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심장부와 같은 공간과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상상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경유해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는 것. 그것은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심상 지리의 세계였다. 고작해야 먼 친척분이 경영하던 지방 소도시의 서점이 내 청소년기의 관통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의 공간은 겨우 내 한 몸을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나는 아직 그 공간을 확장 리모델링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3장_한강의 두 번째 기적]-137쪽
결국 그들은 전선에서 벗어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기업과 언론사에 취업했으며 고시를 준비하거나 출판사를 차리거나 학원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진정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진정성은 전위에서 퇴각한 1980년대의 젊은 생존자들이 1990년대라는 "황폐한 세월"을 견디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공유한 윤리적 에토스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남발하던 "비열한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사태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고안한 방어적 개념이기도 했다. [3장_한강의 두 번째 기적]-179쪽
흥미로운 점은 386 세대에 속한 국내 작가 일부가 하루키의 캐릭터들에 넋을 잃고서는 그와 유사한 캐릭터들을 국산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캐릭터들은 하루키에게는 이미 경험해 본 과거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근 미래였기 때문이다. 즉 하루키에게는 후일담의 대상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SF의 소재였던 것이다. [4장_이름하여 신세대, 그리하여 청춘의 시뮬라크르]-228쪽
어쨌든 큐브에 거주하는 기혼 가구들이 내 집 마련에 나선 것은 큐브의 입장에서는 무척 반길만 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큐브 역시 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수용 인원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으니까요. 세입자 일부를 큐브 바깥으로 배출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에 큐브의 설계자들은 용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은행과 건설사를 동원해 큐브 곳곳에 거대한 사다리들을 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다리는 큐브 내부의 '방'과 큐브 바깥의 '집'을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근로자재산형성저축과 분양가 상한제와 주택청약 제도 같은 복잡한 공법이 활용되었지요. 큐브의 거주자들은 목돈 마련과 분양권 당첨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급형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습니다. [5장_지상의 방 한 칸]-258쪽
이제 큐브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도시 연속체의 일부로 제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몰려드는 청년 세대의 이주민들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정 기간 머무르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상의 공간, 즉 사회적 이동을 위한 주거의 환승역으로 제 기능을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60쪽
하지만 이 사다리는 정부의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전반에 걸친 부동산 시장의 폭등세로 인해 끝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큐브는 방에서 방으로의 이동만이 무한 반복되는 폐쇄계, 그러니까 환승역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선의 세계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5장_지상의 방 한 칸]-270쪽
삼포 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의미하는 신조어였지만, 실제로는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 같으면 그들 중 상당수는 결혼을 한 다음 허리띠를 졸라매며 아파트 분양 광고를 눈여겨볼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큐브 바깥의 세계로 빠져나갈 엄두도 내보지 못한 채 여전히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월세방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델하우스에 한번 가보지도 못한 채 늙어가고 있던 것이지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73~274쪽
2000년대 초/중반의 집값 폭등 이후 사실상 거주자가 혼자 힘으로 큐브에서 탈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불하는 임대료만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큐브에서 빠져나와 그 바깥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윤활유의 기능을 했습니다. 거주용 방은 세입자-집주인-은행의 경로를 따라, 그리고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들은 고객-자영업자-건물주-은행의 경로를 따라 단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세입자든 자영업자든 집주인이든 건물주든, 은행에 빚을 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임대료 흐름의 맨 끝자리는 거의 언제나 은행 차지였습니다. 은행은 이들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주기적으로 이자를 받아냈으니까요. [5장_지상의 방 한 칸]-284~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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