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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게 아니라 죽도록 불편한 것이다. (8p)

   문장은 가감없이 솔직하다.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은 끔찍한 인생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등장한 '기린'의 선언은 이 소설 그 자체이다. '죄책감은 배고픔이나 졸음에 비해 아주 하찮다'는 걸 아는 기린은 스스로의 속물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태생, 서울 거주, 중위권 여대 사회복지학과, 의대생 남자친구, 중상급 외모. 기린의 '스펙'은 속물스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누가 알아. 빈티라는 건 도대체가 감출 수가 없는 건데. 죽자고 티를 안 내려는 게 더 웃기지. 안 그래?"
명은 지은의 말을 들으며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지은과 기린, 둘만 있을 땐 자신의 어떤 점을 가지고 비웃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106p)

기린의 주변에도 온통 속물들 뿐이다. 우정은 얄팍하고 생활은 팍팍하다. 기린의 언니는 TV가 너무 좋아 TV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대학 졸업 이후 몇년 째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언니는 TV처럼 연애하고 TV처럼 헤어진다. 기린의 남자친구 동운은 자신감 넘치는 못생긴 의대생이다. 유산상속을 놓고 물밑 암투를 벌이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기린의 부자 친구 명, 수시로 남자를 바꿔가며 그들에게서 선물을 얻어내는 기린의 예쁜 친구 지은. 생활력 강한 기린의 어머니, 하는 일 없는 기린의 아버지, 그리고 모든 속물의 롤모델 기린의 사촌언니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현실을 닮아있다.   

 

   소설 속 문장은 날아갈듯 단출하다. 애써 꾸미는 것도, 멋을 부리는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속물스러움을 말한다. 연재 당시에도 함께 페이지에 게시된 안태영의 삽화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소설의 맛을 더한다. 가볍게 술술 읽히고, 가볍게 웃음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뿐인 소설은 아니다.

 좁은 서가를 쭉 둘러보다 시집 코너에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발견했다. 잡지들만 득실대는 작은 서점 안에 베스트셀러도 아닌 독일 작가의 시집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책을 집어들었다.  (179p)

  기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결혼할 가능성도 없는 의대생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필요한 점심값을 벌기 위해 과외를 하고, 성적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사람들은 알까. 기린이 사실은 서점에서 브레히트를 읽고, 속물 남자와의 소개팅 이후 김중식의 시를 떠올리며, 방 문을 걸어 잠그고 기형도의 시집을 보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영혼을 지녔다는 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열폭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 동네, 엄마 친구 아들 정도에 머무르던 소소한 열폭이 언제부턴가 전 지구적 스케일로 화化했다. 열폭은 경쟁을 강요하고, 속물 되기를 권한다. 속물이 어디 속물이고 싶어 속물이랴. 속물 권하는 사회를 사는 우리 역시 하나의 거룩한 속물들인 것을. 그래서 이 속물들이 더 안쓰럽고 마음 쓰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성복의 시를 떠올렸다. 시를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기린에게 보낸다.

소녀들 철없다. 무슨 일 한번 있으면 그만이지 또, 또 자꾸 보챈다. 전에 우리 아이 놀러갈 때면, 버스 언제 와? 언제 도착해? 언제 밥 먹어? 언제 집에 가? 언제 씻고 자? 늘 그러더니, 소녀들 너희 잠시도 머물 줄 모르는구나. 빨리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고, 빨리 결혼하고, 애 낳고, 빨리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또 뭐 할건대? 소녀들, 너희가 그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붉은 장미는 피지 않는다. 너희는 또 지지 않는 붉은 그리움을 너희 딸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소녀들 철없다,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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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밤, 리모컨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았다. 결혼 따윈 싫다던 손예진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김주혁의 어설픈 프로포즈가 아니었다. 그랬다. 그 순간 그들은 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새빨간 비더레즈 티셔츠를 입은 청춘의 가슴을 터질 듯 가득 채운 문구는 바로 대!한민국!  
  철 지난 영화를 보자 비로소 떠올랐다. 그 계절의 머쓱함이. 우리 선수의 이마에서 흐르던 시뻘건 피에 욕지기를 내뱉고, 축구공 하나를 만들기 위해 베트남 소년 하나가 얼마나 부당한 노동을 하는지 따위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이한 열정. 열정은 가끔 많은 것을 잊게 한다. 올림픽의 몸값은 바로 그 '기이한 열정'을 배경으로 한 얘기다. 

 

  올해들어 세상은 온통 올림픽 얘기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이 가까스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 일등국가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자신처럼 세상일에 무심한 젊은이도 나라가 자랑스럽고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 (18p)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도시는 이상스러운 열기에 휩싸여 사소한 불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한다. 노동자는 초과근무를, 주부는 수도제한을, 시민은 치안 강화를.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연인의 도피처로 사용되었던 그 아키타현 출신의 곱상한 도쿄대생 시마자키 구니오는 형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한다. 평생 따뜻한 말 한 번 건네주지 않았던 배 다른 형은 평생토록 노동자로서 일하다 끝내 필로폰 과다 투약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구니오가 딱히 형을 대단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구니오는 이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형이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형의 삶을 직접 체험한다. 그리고 드디어, 모종의 '행동'에 나선다.

"도쿄하고 아키타는 같은 나라도 아닌 것 같아. 한쪽에서는 올림픽을 앞두고 축제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는데, 한쪽에서는 애비가 먼 도시에 나가 허덕허덕 몇 푼 벌어 부쳐주면 그걸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잖아. 하느님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 (99p)

  시마자키 구니오의 건너편 세상에 스가 다다오가 있다. 같은 도쿄대 동급생이며 대대로 경찰 간부인 명문가의 자손인 그. 텔레비전 방송국에 근무하며 호스티스와 연애를 즐기는 그는 아키타 같은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을 계기로 도쿄 올림픽을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조금씩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다 그곳에 숫기없는 대학 동창생 시마자키 구니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쿠다 히데오의 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니오를 둘러싼 여인들 이야기, 노동현장 인부들 사이의 유대감, 남색가에게서 다이너마이트를 얻기 위해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는 장면 등에는 여전히 오쿠다 히데오스러운 쫀득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태생이 발랄한 것 같은 이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엔 이번 작품은 제법 진지하다. 도무지 발랄하게 만은 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1964년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까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다른 게 있다면 불공평을 언급하는 자체만으로도 촌스러워지는 세태 정도. 해리는 귀엽고 신애는 구질구질한 게 우리들의 정서 아닌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더욱 그 불공평이 공고화된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이 아닐지. 도쿄 올림픽을 위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노점상을 밀어내는 걸 당연히 감수했던 그들처럼, 우리 역시 도시의 쾌적함이란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시아인 최초로 장거리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한다. 선수들의 성취를 보며 또 다시 감동하고 환호한다. 그 사이 우리 안의 기이한 열정은 우리의 눈을 슬며시 덮어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생활은 무척 쾌적해진다. 스스로의 처지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소설 속 노동자들이 그랬듯, 대학 나온 사무직들은 다른 거라며 시마자키 구니오에게만 유독 친절했던 건설회사 신입사원이 그랬듯.

  자기 멋에 취해 새벽에 갈겨 놓은 미니 홈피 일기처럼, 열정이 지나간 자리엔 대개 머쓱함이 남는다. 가끔 겁이 난다. 아주 먼 훗날 머쓱한 기분에 작은 소리로 반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우리의 기이한 열정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게 무엇이었는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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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진실은 무엇인가요?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 도대체 있을까요? 그리고 사춘기 이후에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 아닌가요? (125p) 

   여주인공 '조야'가 말한다.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이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이 사랑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모든 사람의 사랑이 주말 저녁 만날 수 있는 조권과 가인의 시트콤 같다면 얼마나 유쾌할까. 여기 멜랑콜리한 독일작가 카챠 랑게-뮐러가 쓴, 가상연애의 정 반대편에 있는 어떤 흔해빠진 연애담을 소개한다. 

 

   소설은 하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여주인공 조야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연인 해리에게 편지를 쓴다. 헤어지고 몇 년, 겨우 열어볼 수 있었던 그의 노트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잃고 한참 뒤, 조금은 평온해졌을 조야의 시선이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을 좇는다.

  그는 어리고 잘생긴 서독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랑의 순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독 여자,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와 이름이 같은 그녀는 언제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을까. 그가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듣고도 남들이 다 그랬듯 비웃지 않았을 때. 그녀가 단 한 번도 받아보질 못했던, 섹슈얼한 느낌이 전혀 없는 '애기키스'를 해주었을 때. 그러나 그는 정키였고, 쓰레기였다. 아무런 꿈도 없는 그의 그 동공이 활짝 열린 시선까지 그녀는 경탄하고 또 증오했다.   

  처음에는 죽음에대한 불안, 그 다음에는 그 불안에 대한 불안, 그다음에는 아무런 공포가 없는 것, 그러니까 어떤 보호막도 없다는 점에서 너와 마찬가지 신세라는 불안감, 우리가 더 똑같아지고, 더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고...... (196p)

  그들의 사랑은 빤히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아지고 또 같아질 때까지 함께 낙하한다. 다른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그녀는 그를 의심하고, 그가 아닌 남자를 만나고,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극한의 분노를 맛보고, 결국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다. 그러나 간단한 정보로 연상할 수 있는 극한의 신파를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니다. 동독과 서독, 마약중독자, 질병, 섹스, 나태함, 도시의 우울... 그러나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 조야 코스모뎀얀스카야의 단단함이 내재된 여주인공 조야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에 너무 강하고 소박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 찬란하던 추억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고 슬픈 문장들이 묘한 멜랑콜리가 되어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감싸고 돈다.

  시간이 없거나 네가 더이상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때문에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었어. 다른 표현을 쓴다면 조금 덜 통속적이겠지. 하지만 그만큼 덜 진실할 것 같아. (251p)

   이 계절이면 생각나 벌써 몇 년째 듣고 있는 노래가 있다. 대단한 완성도라고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님에도, "Oh, Love, Never knew what I was missing"을 흥얼거리며 괜히 코끝을 한번 만지게 되는.  

  통속은 진실하다. 통속이 통속인 것은 그것이 이미 보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속에는 늘 공감할 구석이 있다. 그 흔해 빠진 사랑 얘기가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의 핵심인 것처럼. 번역이 잘 된 문장은 코끝이 찡한 와중에도 순간순간 피식 웃게 만든다. 공감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 가벼운듯 소박한 문장 사이에서 지금껏 표현되지 못한 채 혀 끝에서 맴돌던 바로 그 문장을 건져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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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2-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다 통속이 아닐까요? 낡은 잡지같지만 어쩌겠어요. 그런 게 사랑이라면요. 그냥 제 생각이에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2-15 11:24   좋아요 0 | URL
폐부를 찌르는 댓글이라 '차마 그 리플을' 달지 못했군요...(이것으로 저의 게으름을 갈음하고 ^^) 그 통속을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재밌죠. 기대도 실망도 없이..
 

  
   박민규를 처음 접했을 때는 수험생이었다. 아침 자습이 너무도 지겨워 신문이나 보며 어설프게 뺀질대다 박민규를 만났다. 신문 지면에서 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박민규. 그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땐 혼란스러웠다. 그의 글과 '문학상'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고아함과는 몇 광년은 떨어져 있는 듯했던 그의 문체는 참신하지 못한 일개 수험생 나부랭이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창의적이었다. 

끝없이 늘어지는 1982년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도 이전에 암기한 춘향전의 '장면의 극대화'를 떠올리던 때였다. 그런 수험생 나부랭이에게도 그의 글은 "재미"있었다. D-100을 가리키는 달력을 한장씩 떼어내는 대신 한장씩 책장을 넘긴 건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호사를 누리며 그가 무척 특이한 작가라고 생각했고, 특이하기만 한 작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 소설 속 인물들과 달리 승률 1할 2푼 5리가 아닌 삶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 9월의 내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재미난 소설보다 훨씬 더.

 

처음 그를 만났을 땐 그와 이토록 오래도록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박민규라는 특이한 작가는 그의 문학을 정의하려는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채로운 행보를 이어갔다. 그의 행보 덕분에 호사스러운 취미가 더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카스테라'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하던 기억이 대학생활의 한 페이지에 있고, '누런 강 배 한 척'을 읽으며 가족의 상실을 정리했다. Y2K 바이러스가 범람하니 컴퓨터 날짜를 꼭 변경해 놓아야 한다는 앵커의 안내를 들었던 세기말이 아직도 떠오르는데, 어느덧 2010년이다. 그리고 박민규는 드디어 <이상 문학상>을 받고야 말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새로운 세기의 10년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냈음을.

박민규의 <아침의 문>은 여전히 키치적이고, 여전히 빠르며, 여전히 과격하다. 그렇지만 이 글은 충분히 아름답고 고상하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재수'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세상이다. 재수도.. 재주도 없어(15p) 마음 대로 죽지도 못하는 인생. 주민등록증을 가진 괴물, 학생증이며 졸업증명서며 명함을 가진 괴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20p)을 알면서도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20p)    
   

생각하고 고개만 주억거리게 되는 인생. 그러나 우리는 바닥의 콘크리트보다도 무뚝뚝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36p)에 계속 이 삶을 살아낸다. 인생과 삶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죽음과 탄생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변주해낼 수 있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아니 놀라기에 앞서,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붉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박민규는 꿈을 꾸라고 말하지도, 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꿈 같은 건 없다고 조롱하는 편. 심의를 피하지 않고 말하자면 꿈이라고? 조까. 하고 물고 있던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껄껄대는 편. 그런데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박민규의 글은 '아침'이라는 타이틀에 잘 어울린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라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꿈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삶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인생이 계속 될 것만은 틀림없이 믿는다. 꿈을 꾸거나, 혹은 말거나. '잔디 엄마'(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中)에게도 삶은 반드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잔디'(아침의 문 中)가 말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녀 역시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일 터이니. 

박민규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무게감이라면 죽도록 싫어할 것 같은 작가 박민규의 이름에도 어느덧 무게감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렇지만 박민규는 독자들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말거나, 계속 무규칙 이종의 길을 걸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러니 마음놓고 사랑하련다. 나는 박민규가 좋다. 그가 어떤 글을 쓰거나 혹은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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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10-01-26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또래 신듯 하네요.
요즘 박민규 씨의 책을 읽는데 글말과 입말의 경계는 넘나드는 그 자유로움이 좋더군요.
저는 그래도 어떤 글을 열심히 쓰는 그가 더 좋답니다. ^^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1-27 09:02   좋아요 0 | URL
참 힘든 세대죠? ㅎㅎ 그래도 열심히 삽시다..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답게!

judy 2010-01-28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삼미수퍼슈타즈~> 를 읽고 그의 팬이 되어버렸어요.

이번 이상문학상 소식은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면서도
마치 내가 탄 것 마냥 기쁘다는 사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어제 지하철에서 낄낄거리고 웃으며
읽었어요.

책 말미, 그의 수상 소감에서 자신은 휄체어에 앉아서 글을 쓴다고,
그리고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뭔가 울컥
했습니다. 그가 다시 보이더군요...

하여튼 저는 박민규 같은 별종 작가가 이 세상에 있어줘서 너무 행복해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1-31 23:5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겨우 한 달을 놓치지 않네요. <딜도가~>는 킬킬대며 웃다가도 가슴이 짠해지는 글이었죠. 저도 박민규 글을 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참으로 낭만을 아는 작가 같아요.

2010-03-1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효선 엠디님, 한강 소설 소개글에서 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여기에도 오게 되었습니다.저를 아시는 김효선님이 맞다면 박민규알럽!!으로 댓글을 달아주세요. 하는 일도 없이 분주해서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했어요. 당장 읽어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언니도 그리워요.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3-17 10:59   좋아요 0 | URL
박/민/규/알/랍! anytime call me!!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한 건물이 있다. 28층이고, 각 층마다 25개의 방이 있다. 이 건물에는 총 몇 개의 방이 있을까. 각각의 방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되었던 편혜영의 단편 <토끼의 묘>는 낯선 도시에서 의무적으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된 '그'의 짧고 서늘한 일상을 서술한다. 소설은 전작 <사육장 안에서>에서 이미 발현되었던 편혜영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파견 근무자인 그는 매 업무시간 내내 '사냥개처럼' 정보를 수집한다. 그가 수집한 정보가 틀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는다. 파티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눠놓는다. 그는 이 도시에서 대화란 것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버려진 토끼를 발견한다.

   
 

빨간 눈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 말고도, 원래 눈이 붉은 품종의 토끼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저리 눈이 붉어지도록 피곤하고 지친 존재가 세상에 또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고 그런 존재가 흔히 털이 쓰레기처럼 더러워지도록 어두운 공원에 버려져 있다는 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편혜영(2009), <토끼의 묘>, 《2009,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 9쪽

 
   

   안도감은 씁쓸함보다 먼저다. '그'의 마음은 인터넷 게시판을 방랑하며 나보다 더 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 '그래도 내가 낫지'라고 위안하는 어떤 마음들을 닮았다. 버려진 애완동물은 흔하다. 버려진 토끼는 더욱 흔하다. 그것은 토끼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주거지에 버려진 토끼를 데려오기로 한다. 왜냐하면,
 

   
 

길어봤자 몇 개월만 토끼를 책임지면 되는 거였다. 영영 돌볼 필요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토끼의 정서와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버려질 거였으니까.  

위의 책,19쪽

 
   

  작업한 문서를 건넬 때만 그는 유일하게 상사와 대화란 것을 한다. 바로 그 상사가 실종되어도 그 외에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시를 떠도는 살인범에 대한 괴담에도 사람들은 심드렁하다. 아무리 살인이 벌어진 장소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방의 모양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해도. 모두들 그런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8층 건물, 각 층마다 늘어진 25개의 방. 더 이상 누구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에겐 그럴 의지가 없다. 그 역시 이 도시에 존재하는 각각의 샐러리맨들을 피상적인 사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모두 똑같이 검정색 재킷에 흰 와이셔츠 차림인 회사원들의 모습을 그는 바둑알로 치환한다. 오목놀이를 하듯 "연속된 다섯 명이 같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발견하면 씩 웃으며 승자가 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24쪽)던 것처럼.

  상사는 무사히 돌아왔을까. 그는 초인종을 누르던 의문의 사내에게서 무사히 도망쳐 파견지를 벗어났을까. 이 소설은 확실히 불편하다. 전작 <사육장 쪽으로>가 그랬듯 이유도, 마무리도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짧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응시할 때가지도 끝까지 속을 더부룩하게 한다. 뱃속까지 가득한 듯하다. 어쩌면 진실에 가까울 불편함이. 

   

 

   그와 비슷한 빨간 눈을 지닌 토끼는 어떻게 됐을까. 그의 말마따나 '세상에 널린 게 버려진 애완동물(29쪽)'이다. 처음 파견을 나왔을 때 '사냥개'가 되라는 말을 듣고 그 서늘함에 놀랐던 그 역시 새로 파견된 사원에게 마찬가지 말을 한다. 사냥개가 되라고. 다들 그렇게 익숙해진다. 또 그렇게 서로에게 걍팍해진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기형도, <안개>, 《기형도 전집》, 34쪽

 
   

라고 말했던 기형도처럼.
  

   파견 기간 내내 그가 머물렀을 공간을 생각해본다. 그 도시는 기형도의 시 속처럼 그로테스크한 안개가 낀 곳이 아니었을까. 그가 살았던 그 방은 어떨까. 집이라 부르기도 미안한 규격화된 공간. 그 공간은 신경숙의 소설에 등장했던 '외딴 방'보다 더 싸늘했으리라.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게 보였다. 구멍 가게나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육교 위 또한 늘 사람으로 번잡했었건만,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신경숙, 《외딴 방》, 47쪽

 
   

   신경숙의 1979년과 달리 2010년의 그들은 더 이상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음'을 알고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대립항적 감각이기에.
 

 

   신경숙의 <외딴 방>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봉제공장, 전자공장, 의류공장, 식품공장들의 생산 라인이 존재했다. 편혜영의 2010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파티션이 존재한다. 그 파티션이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도 이제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서로를 전염시킨 야박함이 이미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회사 상담원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서비스 신청을 해놓은 시각에서 임의로 "무려" 두 시간 "씩이나" 서비스가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 상담원에게까지 자꾸 말이 야박하게 나왔다. 일주일 동안의 모든 피로가 몰려와 그 두 시간의 여백에 대해 아무 잘못도 없는 인바운드 상담자에게까지 모질어졌다. 나를 피로하게 한 건 그저 일상이었을뿐, 그 상담자가 아니었음에도. 걍팍함이란 이렇듯 전염되는 것이다. <토끼의 묘>의 '그'의 입에서 내 전임자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에게 모질었듯, 그 역시 피로한 토끼에게 모질어졌던 것처럼.

   그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 김치찜집에서 한가해진 틈을 타 식사중인 직원 분들을 벨을 눌러 호출하지 않은 게 내가 한 유일한 덜 야박한 짓이었다. 내 너그러움이란 고작 물 한 잔, 수저 한 개, 반찬 한 그릇 정도다. 그 얄팍한 선량함 덕분에 그날 밤도 깊고 편한 잠을 잤다. 내일이면 다시 또 모질어질 것을 알면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 28층 건물, 각 층마다 있는 25개의 방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거대한 도시엔 모양이며 구조가 완벽하게 같은 700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 수백 수천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끔 스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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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1-19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피로하게 하는건 "알라딘"인데, "알라딘" 때문에 다른 곳에 야박해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집하게 되는 글이군요. 상담원은 아무 잘못이 없죠. 우연히 내가 돈을 낸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을 뿐이고...

한국소설MD김효선 2010-01-22 14:14   좋아요 0 | URL
헉.. 하이드님을 피로하게 만드는 알라딘에 저 역시 포함되어 있군요 ^^;; 댓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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