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고나무 지음 / 북콤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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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도 필요 없고 자살도 필요 없다. 29만 원짜리 수표를 든 전두환 포스터를 만들어도 그는 아파하지 않는다.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숨은 재산을, 현실적으로 추징하는 것 뿐이다. 풍자와 자살은 저항의 스타일이다. 문제는 전두환은 더 이상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3년의 한국 행정부와 사법부에게 전두환은 숨은 재산을 추징할 범죄자다. 그러므로 다시, 풍자도 필요 없고 자살도 필요 없다. 선한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면 된다. 국세청과 검찰, 경찰이 움직이도록 시민들이 강제해야 한다.
[전두환과 재산]-36쪽

전두환과 신군부는 그 무엇과도 투쟁하지 않았다. 당시 역사책과 회고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사익 외에 '신군부가 왜 군부 권력을 접수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기 어렵다. 전두환은 자신의 권력 행사를 가로막는 모든 것과 투쟁했을 뿐이다.
'나세르-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쿠데타의 반복 과정에서, 진보적 성격은 점점 희미해지고 날것으로서 권력의 기술만 남는 모습을 본다. 그러므로 김종필이 감히 나세르와 케말 파샤를 언급한 것은, 이집트와 터키의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한국 쿠데타의 선배 나세르]-80쪽

어떤 마음가짐이 이런 하극상을 가능하게 했을까. 육사 11기와 17기의 회고록을 읽고 그들을 인터뷰할수록 한 가지가 뚜렷이 보였다. 엘리트주의다. 그것은 진보나 보수 같은 이념 지향과 무관했다. 육사 11기는 최초의 4년제 정규 육사라는 엘리트 의식으로 충만했다. 17기의 엘리트 의식은 더 심했다. (중략)
육사 8기는 1948년 입교해 22주의 단기 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6.25 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다가 숱하게 죽었다. 육사 11기들은 전쟁이 한창일 때 전선에 나가는 대신 교육을 받은 세대다. 육사 11기가 '우리는 엘리트다'라고 외친다면 육사 8기는 '우리가 피 흘려 남한을 지켰다'라고 받아칠 만하다. 그러나 김종필 같은 육사 8기생도 전두환과 노태우에겐 '단기 육사 졸업생'에 불과했다.
[전두환과 육사, 하극상의 역사]-92~93쪽

쿠데타의 기억은 여전히 육사 주위를 검은 안개처럼 떠돈다. 전두환에게 '우로봐'하는 생도들이 김오랑 기념비를 보고 '우로봐'할 기회가 여전히 없다. 육사에는 아직, 검은 안개가 있다.
[전두환과 육사, 하극상의 역사]-97쪽

최규하 대통령과 행정부가 키를 쥐고 있었다. 최규하는 적극적 부작위(不作爲)'로 쿠데타를 도왔다. 지금까지 역사 서술은 최규하 대통령을 우유부단한 피해자로 묘사해왔다. 내가 읽은 자료 속의 최규하는 전두환의 적극적 협조자였다. 형법 18조는 '부작위범'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 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 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 최규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부작위범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
[쿠데타는 왜 진압되지 않았나]-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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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비를 만났다 - TED 과학자의 800일 추적기 지식여행자 시리즈 2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절판


좀비가 진짜있다면, 좀비화는 특정한 문화적 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조치'이다. 실제로 독약을 제조해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투여할지를 결정하고 희생자들에게 뿌리고 이들을 관리함으로써 절차를 마무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무엇보다 좀비가 정말 존재한다면 아이티의 소작농 사회의 신념과 구조에 근거한 설명, 즉 타당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4. 하얀 어둠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86쪽

"아이티를 이해하려면 물 한 잔을 마신다고 생각해야 하네. 유리잔을 만지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가 없지. 하지만 유리잔은 그저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 자네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도 또 자네를 살게 해 주는 것도 유리잔이 아니라 물이라네. 아이티에서 유리잔은 로마 가톨릭과 정부, 경찰과 군, 프랑스어 그리고 파리에서 넘어온 일련의 법률이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90퍼센트가 넘는 대다수의 국민을 이해하지 못해. 프랑스어를 읽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지. 로마 가톨릭이 공식적인 종교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이 나라는 85퍼센트가 가톨릭이고 110퍼센트가 부두교라고 말일세. 이 나라도 서양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인구 6백만 명이 넘는 나라에 의사는 고작 5백 명뿐이고, 그나마도 수도를 제외한 외곽에서 개업한 의사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24쪽

그렇다면 마르셀은? 보코르이자 사악한 마법사인가, 아니면 자비로운 사제이자 치유자인 호웅간인가? 보부아르는 그런 식의 구분이 궤변이라고 지적했다. 마르셀은 물론 둘 다였지만, 사람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다. 보코르로서의 마르셀은 어둠을 섬기지만, 호웅간으로서의 마르셀은 빛의 편에 서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러므 마르셀 역시 어둠과 빛 모두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부두교에서는 이러한 양면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를 제도화했다. 마르셀이라는 존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영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동은 선과 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궁극적인 책임자가 바로 마르셀이었던 것이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42쪽

해독제는 희생자를 죽음에서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약으로 인한 궁극적인 죽음을 막아줄 뿐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만약 희생자가 보름 이내에 자신이 독약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해독제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보름이 넘어버리면 해독제 외에도 정성스러운 의식이 필요하다. 상징적으로나마 희생자를 산 채로 매장하는 의식이 거행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이렇게 심각한 경우, 희생자를 살리는 것은 해독제가 아니라 의식과 믿음이라는 말이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49쪽

보코르가 나무에 달린 라임 열매 반을 잘라내고 나머지 반을 하룻밤 동안 가지에 매달린 채로 두면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고 한다. 잘라낸 반쪽은 사당으로 가져오는데 그 반쪽이 동일한 강도의 해독제가 된다는 것이다. 의미는 분명했다. 나뭇가지에 달린 반쪽은 자영의 영역에 남아서 야생적이며 위협적이고 유독한 독이 된다. 그리고 성소로 가져온 다른 반쪽은 길들여지고 숙성되어 완전한 치유제가 되는 것이다. 듣자 하니, 인간이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사물도 그렇다는 것이다. 라임 열매의 경우에는 인간의 중재만으로도 그 잠재된 역량이 드러날 수 있다. 부두교 신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오직 호웅간만이 모든 우주의 힘을 통합하고 균형을 유지한다. 따라서 아이티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존재도 사람이며 독약에 감염된 희생자를 치료하는 것 또한 사람의 힘이다. 결국, 나는 좀비를 만드는 것은 독약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50쪽

일본인들이 선호하고 높은 값을 쳐주는 복어의 종은 네 가지인데, 모두 후구 속에 속하는 종들이며 하나같이 맹독성 복어라고 알려진 종들이다. 어째서 그런 물고기로 러시안 룰렛 게임 같은 모험을 하는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후구는 먹느냐 죽느냐, 음식이냐 독이냐를 가르는 경계에 있는 몇 안 되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후구 요리는 심미적 경험의 결정체이다. 후구 요리사의 치밀한 손놀림은 독을 제거하기 위한 손놀림이 아니라 후구를 먹는 손님이 야릇한 생리적 후유증을 즐기는 선까지 독의 농도를 줄이기 위한 손놀림이다. 혀나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주 경미한 마비나 욱신거림, 온몸에 퍼지는 온기와 홍조를 통해 전반적인 행복감에 들뜨게 만드는 선까지.
[7. 칠판에 그린 표]-175쪽

독약의 제조법으로는 한 사람을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만 알 수 있다. 비록 드물긴 했지만 이와 똑같은 일이 일본에서도 분명히 일어났고, 또한 후구의 독에 중독된 사람들이 좀비가 아닌 것도 분명했다. 그들은 그저 독을 먹은 환자일 뿐이다. 정신에 작용하는 모든 약물은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향정신성 약물은 철저히 양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약물이 약리적으로는 특정한 상태를 유발하지만, 이 상태라는 것은 특정한 문화나 심리적인 영향, 혹은 기대치에 따라 가공될 수 있는 원자재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이 말하는 약물 경험에서의 '설정과 배경set and setting'이다. '설정set'은 약물에 대한 개개인의 기대치를 나타내는 용어이고, '배경setting'은 약물이 투입되는 환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체적 조건이나 사회적 조건이 이에 해당한다.
[7. 칠판에 그린 표]-188~189쪽

실신과 마찬가지로, 강경증, 탈력발작, 가사상태, 무아지경도 사회적으로 습득된 질환이었고 이러한 질환들의 원인은 시대정신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러한 질환은 특정 시기에 구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났다. (중략)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당시의 고매한 문화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원시'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던 현상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의 병을 심리적인 문제로 여긴 것과 똑같은 이치로, 한 사회가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육체적 질병이나 증상을 심어 놓는 것이 가능했다.
[8. 부두교 죽음]-197쪽

인간에서 좀비로 바뀐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의 본질적인 변화는 부두교 죽음에서도 매우 특수한 사례였다. 마법사의 주문은 희생자의 강렬한 공포를 자극하는 긴 과정에 불을 붙이고 공동체의 증강된 신념을 고조시키며 마침내 실질적인 죽음으로 이끈다. 아이티의 소작농들이 보기에 나르시스는 진짜로 죽었고, 마법으로 땅속에서 살아 돌아온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마법사처럼, 죽음을 초래한 보코르도 소품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교묘하게 만든 독약이 그 소품이었는데, 이것이 희생자의 강렬한 공포를 수천 배로 증폭하게 한 지렛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르시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가루약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신이었다.
[8. 부두교 죽음]-202쪽

지금까지 우리는 좀비 독약이 약리학적으로 가사상태를 유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코르가 독약과 부활 사이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알고 있으리라고 가정했다. 이제 분명히 깨달은 사실은 부두교 신도들은 이 과정을 반드시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부두교 신도들에게 있어서, 좀비를 만드는 데는 두 가지의 부차적인 사건이 얽혀 있다. 비정상적인 죽음과 묘지 의식이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가루약은 단지 희생자를 죽일 뿐이고 비정상적으로 죽은 때에만, 가루약의 희생자는 좀비가 될 수도 있다. 좀비를 만드는 것은 해독제나 가루약이 아니다. 바로 보코르의 마법의 힘이다. 그래서 헤라르드 시몽은 내가 결코 좀비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나는 마법을 알지 못했고, 헤라르드는 누군가 내게 이 신비로운 사실을 알려주리라고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10. 뱀과 무지개]-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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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인문학 - 반제도 비평가의 인문학 현장 보고서
오창은 지음 / 이매진 / 2013년 8월
절판


자기계발서가 자신을 제어하는 기술을 다룬다면, 인문학은 자신을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기르게 한다. 둘 다 내부를 향하지만, 자신을 제어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자기 계발)과 사회적 관계 때문에 자아를 상실하는 상황에서 자기 성찰을 강화하려는 욕망(인문학)사이의 차이는 심오하다. 그것이 어느 순간 처세술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문학적 실천이 누구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문학의 가면을 쓴 자기계발학]-29쪽

사람들은 현실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 부조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과 싸우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해 세상의 부조리를 심화시킨다. 문제는 앎이 아니라, 삶이다. 앎이 삶과 더불어 가려면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로서 감수성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감수성의 변화에 기반해 주류적 관점이나 문화, 이미 조직된 체계를 거부하고 '이탈'을 감내해야 약소자의 주체성은 형성된다.
[대안을 찾는 대안]-43쪽

번역의 가치보다 원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후진 학문 사회다.
학문의 종속적 풍토가 번역의 가치를 다시 설정하는 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관성이 된 해외 유학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한국 학문의 취약한 토대와 자생성은 번역과 관련이 있다. 한국 학문은 번역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의 문제 설정을 통해서도 주체적 학문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한 사회 공동체가 학문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면 자국어로 된 학문 체계를 형성해야 한다. 한국 근대 학문은 120여 년에 이르는 서구 유학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도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번역 권력]-127쪽

1990년대 소수자 운동은 '성 정치와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을 두고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성적 소수자 운동에서 시작한 성 정치 운동은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해 급진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더불어 정체성의 정치는 장애인, 청소년, 성매매 여성, 수형자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잉여들'과 실천적으로 결합했다. 성과 정체성의 정치에 입각한 소수자의 권리 선언은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마저 짓밟힌 현실을 폭로했다. 문제는 이런 인정 투쟁이 다수자의 관용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수자로 규정한 개별적 주체는 '보편적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대자아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런 투쟁은 결국 권력을 지닌 지배 계층의 관용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인정 투쟁은 일종의 권력 배분에 국한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왜곡됐다. 분배할 수 있는 권력의 양을 한정하면서 권력을 지닌 지배 계층은 소수자 사이의 투쟁을 유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약소자와 유력자]-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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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게임 - 그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콘유 3부작
박해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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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심장부와 같은 공간과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상상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경유해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는 것. 그것은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심상 지리의 세계였다. 고작해야 먼 친척분이 경영하던 지방 소도시의 서점이 내 청소년기의 관통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의 공간은 겨우 내 한 몸을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나는 아직 그 공간을 확장 리모델링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3장_한강의 두 번째 기적]-137쪽

결국 그들은 전선에서 벗어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기업과 언론사에 취업했으며 고시를 준비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학원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진정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진정성은 전위에서 퇴각한 1980년대의 젊은 생존자들이 1990년대라는 "황폐한 세월"을 견디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공유한 윤리적 에토스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남발하던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사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고안한 방어적 개념이기도 했다.
[3장_한강의 두 번째 기적]-179쪽

흥미로운 점은 386 세대에 속한 국내 작가 일부가 하루키의 캐릭터들에 넋을 잃고서는 그와 유사한 캐릭터들을 국산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캐릭터들은 하루키에게는 이미 경험해 본 과거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근 미래였기 때문이다. 즉 하루키에게는 후일담의 대상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SF의 소재였던 것이다.
[4장_이름하여 신세대, 그리하여 청춘의 시뮬라크르]-228쪽

어쨌든 큐브에 거주하는 기혼 가구들이 내 집 마련에 나선 것은 큐브의 입장에서는 무척 반길만 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큐브 역시 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수용 인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니까요. 세입자 일부를 큐브 바깥으로 배출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에 큐브의 설계자들은 용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은행과 건설사를 동원해 큐브 곳곳에 거대한 사다리들을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다리는 큐브 내부의 '방'과 큐브 바깥의 '집'을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근로자재산형성저축과 분양가 상한제와 주택청약 제도 같은 복잡한 공법이 활용되었지요. 큐브의 거주자들은 목돈 마련과 분양권 당첨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급형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습니다.
[5장_지상의 방 한 칸]-258쪽

이제 큐브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도시 연속체의 일부로 제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몰려드는 청년 세대의 이주민들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정 기간 머무르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상의 공간, 즉 사회적 이동을 위한 주거의 환승역으로 제 기능을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60쪽

하지만 이 사다리는 정부의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전반에 걸친 부동산 시장의 폭등세로 인해 끝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큐브는 방에서 방으로의 이동만이 무한 반복되는 폐쇄계, 그러니까 환승역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선의 세계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5장_지상의 방 한 칸]-270쪽

삼포 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의미하는 신조어였지만, 실제로는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같으면 그들 중 상당수는 결혼을 한 다음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파트 분양 광고를 눈여겨볼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큐브 바깥의 세계로 빠져나갈 엄두도 내보지 못한 채 여전히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월세방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델하우스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늙어가고 있던 것이지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73~274쪽

2000년대 초/중반의 집값 폭등 이후 사실상 거주자가 혼자 힘으로 큐브에서 탈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불하는 임대료만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큐브에서 빠져나와 그 바깥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윤활유의 기능을 했습니다. 거주용 방은 세입자-집주인-은행의 경로를 따라, 그리고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들은 고객-자영업자-건물주-은행의 경로를 따라 단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세입자든 자영업자든 집주인이든 건물주든, 은행에 빚을 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임대료 흐름의 맨 끝자리는 거의 언제나 은행 차지였습니다. 은행은 이들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주기적으로 이자를 받아냈으니까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84~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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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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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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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인문학- 반제도 비평가의 인문학 현장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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