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Paperback)
밀란 쿤데라 지음 / HarperPerennial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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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개가 웃어!“


우리 무명이를 보는 사람들의 낯설지 않은 반응이다.

무명이는 정말 웃는다. 


순수한 열정으로 테니스 공을 쫒아 달려가서는 내 앞에 툭, 떨구고 다시 던져달라며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환한 미소에 완벽하게 무장해제된다.


마음껏 달릴 수 없는 집안에서는 공놀이 몇 번에 금방 시들해지곤 하지만, 경계 없는 잔디밭에선 풀어놓은 말처럼 뛸 때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 그대로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놀아도 지치지 않는다. 똑같이 웃는다. 바람에 실린 꽃향기를 맡느라 잠시 하늘을 향해 코를 킁킁 거리기도 하고, 애써 가져온 공을 친구가 뺏어가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너무 뛰어서 숨이 찰 때는 잠시 혀를 내밀고 숨을 고르기도 하지만, 공놀이만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아, 있다. 고기. 고기라면 공 따위는 던져버리고 고기 앞으로 가, 가 되는구나. 하지만 고기 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함께 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고기 따위도 안중에 없다. 한창 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자신도 놀아야 하는 우리 무명이는 고기로 유인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고기보다 좋은 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거라나? 순서로 치면 공 > 고기 > 사람인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하고 싶은 사람. 무명이는 그렇게 견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대로 행동한다. 


인간만이 사랑의 의미를 두고 갑론일박을 벌인다.


그리고 저들의 생각으로 동물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철학자와 늑대>의 저자 마크 롤랜즈는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파악하고 개(또는 늑대)는 일직선이 아닌 원을 그린다고 추측한다. 우리는 시간의 화살에 매이길 거부하며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며 행복을 바라지만 늑대는 각 순간들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본다고 가정한다. 브레닌(그가 개인 줄 알고 입양한 늑대)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그저 관찰한 것으로 추론할 뿐이다. 거기에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 등장하고, 니체의 영원회귀를 소설의 도입부에 떡 하니 가져다 놓은 쿤데라가 연결된다. 그리고 쿤데라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장은 ‘카레닌의 미소’다. (카레닌은 남자 주인공 토마스가 자신에 대한 사랑 또는 집착을 희석시킬 요량으로 테레사에게 선물한 개. 테레사는 그에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그녀가 들고 있던 책 <안나 카레니나>의 ‘카레니나’에서 따온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지만 토마스는 그렇게 생긴 개에게, 여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며 카레니나의 남편 성을 따라 ‘카레닌’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약함으로 자신보다 강한 토마스를 길들이고, 테레사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했던 토마스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와 관계한다. 네 명의 남녀가 사랑을 둘러싼 끊없는 모험을 펼치고 난 후 그들은 카레닌과 똑같이 평등하게 맞이하는 건 결국 죽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펼친 사랑이라는 모험은 테레사와 카레닌, 정확히 말하면 카레닌이 테레사를 향한 사랑 앞에서 다들 조금씩 모자라 보인다. 결국 완전한 사랑이란 복잡한 감정과 생각, 계산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가. 나는 모른다. 카레닌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다만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서도 테레사를 보고 미소지을 수 있는 카레닌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다.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 <철학자와 늑대> 중에서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 작가 쿤데라의 영면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29년생, 94세가 훌쩍 넘은 나이일텐데, 건강과 안부가 궁금하다. 평생 도청과 감시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선택한 망명,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교적 최근에 이뤄진 국적 회복, 프랑스 문화 권력과 애증의 관계, 작은 언어를 쓰는 나라의 사람으로써 큰 언어를 쓰는 나라의 언어로 세계 독자와 만난 그가 보여주었던 거대한 문학의 세계.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독일어로 썼다. 쿤데라는 체코어로 쓰다가 나중에는 프랑스어로 발표하기도 했다.(그것이 화근이 되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의 검수를 거치지 않은 번역본에 대해 선을 그었다. 번역에 의해 그의 문체는 장중한 바로크체에서 간결한 미니멀리즘을 오고갔기 때문이다. 


그런 우여곡절 많은 그의 글을 영어로 읽었다. 체코어나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솔직히 수십 년 전 읽었던 한글본과 너무 다른 소설이었다. (내가 달라진 건가?) 영어가 가진 간결함이 그의 문체와 제법 어울리는 듯했다. 뭔가 말단 부분이 깎여나간 메타 언어로서의 번역 언어가 주는 중간지대 느낌이 오히려 편했다고 할까. 과연 내가 과거에 읽은 그 책이 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몰입해서, 열광하면서, 무릎을 치며 읽었다. (읽기 쉬워서 그랬나?) 프랑스어로 읽으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영어공부도 힘든데 프랑스어까지는 좀… 작작하라며 스스로를 말렸다. 잠깐만…. 영어 좀 수월해지고 나면, 그러고도 힘이 남아있으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궁금해지면 그때 만나자. 


오늘 아침 신나게 공놀이하고 온 무명이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천사처럼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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