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비를 만났다 - TED 과학자의 800일 추적기 지식여행자 시리즈 2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절판


좀비가 진짜있다면, 좀비화는 특정한 문화적 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조치'이다. 실제로 독약을 제조해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투여할지를 결정하고 희생자들에게 뿌리고 이들을 관리함으로써 절차를 마무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무엇보다 좀비가 정말 존재한다면 아이티의 소작농 사회의 신념과 구조에 근거한 설명, 즉 타당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4. 하얀 어둠 그리고 살아있는 시체]-86쪽

"아이티를 이해하려면 물 한 잔을 마신다고 생각해야 하네. 유리잔을 만지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가 없지. 하지만 유리잔은 그저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 자네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도 또 자네를 살게 해 주는 것도 유리잔이 아니라 물이라네. 아이티에서 유리잔은 로마 가톨릭과 정부, 경찰과 군, 프랑스어 그리고 파리에서 넘어온 일련의 법률이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90퍼센트가 넘는 대다수의 국민을 이해하지 못해. 프랑스어를 읽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지. 로마 가톨릭이 공식적인 종교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이 나라는 85퍼센트가 가톨릭이고 110퍼센트가 부두교라고 말일세. 이 나라도 서양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인구 6백만 명이 넘는 나라에 의사는 고작 5백 명뿐이고, 그나마도 수도를 제외한 외곽에서 개업한 의사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24쪽

그렇다면 마르셀은? 보코르이자 사악한 마법사인가, 아니면 자비로운 사제이자 치유자인 호웅간인가? 보부아르는 그런 식의 구분이 궤변이라고 지적했다. 마르셀은 물론 둘 다였지만, 사람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다. 보코르로서의 마르셀은 어둠을 섬기지만, 호웅간으로서의 마르셀은 빛의 편에 서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러므 마르셀 역시 어둠과 빛 모두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부두교에서는 이러한 양면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를 제도화했다. 마르셀이라는 존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영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동은 선과 악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궁극적인 책임자가 바로 마르셀이었던 것이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42쪽

해독제는 희생자를 죽음에서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약으로 인한 궁극적인 죽음을 막아줄 뿐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만약 희생자가 보름 이내에 자신이 독약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해독제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보름이 넘어버리면 해독제 외에도 정성스러운 의식이 필요하다. 상징적으로나마 희생자를 산 채로 매장하는 의식이 거행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이렇게 심각한 경우, 희생자를 살리는 것은 해독제가 아니라 의식과 믿음이라는 말이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49쪽

보코르가 나무에 달린 라임 열매 반을 잘라내고 나머지 반을 하룻밤 동안 가지에 매달린 채로 두면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고 한다. 잘라낸 반쪽은 사당으로 가져오는데 그 반쪽이 동일한 강도의 해독제가 된다는 것이다. 의미는 분명했다. 나뭇가지에 달린 반쪽은 자영의 영역에 남아서 야생적이며 위협적이고 유독한 독이 된다. 그리고 성소로 가져온 다른 반쪽은 길들여지고 숙성되어 완전한 치유제가 되는 것이다. 듣자 하니, 인간이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사물도 그렇다는 것이다. 라임 열매의 경우에는 인간의 중재만으로도 그 잠재된 역량이 드러날 수 있다. 부두교 신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오직 호웅간만이 모든 우주의 힘을 통합하고 균형을 유지한다. 따라서 아이티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존재도 사람이며 독약에 감염된 희생자를 치료하는 것 또한 사람의 힘이다. 결국, 나는 좀비를 만드는 것은 독약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6. 모든 것이 독약이고, 그 어느 것도 독약이 아니다]-150쪽

일본인들이 선호하고 높은 값을 쳐주는 복어의 종은 네 가지인데, 모두 후구 속에 속하는 종들이며 하나같이 맹독성 복어라고 알려진 종들이다. 어째서 그런 물고기로 러시안 룰렛 게임 같은 모험을 하는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후구는 먹느냐 죽느냐, 음식이냐 독이냐를 가르는 경계에 있는 몇 안 되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후구 요리는 심미적 경험의 결정체이다. 후구 요리사의 치밀한 손놀림은 독을 제거하기 위한 손놀림이 아니라 후구를 먹는 손님이 야릇한 생리적 후유증을 즐기는 선까지 독의 농도를 줄이기 위한 손놀림이다. 혀나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주 경미한 마비나 욱신거림, 온몸에 퍼지는 온기와 홍조를 통해 전반적인 행복감에 들뜨게 만드는 선까지.
[7. 칠판에 그린 표]-175쪽

독약의 제조법으로는 한 사람을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만 알 수 있다. 비록 드물긴 했지만 이와 똑같은 일이 일본에서도 분명히 일어났고, 또한 후구의 독에 중독된 사람들이 좀비가 아닌 것도 분명했다. 그들은 그저 독을 먹은 환자일 뿐이다. 정신에 작용하는 모든 약물은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향정신성 약물은 철저히 양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약물이 약리적으로는 특정한 상태를 유발하지만, 이 상태라는 것은 특정한 문화나 심리적인 영향, 혹은 기대치에 따라 가공될 수 있는 원자재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이 말하는 약물 경험에서의 '설정과 배경set and setting'이다. '설정set'은 약물에 대한 개개인의 기대치를 나타내는 용어이고, '배경setting'은 약물이 투입되는 환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체적 조건이나 사회적 조건이 이에 해당한다.
[7. 칠판에 그린 표]-188~189쪽

실신과 마찬가지로, 강경증, 탈력발작, 가사상태, 무아지경도 사회적으로 습득된 질환이었고 이러한 질환들의 원인은 시대정신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이러한 질환은 특정 시기에 구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났다. (중략)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당시의 고매한 문화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원시'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던 현상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의 병을 심리적인 문제로 여긴 것과 똑같은 이치로, 한 사회가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육체적 질병이나 증상을 심어 놓는 것이 가능했다.
[8. 부두교 죽음]-197쪽

인간에서 좀비로 바뀐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의 본질적인 변화는 부두교 죽음에서도 매우 특수한 사례였다. 마법사의 주문은 희생자의 강렬한 공포를 자극하는 긴 과정에 불을 붙이고 공동체의 증강된 신념을 고조시키며 마침내 실질적인 죽음으로 이끈다. 아이티의 소작농들이 보기에 나르시스는 진짜로 죽었고, 마법으로 땅속에서 살아 돌아온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세상의 수많은 마법사처럼, 죽음을 초래한 보코르도 소품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교묘하게 만든 독약이 그 소품이었는데, 이것이 희생자의 강렬한 공포를 수천 배로 증폭하게 한 지렛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르시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가루약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신이었다.
[8. 부두교 죽음]-202쪽

지금까지 우리는 좀비 독약이 약리학적으로 가사상태를 유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코르가 독약과 부활 사이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알고 있으리라고 가정했다. 이제 분명히 깨달은 사실은 부두교 신도들은 이 과정을 반드시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부두교 신도들에게 있어서, 좀비를 만드는 데는 두 가지의 부차적인 사건이 얽혀 있다. 비정상적인 죽음과 묘지 의식이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가루약은 단지 희생자를 죽일 뿐이고 비정상적으로 죽은 때에만, 가루약의 희생자는 좀비가 될 수도 있다. 좀비를 만드는 것은 해독제나 가루약이 아니다. 바로 보코르의 마법의 힘이다. 그래서 헤라르드 시몽은 내가 결코 좀비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나는 마법을 알지 못했고, 헤라르드는 누군가 내게 이 신비로운 사실을 알려주리라고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10. 뱀과 무지개]-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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