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조금 불편한 게 아니라 죽도록 불편한 것이다. (8p)
문장은 가감없이 솔직하다.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은 끔찍한 인생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등장한 '기린'의 선언은 이 소설 그 자체이다. '죄책감은 배고픔이나 졸음에 비해 아주 하찮다'는 걸 아는 기린은 스스로의 속물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태생, 서울 거주, 중위권 여대 사회복지학과, 의대생 남자친구, 중상급 외모. 기린의 '스펙'은 속물스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누가 알아. 빈티라는 건 도대체가 감출 수가 없는 건데. 죽자고 티를 안 내려는 게 더 웃기지. 안 그래?"
명은 지은의 말을 들으며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지은과 기린, 둘만 있을 땐 자신의 어떤 점을 가지고 비웃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106p)
기린의 주변에도 온통 속물들 뿐이다. 우정은 얄팍하고 생활은 팍팍하다. 기린의 언니는 TV가 너무 좋아 TV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대학 졸업 이후 몇년 째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언니는 TV처럼 연애하고 TV처럼 헤어진다. 기린의 남자친구 동운은 자신감 넘치는 못생긴 의대생이다. 유산상속을 놓고 물밑 암투를 벌이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기린의 부자 친구 명, 수시로 남자를 바꿔가며 그들에게서 선물을 얻어내는 기린의 예쁜 친구 지은. 생활력 강한 기린의 어머니, 하는 일 없는 기린의 아버지, 그리고 모든 속물의 롤모델 기린의 사촌언니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현실을 닮아있다.
소설 속 문장은 날아갈듯 단출하다. 애써 꾸미는 것도, 멋을 부리는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속물스러움을 말한다. 연재 당시에도 함께 페이지에 게시된 안태영의 삽화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소설의 맛을 더한다. 가볍게 술술 읽히고, 가볍게 웃음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뿐인 소설은 아니다.
좁은 서가를 쭉 둘러보다 시집 코너에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발견했다. 잡지들만 득실대는 작은 서점 안에 베스트셀러도 아닌 독일 작가의 시집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책을 집어들었다. (179p)
기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결혼할 가능성도 없는 의대생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필요한 점심값을 벌기 위해 과외를 하고, 성적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사람들은 알까. 기린이 사실은 서점에서 브레히트를 읽고, 속물 남자와의 소개팅 이후 김중식의 시를 떠올리며, 방 문을 걸어 잠그고 기형도의 시집을 보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영혼을 지녔다는 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열폭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 동네, 엄마 친구 아들 정도에 머무르던 소소한 열폭이 언제부턴가 전 지구적 스케일로 화化했다. 열폭은 경쟁을 강요하고, 속물 되기를 권한다. 속물이 어디 속물이고 싶어 속물이랴. 속물 권하는 사회를 사는 우리 역시 하나의 거룩한 속물들인 것을. 그래서 이 속물들이 더 안쓰럽고 마음 쓰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성복의 시를 떠올렸다. 시를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기린에게 보낸다.
소녀들 철없다. 무슨 일 한번 있으면 그만이지 또, 또 자꾸 보챈다. 전에 우리 아이 놀러갈 때면, 버스 언제 와? 언제 도착해? 언제 밥 먹어? 언제 집에 가? 언제 씻고 자? 늘 그러더니, 소녀들 너희 잠시도 머물 줄 모르는구나. 빨리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고, 빨리 결혼하고, 애 낳고, 빨리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또 뭐 할건대? 소녀들, 너희가 그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붉은 장미는 피지 않는다. 너희는 또 지지 않는 붉은 그리움을 너희 딸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소녀들 철없다, 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