업어주는 장면을 ‘나’는 뚫어지게 본다.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발 일어나기를 바랐던, 간절히 원하며 몰래 간직해왔던 ‘나’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녀는 ‘나’ 자신이다. 봄밤, ‘나’는 아빠의 등에 얼굴을 고요히 묻는다. 이 글은 박민정에 관한 것이므로, 「봄밤의 나그네」를 쓴 작가가 누구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재미있는 건 내가 그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몰랐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엔가 나는 그 책을 잃어버렸고 다시는 읽지 못했다. 당시에는 작가 이름을 기억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조차도 잊어버렸다. 나이도 이름도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다.
박민정의 집 작업실에는 책상과 노트북만 있다. 그녀는 장비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스탠드도 잘 쓰지 않는다. 그나마 돈을 써서 구한 장비가 헬로 키티 키보드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카페를 많이 전전했다. 카페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시기가 길다보니 지겨워졌다. 그리고 월세를 허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제는 그냥 집에서 글을 쓴다. 그래도 나름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는 있다. 설명하자면, 그녀의 노트북에는 어디선가 구해온 ‘보안’이라는 글자 스티커가 붙어 있다. 책상 위에는 펜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연필꽂이가 있고, 샛노란 튤립 한 송이가 담긴 꽃병이 있으며 벽에는 메모지와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이 잔뜩 붙어 있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는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상자 두 개가 있는데, 감귤 상자와 사과 상자다. 최근에 패브릭을 얹어서 약간 꾸미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냥 과일 상자다. 그녀와 절친한 천희란 작가는 그 상자들 덕에 박민정 작가가 힘을 얻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두 상자에는 그녀가 대학 시절 모은 시즌 베스트 작품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의 상자라고 명명한 쪽에는 발제문들이 들어 있고, 감성의 상자에는 시와 소설들이 들어 있다. 다시 읽는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기에 꺼내 보는 일도 없지만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 한 편도 버리지 않고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만 했기에, 그 시절 정말 좋아했던 작품들만 남겨뒀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작품들을 간직한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쓴다. 그건 그녀가 원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그녀는 초등학교 오학년 때 일본인 친구와 펜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받은 스티커를 아까워서 손도 못 대다가 이제 겨우 하나씩 쓰기 시작했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친구들의 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천희란 작가 말대로 그 상자들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걸 조금은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술적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그녀는 내게 프랑스 자수를 배운 솜씨로 부두 인형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건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 인형인데, 내가 언니 그건 좀 언피시하다고, 나를 괴롭히는 기운을 대신 받아주는 인형을 만들어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언니는 그게 왜 언피시한 거냐고 반문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세실, 주희」는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방인은 필연적으로 진보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2012년이었다. 당시 그녀는 문화 연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출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어디선가 이 문장을 읽었고 옳다고 생각했다. 자국에서 극우적인 사람도 외국에 나가면 소수자의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치적 약자는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이 문장이 불어나는 걸 느꼈고, 소설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구상은 지금의 결과물과는 달랐다. 원래는 힙합 음악이 좋아서 일본에 간 한국인이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사적인 이유로 외국에 간 화자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의 반정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 그 위험함과 혼란스러움이 박민정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2012년에 바로 쓰지 않은 이유는 당시 작업중인 다른 소설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구상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구상에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틈틈이 메모를 해뒀다가 주기적으로 정리해가면서 구조를 짠다. 그 과정에서 정보도 수집하고, 설정을 구체화시키거나 바꾸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싶으면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 시기를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중간에 설정을 바꿔야 했던 것이다. 그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외국에서의 삶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그녀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지켜보는 삶이었다. 그것도 소외된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소설은 그렇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정치적 관심도 없는 일본인 세실이 주희라는 한국인과 함께 수요 집회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로.
그러나 박민정은 이십대 초반의 일본인 여자애가 한국에 올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워킹 홀리데이? 유학? 어학연수? 굳이 한국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긴 고민 끝에 그녀는 세실에게 강렬한 동기 하나를 부여한다. 그리고 주희는 세실의 이 동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때문에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 고작 유노윤호 하나 때문이라니.’
이 소설의 설정이 과장이 아니라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 나라의 문화 산업은 그렇게 굴러가니까. 어처구니없고 의미 없어 보이지만, 지극히 당연하고 확고한 이유로. 아마 주희의 반응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큼이나, 세실의 동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박민정의 경우는 세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런 선택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편에 속했다. 그것은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청나게 많은 아이돌의 데뷔와 해체를 신물나게 봐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방신기 때문에 한국에 온 일본인 여성과 가까이 지낸 친구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유를 찾자면 얼마든지 더 있었다. 그녀는 중국인 유학생이 늘어나던 시기에 대학원을 다녔고, 대만 유학생에게 과외를 해준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박민정 작가는 ‘일제’를 좋아하는 외국인이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 특유의 레이스 장식과 색조 화장품을 정말 사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세실과 주희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실을 소설 속으로 불러와 주희를 만나게 했을 뿐,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박민정은 구상에 시간 투자를 많이 하지만, 소설을 쓰면서 메모를 더 많이 한다. 작업에 들어가면 동기만으로 알 수 없는 것, 흐릿한 골격만으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이 소설 내부에서 부딪히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낯선 나라의 이방인이 뜻도 모르는 집회에 참여하게 되는 소설을 쓰려 한다는 건 알았지만, 오키나와 출신으로 “할머니는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있습니다”라고 천진하게 말하는 세실이 명동 한복판에서 수요 집회를 마주했을 때의 부딪힘이 어떤 것이 될지는 몰랐다. 그리고 박민정은 집회의 성격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기에, 주희의 설정에 대해서도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불리는 광장, 그러나 그곳에는 분명 여성 혐오적 요소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포르노 사이트에 신상이 올라간 여성이 광장에 등장한다면? 나아가 이 두 사람이 함께 나란히 서 있게 된다면? 그녀는 의문과 고민을 좇아 계속 메모했다. 세실의 가계도를 그렸고, 주희의 신상을 만들었고, 사진과 영상을 정리했고, 썼던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플롯이 구체화되면서 메모의 양도 계속 늘어났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작가가 여전히 동의하고 있고, 그래서 이야기를 출발시킬 수 있었던 “이방인은 필연적으로 진보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라는 문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백합의 간호사. 위안부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 포르노. 외국인. 광장. 집회. 화장품. 아이돌. 그 익숙하고 흔한 현상. 그러나 기괴하고 변태적인 충돌.
그러니까 세실, 주희로.
언니와 나는 2012년에 처음 만났다. 그녀가 「세실, 주희」를 구상하던 그해 말이다. 나는 그때 등단했는데, 어느 술자리에 놀러갔다 그녀를 만났다. 이후 우리는 몇 번 연락을 주고받다가 내가 다니던 학교 앞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계속 친하게 지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뒤로 몇 년간 안 만났다. 연락도 안 했다. 그녀가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출간한 후 내게 보내주기도 했고, 그 소설집이 너무 좋았던 내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언니가 내 소설을 좋아했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도 있었지만, 만나서 수다를 떨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그랬다. 그때 우리가 왜 그랬느냐 하면, 그냥 간단히 말하면 감정적으로 너무 메말라 있어서, 돈이 없어서, 이곳에서 친구를 만든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워서, 가끔은 살아 있는 것조차 버거워서, 서로에게 다가갈 겨를이 없어서 그랬다. 우리의 이십대는 그랬다.
박민정은 「세실, 주희」에서 처음으로 작가로서 그녀의 나이보다 한참 어린 인물들을 만들었다. 세실, 주희는 91년생, 93년생이다. 얼마 전 그녀는 어떤 독자의 ‘그 나이대의 여성으로서 「세실, 주희」에 공감이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안심했고, 매우 감사했다. 그녀의 나이와 떨어진 세대의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는데, 자연스러웠다는 뜻이었으니까. 동시에 기묘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그녀 또래를 주인공으로 설정해서 썼어도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친구들, 삼십대 여성들은 이십대 초반과 다를 바 없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삶은 의미화되지 못한 것들 투성이였다. 내게도 여전히 불안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너무 불안하다.
아마 그건 내가 뭔가를 해냈고, 앞으로도 뭔가를 해내리라는 느낌을 받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 이것조차 조금은 사치스런 말이다. 그냥 온전한 성인으로, 사람 구실을 하며 살고 싶은데 그게 너무 힘겹다. 타인과의 관계는 그래서 특히나 어렵다.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과연 이곳에서 누군가와 무언가를 제대로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될지 자신이 없다. 혼자 서 있는 이들에게 다가갈 자격이 있는지 계속 되묻게 된다. 내가 세실과 주희에게 도움은 고사하고 언캐니한 존재로 남지 않을 수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태도가 다 변명 같은데, 그래서 이걸 극복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 싶고, 힘에 부친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 어느 밤, 언니가 내게 다시 연락해온 것이 어쩌면 굉장히 용기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인데, 그녀는 추모 집회에 갔다가 교보문고에 들러 내 소설을 읽었다고 했다. 언니는 그때를 돌이키며 “결국 참지 못해” 연락했다고 농담했다. 나는 그게 정확한 표현 같다고 느낀다. 이십대와 다름없는 삼십대를 맞이하고, 써왔던 것을 계속 쓰고, 긴장하고, 부유하지 않기 위해 부유하면서 그 모든 걸 계속 견디다보면,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는 걸 목격한다면, 더는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참을 수 없어진다.
「아내들의 학교」도 그랬다.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박민정은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첫 소설집인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묶는 동안에도 그랬고, 출간한 직후에도 한동안 그랬다. 그건 글쓰기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썼고, 백일장에 나갔다 하면 상을 타오는 아이였다. 엄마는 그런 민정이에게 책을 엄청 사줬고, 학교에 제출하지 않고 혼자 쓰고 간직하는 일기장을 사줬고, 글쓰는 노트, 만화 그리는 노트도 사줬다. 그녀는 존 어빙, 나보코프, 이사벨 아옌데를 좋아했고,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하나씩 배웠다. 대학 때 심취했던 박상륭에게서도.
다만 그녀는 ‘문학적’이라는 말에는 의심을 품었다. 스물한 살 때, 개인적인 고민으로 휴학한 채 집에 틀어박혔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상황을 문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 오랫동안 글을 써왔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화가 났다. 타인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은 순간에 왜 자신을 대상화해서 바라봐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건 뭔가 잘못된 방식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대신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에 여성 혐오적 성향이 짙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제껏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 그것을 문학적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이후 그녀는 자기 자신과 ‘문학적’인 어떤 것들이 부딪치는 순간을 계속 경험했고, 그건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만드는 동시에 어떤 제한을 경험하게 했다.
이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것인데, 이것을 문학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에게 소설쓰기는 인정투쟁이 아니었지만, 계속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평가라는 것이 필요했고, 만일 자신이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그녀는 좋은 작품을 쓰면 언젠가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자신하지는 못했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런 식의 부딪힘은 그녀의 삶에 끊임없이 파문을 던지곤 했다. 그녀는 강남 8학군에서 나고 자랐지만 친구들에 비해 가난했다. 친구들은 백화점에서 망설임 없이 옷을 샀지만, 그녀는 그들과 떡볶이를 먹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부자 동네에서 가난한 집 아이로 성장한다는 것. 그 감각이 그녀의 마음 안에 또렷하게 남았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문화 연구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곳에서 소설가가 왜 문화 연구를 하냐는 말을 무수히 들었고, 문단에서는 문화 연구를 하면서 왜 소설을 쓰냐는 말을 들었다. 고등학교에 출강하면서는 자신이 선생님들 세대에 가까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가깝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일상에서 글쓰기의 영역까지, 첫 책을 묶는 오 년 내내 이런 일들을 반복해서 겪었다. 무력했고 고독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의심한 건, 문학을 둘러싼 어떤 상황들이었지 글쓰기 자체는 아니었으니까. 고립된 시간이 길어진 만큼,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쓰고 싶은 방식대로 쓰고 싶다는 욕망. 실제로 그렇다. 그건 사실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시의성이나 응답이나, 해석할 여지나 예술적 의미,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건 사실 소설과 아무 관계 없다. 소설의 특성은 온전히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순간에 만들어진다. 그 순간에 작가는 자유롭다. 설사 이 이후에 다시 무력하고 고독하고 변명뿐인 삶으로 돌아갈지라도, 상관없다. 그 순간에 아직 살아 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박민정은 「아내들의 학교」를 그렇게 썼다.
나는 종종 「봄밤의 나그네」를 생각했다. 나는 좋아하는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인데, 항상 그러는 건 아니고 사는 게 힘들다 싶을 때 그렇게 한다. 그런 순간에는 신간을 읽는 것보다 좋아하는 책을 다시 보는 게 편하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 소설도 목록에 있었다. 책을 잃어버려 다시는 읽을 수 없게 된 이후부터는 그냥 기억을 했다. 정확하게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 읽거나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일종의 부두 인형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인형을 갖고 있었던 셈이고, 그 소설은 아주 오래된 천조각 중 하나였다.
언니가 내게 연락을 다시 한 이후 우리는 가끔 만났고 통화했고, 서로의 시상식에도 갔고, 각자의 책이 나오던 즈음 축하 파티도 했다. 그런 사이가 됐다. 그러다가, 이번 겨울이 시작되던 무렵일 것이다. 그날도 언니와 카톡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언니가 그 백일장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반가워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쩌면 내가 수상작품집에서 언니 작품을 읽었을 수도 있겠다고. 동시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나는 계속 말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한 작품이 있었고, 그래서 안부가 궁금한 작가가 한 명 있었다고. 그래? 언니는 그렇게 반문하고는 아직도 그 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뒤 잠시 사라졌다. 나는 또 말했다. 지금도 그 작가를 생각한다고.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오랜 세월, 나는 혼자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어린 시절, 만일 작가가 되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더는 외롭지 않게 되리라 믿기도 했다. 내 또래의 누군가가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썼고, 이 세상에 그 사람이 여전히 글을 쓰며 살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이후 또 오랜 세월 내게 위로가 됐다. 정말로 그랬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했다. 샤워를 할 때, 밥을 먹을 때, 비가 내릴 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느닷없이 그 사람을 생각할 때가 있다고. 아직도 글을 쓸까. 소설을 쓰고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 순간, 언니가 책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언니 소설의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박민정 작가가 대답했다. 응, ‘봄밤의 나그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