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5월
절판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입니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잖아요.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상 엘리트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은 다들 특권계급이었잖아요. 차별이다 뭐다, 우리한테 따지는 노동조합도 다 엘리트예요. 그렇게 잘 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엘리트들이 재일 코리안을 비호해 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일특권 문제에 경각심이 없는 거고요."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엘리트라고 규정함으로써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2.회원들의 본 모습과 속마음]-60~61쪽

진실. 재특회 회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다. "진실에 눈을 떴다", "진실을 알았다." 그 출처는 모두 인터넷이다. 신문/잡지/텔레비전 등에 의해 은폐되었던 진실이 인터넷의 힘으로 간신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났을 때처럼 헉하고 일어나서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일본의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재특회 회원들이 말하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말이 무기질 기호처럼 느껴졌다. 재일 코리안이라는 말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얼굴도, 표정도, 생활도, 역사도, 풍경도, 그 자세한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일본의 위기를 나타내는, 또는 모든 모순과 문제를 풀 블랙박스 같은 존재로 편의에 따라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2.회원들의 본 모습과 속마음]-75~76쪽

그러나 인터넷에는 비판이나 비난 댓글을 훨씬 넘는 막대한 지지 댓글이 달렸다. 이렇게 많은 격려와 찬성은 그 뒤 재특회의 자신감과 과격화로 이어지게 된다.
"잘했다."
"재특회, 고맙다."
"재특회, 파이팅!"
"(재특회에)박수!"
지금 일본을 감도는 분위기가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불과 10여 명의 활동이었지만, 그 배후에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재특회와 공명하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조선학교를 습격한 이들의 정체는 보이지 않는다.
[3. 범죄 또는 퍼포먼스]-103~104쪽

"눈물이 나서 어쩔 줄 몰랐어요. 진짜로 감동해서 하루에 여섯 번씩 봤죠. 그 희생정신을 저는 동경했습니다. 애국심이 없으면 삶의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마토를 보고 저는 애국자가 됐어요."
그때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요멘이었지만, 야마토 이야기가 나오자 열기를 띄었다. 얼굴도 제법 상기되었다. 그 나름의 애국심을 기르며 2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겨우 도착한 곳이 인터넷이었다. 2채널 같은 게시판에서 '언론전'을 전개하고, 블로그에서 위기를 호소하며, '야마토 정신'으로 일본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우습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인생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메시지가 정말로 이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멘은 진지하게 쿠데타를 하러 나섰다. 인터넷을 통해 선전하고, 장소를 빌려 '쿠데타 설명회'를 개최하며, 때로는 재특회 등의 시위를 경호하기도 했다.
[4. 반재일 조직의 뿌리]-182쪽

그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그가 집요하게 나를 조선인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사키자키만이 아니었다. 많은 재특회 회원들이 "너는 국적이 어디냐?", "사실은 조선인이지?", "언제 귀화했냐?"라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들에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조선인인 것이다. 조선인이나 재일 코리안은 일종의 기호다. 그들은 그 기호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조롱함으로써 우월감을 가지게 된다.
[5. 재일특권의 정체]-197~198쪽

"우리한테 없는 것을 그 녀석들(재일 코리안)은 다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지켜야 할 지역, 지켜야 할 가족, 지켜야 할 학교, 오래 사귄 벗, 재특회와 대치하는 재일 코리안들의 모습에서 그런 것을 발견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시민 단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역 사람들을 위해 나설 수 있을까? 가족과 어깨동무하고 적에게 맞설 수 있을까? 아니, 출신 초등학교를 위해서 달려갈 수 있을까? 모두 '노'였습니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동지 말고는 연대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 싸움은 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특회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증오하는 특권의 정체는 의외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즉, 재일 코리안에게 있는 긴밀한 인간관계와 강렬한 지역 의식, 지금의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것들 말이다. 개인으로 분열되어 인터넷으로밖에 단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눈부신 '특권'으로 보였던 것이 아닐까?
[6. 떠나가는 어른들]-227쪽

하리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재특회 특유의 경박한 발언과 현실 감각의 상실이다.
"인터넷에서 그대로 현실 사회로 나왔을 뿐이에요."
그제야 그는 불량배다운 험악한 표정을 보였다.
"인터넷과 현실의 구분이 안 되는 거죠. 그들이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 같은 이유는 일상생활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경험하지도 않고 인터넷과 같은 감각으로 대처하려고 들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인터넷과 현실은 연속적이니까요."
키보드를 연타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감각을 그대로 길 위에가져온다. 하리야가 말한 이 연속성 때문에, 집회 때 반대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욕설을 퍼붓는 집단 린치도 블로그에 '악플'을 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가지지 않는다. "죽여 버려."라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하리야는 말했다.
[6. 떠나가는 어른들]-255쪽

"이런 단체에 기부하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 "뒤에 거대한 스폰서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취재를 계속하다 보니 '활동에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활동비만은 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재특회의 재정에 협력하고 있는 것은 이름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7. 리더의 표변과 허실]-267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후지TV의 흐름을 만든 것이 재특회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재특회는 그저 흐름에 편승했을 뿐이다. 후지 TV와 한류 프로그램에 대한 공격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터넷에 의해 촉발된 '일반 시민'들이었다. 그 점을 강조해 두어야겠다. 나는 이런 점에서 재특회라는 존재를 만든 오늘날 일본의 '토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 늘어나는 표적]-310~311쪽

김치찌개가 인기 랭킹 1위로 소개된 것이 어째서 편향인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축제다. '후지 TV 반대', '한류 반대'의 이름을 빌린 축제. 아무리 우아한 시위였다 하더라도, 차별적인 언동이 적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세상에 일반적으로 떠다니는 희미한 '반한국', '반북한'의 목소리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뿐이 아닌가?
나는 거기서 재특회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 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처럼 과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낳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의 어딘가 우울한 분노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8. 늘어나는 표적]-314쪽

실제로 재특회 같은 보수 조직에는 어딘가 유사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9. 재특회에 들어가는 이유]-324쪽

사회운동은 이론보다 기세를 통해 확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지키기'보다는 '바꾸기'를 원하는 쪽에 붙기 마련이다. 일찍이 학생운동이 기세를 떨쳤던 것은 무엇보다도 체제를 부수자는 데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편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 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 현상'이 생긴 것이다.
[9. 재특회에 들어가는 이유]-348쪽

주간지 기자로 여러 사건들을 쫓으며 세상에 왠지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까지는 이데올로기와 입장의 차이를 초월해 애매모호한 형태로나마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일이 오늘보다 반드시 나아질 거라는 '시간의 약속'이었다. 달력을 한 장씩 넘기면서 풍요로움을 조금씩 획득해 온 것이 전후의 일본이었다. 좀 낯간지럽지만, 희망이나 미래라는 말을 입에 담기만 하면 우리는 어떻게든 내일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끝났다. (중략) 계약직이나 하청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많은 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담당/관리하는 부서는 인사부가 아니라 기자재를 다루는 부서다. (중략)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런 상황을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소속이 없는 사람들은 아이덴티티를 찾아 나선다. 그중 일부가 의지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일본인'이라는 불변의 '소속감'이었다.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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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지낸 동네를 떠난 뒤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이사온 동네는 빙수집이 변변치 않다는 점이었다. 최근 자그마한 빙수전문점이 하나 생겨서 신났었는데, 어찌 맛있는 건 금방 소문이 나는지 코딱지만한 가게가 맨날 미어 터져서 줄서고 난리다.

 

호밀밭의 그 빙수가 잊혀지지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하면 그 맛을 따라할 수 있을까 싶어하던 차에, 그리운 그 룩을 표지로 쓰고 있는 책을 발견!  손에 넣고나서 눈으로 슥슥 읽고 책꽂이에 꺼내두었다가, 어제 드디어 개시를 해 봤다.

책에 나온 대로 우유얼음을 만들고, 미리 사뒀던 팥이랑 고명떡을 얹어 완성!!

 

 

획기적이다.. 이제 다시 빙고에서 줄서서 기다릴 일은 없을 것이야!

 

 어릴 땐 팥이 싫어서 줄기차게 과일빙수만 해먹었는데, 나이가 차츰 들면서 우유얼음에 찹쌀떡, 팥만 올린 빙수가 제일 맛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이번엔 빙수얼음만 만들었지만, 머지않아 팥도 삶고 베이스소스도 제조하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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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도 재밌어보이고, 3일후엔 백수가 되어 재취업을 준비해야 할 내게 필요해보여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눈 딱 감고 긁는다.

이제 한 서너달은 무급 백수로 지내야하는데..흐헝헝

 

큰소리 땅땅 치면서 나왔으니 여기보단 나은 데로 가야겠다는 압박감에 요새 잠을 설치고 있다. 벌써 이래서야..

 

 

 

 

 

 

플롯으로 보면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인데 최근 읽고 있는 '혼자 행복한 여자가 결혼해도 행복하다'에서 맛깔나게 분석을 잘 해놨길래 급 관심이 생겨 꼽사리로 함께 주문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영화로 오만과 편견을 본 게 다라서..나름 기대를 갖고 있다.

 

  제목에서는 전혀 유추할 수 없지만 제인 오스틴의 작품 비평을 통한 연애론 책인데 나름 재미가 있다. 연애 조언서를 몇 권 읽어본 결과 영양가 있었던 책들은 연애 그 자체보다는 내 자신이 인간으로서 매력을 지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책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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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어릴 적부터 오래오래 가져 온 취미가 뜨개질이고 솜씨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여름용 실도 괜찮은 걸 많이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엔 이상하게 뜨개를 하기 싫어지더라. 계절이 계절인지라 '이상하게'가 아니고 '당연하게'가 더 어울리긴 하겠다.

 

그래서 조금 덜 더운 수예를 해볼까 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니들펠트도 해보고 십자수도 해보고 퀼트도 해보고, 하다가 여름이 지나면 결국 뜨개질로 돌아가게 되긴 한다만은.

 

 

 

도서관에 새 책이 뭐 들어왔나 기웃거리다가 이 책이 들어와 있길래 책소개를 대충 훑고 알라딘 상품소개를 보고 나서 냉큼 상호대차를 신청했다. 이상하게 우리동네 도서관은 어린이 책 위주라 그런지, 다른 동 도서관에는 잘도 들어가는 책들이 우리 도서관에만 빠지는 경우가 많더라.

 

인테리어도 그렇고 소품도 그렇고 요새는 북유럽 스따일이 정말 대 유행인 듯 하다. 뜨개 도서도, 소품집도 무지 많이 나온다. 북유럽st.로 꾸며놓은 집을 보면 깔끔하고도 포근해보여서 예쁘긴 하다만, 몇 권의 인테리어 책을 들여다본 결과 우리집 가구들은 큼직한 것들을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그런 방이 나오긴 힘들겠구나 하는 판단에 이르렀다.

일단 우리 집은 이사 들어올 때 주인이 벽지를 안해줘서 벽부터 망했고... 자취를 할 때 본가에 있던 내 가구들을 전부 가져다 놓은지라... 또 내 가구들은 전부 어두침침한 색이지!ㅠㅠㅠ 어릴 땐 월넛/블랙톤을 좋아했으니까. 

 

이런 가구들로 가득찬 방에 북유럽풍의 소품 몇 개를 올려 놔도 그냥 지저분해지거나 키치한 느낌만 강해진다는 걸 너무 잘 알고있지만!!

책소개에 나와있는 자수들이 꽤 예쁜데다가, 수예 대가인 엄마 말씀에 의하면 "네가 못난 네 작품을 보고도 참아낼 수 있는 인내력만 있다면 쉬울 것"이기 때문에 기대를 한 번 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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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는 여름 헤엄옷을 뜨개로 뜰 수 있어요.
다만, 이 뜨개 헤엄옷은 물에 잘 젖어서 무거우니
아이들한테 떠서 입힐 적에 오래 안 입더라구요 ^^;;;

땀 흘러내리지 말라는 머리띠를 뜰 수도 있고,
시원한 웃도리도 뜰 수 있어요~

브륀 2013-07-26 10:57   좋아요 0 | URL
전 지금 가방을 만들다가 잠깐 팽개쳐놓은 상태예요.
올여름엔 바닷가에서 입을만한 니트를 만들어야지..하고 실이랑 책도 다 사놨는데 역시 여름 되니까 하기 싫어지더라구요ㅠ_ㅠ
 
언어의 배반 - 언어학자와 정치학자, 권력에 중독된 언어를 말하다
김준형.윤상헌 지음 / 뜨인돌 / 2013년 6월
절판


불합리한 편견이 담긴 용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저항 없이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그 단어를 태생시킨 거대한 차별 구조에 편입되고, 차별 행위를 조장한다. 기호 언어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파시스트"라는 말로 언어의 권력적 측면을 갈파했다. 그는 언어는 우리의 무의식을 만들고, 우리는 그 언어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특정 계급과 특정 언어의 밀착 관계에 의해 권력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고착된다고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언어가 권력을 행사하려 들 때마다 그 언어를 버리고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수 없는 다른 자리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언어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권력의 구조적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언어 표현을 끊임없이 따져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학자의 말]-6쪽

이러한 일상적 표현에 묻어 있는 정서는 교수님이 거론하신 '좌빨' 논쟁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즉 동일자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배려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에 들어가 자신이 보는 하늘이 전부일 거라는 편견, 우물 안과 밖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을 고수하는 무지,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는 오만은 사실과 진실의 세계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지요. (중략) 그러나 우리가 유아론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비록 타자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내면적 경험을 통해 타자의 행위를 이해하는 역지사지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몰인식은 타자에 대한 몰인정한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속빈 강정 같은 '좌빨' 유의 무의미한 말이 유통기한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자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 문제가 여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빨]-34~35쪽

없는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우리는 품위와 격을 갈망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보입니다. '국격'이라는 어휘의 순기능이 정말 있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정향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방향은 마갈릿이 언급한 바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며 사회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명예를 부여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국격]-76쪽

다양하게 존재하는 철학적 관점과 논란들이 나름의 깊은 근거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슈에 대한 정답을 쉽게 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답을 구하고 있는 이유가 있음도 겸허하게 인정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완벽히 옳고, 완벽히 틀린 것이 없다는 점에서 양시론과 양비론의 설득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실생활에서도 보면 이런 양시론과 양비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서 판단을 내려주는 듯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제점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대안은 없습니다. 최선이나 최악은 사실 많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논란과 싸울 거리가 생겼을 때 최선과 최악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그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차선과 차악이라도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두고 흑백논리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권력에 의한 억압이 아닐까요?
[양비론, 양시론]-102쪽

정의나 인권과 같이 공동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권리 상호 간의 충돌'로 환원시키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스나 철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문제를 시민들의 이동할 권리와 대립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파업이라는 사회적 쟁의의 근본적인 언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한데, 그보다는 표면적인 두 권리의 충돌이라는 일종의 완곡어법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문제의 원인은 매몰되고 피차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력들 간의 다툼으로 왜곡됩니다.
[권리]-105쪽

저는 인간 언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나치가 완곡어법의 상투어를 통해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이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세뇌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나치 정권은 학살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 작업은 '재정착', '동부 지역 노동'등으로 불렀습니다. 말 자체는 행위이며, 말은 현실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말하기의 무능성을 생각과 판단의 무능력과 충분히 연관 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실]-192~194쪽

세사라니는 아이히만이 단순히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거대한 나치라는 전체주의 시스템 안에 있었기에 학살자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두고 축적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반감, 그리고 학습하고 연구하며 발전시켜온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이히만과 같은 학살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전체주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적인 결론을 던졌습니다.
집단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악행에 가담하거나 전혀 생각 없이 명령자들은 추종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거나 자기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한 후에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루시퍼 효과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로 인해 누구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악의 평범성에 동의하지만, 어렵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과 의지도 작동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 같은 맥락으로 명령에 따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맹목적으로 따라간 대중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죄하지 않습니다.
[평범]-205~206쪽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과도한 주장은 책임 회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도 특별히 악한 상황을 만나면 약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집단에 가담했다면 개인이라도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전쟁, 독재 안에서의 악행에서부터 최근 이명박 정권의 범죄까지, 열악한 시대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거나 상부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금물입니다.
[평범]-207쪽

순수가 변질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 자체가 현재의 순수한 행동을 마비시키고 바람직한 결정과 선택을 미루고 회피하게 만든다면, 변질된 것은 현재의 순수가 아니라 바로 순수의 기표를 오용하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중략) 그런 사람들에게 혹시 순수를 향한 동경과 응시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순수를 경험하거나 맛볼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순수라는 기표(단어)로 가리키는 실상은 자신의 사적 욕망일 뿐 정작 아무것도 가리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심지어 사랑한다 말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고 사랑하는(집착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지요) 대상은 그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허언은 존재의 기갈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자신에게조차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광장에 목마름과 배고픔이 가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순수'를 가장한 '불순'한 허언이 가득합니다.
[순수]-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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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을 헤아려 본다면, 한국사람은 지성인이건 지식인이건 여느 사람들이건 일본 제국주의가 밀어붙인 식민지 군사조직 한자말 굴레에 빠진 채 살아가지만, 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요.. 참 거시기한 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