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은 그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정부에 요구합니다. 법인세율을 낮추고, 노동자 임금을 낮추고, 공해 규제를 완화하고, 원자력 발전으로 전력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사회적 인프라를 위해 국비를 지출하도록 말이지요. 그리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겠다며 협박합니다. 그리 되면 고용이 줄고 소비가 얼어붙고 지역경제가 붕괴하고 법인세수가 격감해 국민국가를 꾸려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정부는 그 요구에 굴복합니다.
그 결과 국민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이 없는 기업일수록 국민국가로부터 많은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다는 도착된 법칙이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도착된 법칙은 '세계 표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부를 사유재산으로 바꾸는 데 열심인 사람, 공공의 복리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을 해당 국가가 전력을 다해 지원합니다. 그것이 지금 미국과 중국, 일본, 아마도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실상일 것입니다-12쪽
이러한 이익 상반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영역이 바로 학교교육입니다. 학교는 애당초 국민국가의 내부 장치입니다. 학교의 설립 목적은 '차세대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을 계속해서 길러내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른을 키운다'는 것은 100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아주 합리적인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다음 4분기의 수익을 올리는데 필요한 인재 육성'입니다. 능력 있고, 임금이 낮고, 체력이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회사의 전근 명령 하나로 곧바로 해외 지점이나 공장에 부임할 수 있는(이를 일본의 교육계는 '글로벌 인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그런 청년을 대량으로 공급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합니다.-16쪽
예전의 불량스러움과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 불량학생들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어, 나쁜 짓을 하다가 적발당하면 어쨌든 '나쁜 짓을 했다'라는 사실관계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달라졌다. 지금은 학생들이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한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교사도 학생 자신도 그 사실을 바로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부인한다. 이런 '우기기' 태도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퍼졌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유행하고 있다고 언론에서 다루지도 않았다. 극히 짧은 시간에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나같이 우기기를 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최근에는 좀더 나이가 많은 세대에까지 퍼진 듯 싶다.(중략) 하지만 그들로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확고한 들이대며 비행을 추궁해도 하지 않았다고 버티는 데서 협상이 시작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습관화해왔기 때문에 이미 다른 대응책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42-44쪽
아이들은 자기들이 한 질문이 어른들을 아연실색케하거나 또는 유아적인 지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무의미한 답변을 끌어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일찍부터 배우게 된다. 이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이 아이들에게 일종의 성취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공한 기억으로 인해 아이들은 일찍부터 사사건건 "이게 어디에 쓸모가 있나요? 이것을 하면 나한테 어떻게 좋아요?"라고 묻는다. 당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면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한다'. 이러한 판단 기준을 인생을 막 시작한 즈음부터 몸에 새기게 된다. 이렇게 '등가교환 하는 아이들'이 탄생한다.-47-48쪽
소비하는 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한다. 그렇게 출발선에서 받은 각인의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고 본다. 누구든 소비주체로 등장하는 한, 그 구매 주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 대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각인, 이는 단순히 배금주의적 경향이 심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문제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사는 사람입니다."하고 자신을 설정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어엿한 한 사람의 선수로 시장에 참가하도록 허락된다. 이 경험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감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아이가 한번 이 쾌감을 맛보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 자신을 '사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또 누군가와 마주하는 상황이 되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소비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53쪽
다시 말해 소비란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인 행위이며, 소비자는 무시간적인 '유령'이다. 소비자는 상품과 화폐를 교환하는 전 기간에 걸쳐(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원리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주체'로 정해져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인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비주체로 일단 시장에 들어온 인간은 누구나 '등가교환이 이뤄지는 동안 소비주체는 결코 변해선 안 되고 가치관을 바꿔서도 안 된다. 교환율도 바꿔서는 안 되며 자신이 측정하던 잣대를 바꿔서도 안 된다'는 엄중한 금기사항을 지켜야만 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배움의 장에 소비주체로 등장해버린 아이들도 이와 같은 금기사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73쪽
'자기 찾기'란 자기평가와 외부평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로 외부평가보다 자기평가에 후하기 때문에 외부평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경의와 위신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통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적으로 성장해 간다. 하지만 개중에는 외부평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폭거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다들 멍청해서 사람을 몰라보는 거야"하며. 그래서 그런 멍청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서 외부평가를 다시 받으려 한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다. 자기가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가 타인의 평가보다 더 진실하다는 전제 자체가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78쪽
일반적으로 부유층 가정의 아이들이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보다 학력이 높게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보통 부유한 가정이 자녀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 더 내밀한 이유가 있다. 바로 부유층 자녀들은 높은 학력을 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빈곤층 자녀들은 학력의 효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있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이다. '학력의 차이'는 간단하며 계량이 가능하지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는 '공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취급하기 곤란하다. '목표하는 바를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온 가족이 믿고 있고, 실제로 그 노력의 성과를 향유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공언하고 지금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원인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비교하면,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91쪽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으니 내버려 두세요"라는 말은 젊은이들의 상투어다. 그 사람은 정말로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봐 두려운 것이다. 자기결정에 대해 타인이 관여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워서 "당신이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먼저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되돌아올 길 없는 사회적 하강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자기결정/자기책임이라는 삶의 방식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밖에 없다. 하지만 리스크 사회에서 강자들을 살펴보면 다들 상부상조/상호지원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그 덕분에 리스크 헤지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리스크 사회에서 자기결정/자기책임을 관철할 수 있는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스크를 떠안는 존재는 자기결정/자기책임의 원리에 충실한 약자들뿐이다.-113쪽
소비자 마인드는 등가교환을 희망하고, 등가교환은 무시간 모델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의 장에서도 아이들은 '공부'할 동기가 사라진다. '시간'을 배제한 곳에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는 실러버스syllabus라는 게 있다. 예전의 수업개요나 학습요강 같은 것으로, 이를 더 구체화한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는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152-153쪽
미지에 대한 지성의 개방성, 내가 이대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얻을 수 있는 앎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멘토', '문제', '가설'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추상적인 설명이어서 유감이지만, 여기서 키워드는 '시간'이다.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무지'의 정의도 가능하다. 무지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한다. 내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인 것이다.-1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