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분에 4,500번쯤 회전하는 보관디스크를 갖고 있다.
나는 그 디스크에 있는 것들을
이름, 크기, 날짜, 파일유형, 또는 문장별로 검색할 수 있다.
1분이면 원하는 편지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
아주 좋다. 그것은 내 마음을 스쳐지나가는 기록들이다.


몇 달에 한번씩 나는 사다리를 놓고 들창문을 통해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먼지가 잔뜩 묻은 들보 너머로
편지뭉치가 들어있는 회색구두상자가 보인다.
거기에는 내가 10살이었을 적에
가장 좋은 친구로부터 받은 발렌타인 카드가 들어있다.
대학시절에 애인으로부터 받은 편지도 있다.
거기에서 원하는 편지를 찾으려면 1시간쯤 걸릴 것이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추억에 잠기기 때문이다.
아주 좋다. 그것은 내 마음에 말을 하는 편지이다.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개발하면서 살아가며,
그 모습은
글씨,
서명,
목소리,
옷차림,
악수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전자우편을 보낼 때에는 이 모든 것이 빠진다.


나는 전자우편을 보내고 나서 후회한 적이 많다.
그러나 편지를 쓸 때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다.
나는 쓴 것을 한번 더 읽고,
봉투를 쓰고,
우표를 붙인다.
다시 생각해볼 시간도 있다.
잔뜩 화가 난 채 밤에 쓴 편지를
다음날 햇빛 아래에서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클리포드 스톨, <허풍떠는 인터넷> 중에서



............................................................................................
2004.4.13 (00:33) @싸이월

이 글은 대학교 시절 어느 수업에선가
인터넷을 바라보는 찬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책(또다른 책은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이었다) 중의
한 권으로 제시되었던 <허풍떠는 인터넷>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다른 내용은 다 까먹고
이 대목만 일기에 써놓아 가끔씩 들여다보며 다짐을 하곤 한다.

"그래, 편지를 써버릇해야 돼."

2002년 6월 선거 전날
우남기 선생님 댁에 놀러갔을 때
또래들과의 편지쓰기 시간에
편지지 뒷면을 장식하던 구절로 쓴 적이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잠시나마 미친 척하고 편지를 한번 써보는 계기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나한테 쓰라는 게 아니다.
생각나는 사람의 집주소를 몰래 입수해서
한번 보내보는 건 어떨까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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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발견 - 상수와 의리가 무너진 주역의 본질
문용직 지음 / 부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 

나는 이리 생각한다. 

어느 분야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두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첫번째 과정은 그 분야 속으로 들어가서 흠뻑 몸을 적셔보는 것이다. 

두번째 과정은 그 학문 속에서 밖으로 나와서 돌아보는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이 두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문용직 <주역의 발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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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gital ? 

개론 수업으로 음악, 미술, 연극을 배웠던 일은 지나고 생각해봐도 참 잘한 일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최종판 격으로 <대중예술의 이해>를 듣게 되었다. 절친한 친구의 권유도 한몫했다. "꼭 들어라. 안 들으면 후회한다!" 수업과 개봉영화는 대개 남들의 입소문대로 따라갈 필요가 믿는 편이다. 9월초 수업시간, 교수님은 짤막하게 한마디 질문을 던지셨다. 

"디지틀, 디지털, 디지탈 그러는데, ...... Digital이 우리 말로 뭡니까?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요?" 

명쾌하게 한 단어로 포착이 되어지지 않는, 되어질 수 없는 말. 9월이나 지금이나. 

 

2. 쏠트예찬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계치다. (단 기계체조는 좀 한다.) 과학이 싫어서 문과를 온 케이스는 그 시절에 나밖에 없었다. (신기한 넘!) 특히 컴퓨터는 내게 소통불능의 매체로 단연 으뜸이다. 엑셀 하나를 돌려보면서도 좌절한다. 이렇게 많은 기능이! 사람이 지레 겁을 먹는 것만큼 실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없다. 한국축구가 국제경기에 약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의미가 통한다.  

그러던 나와 컴과의 거리가 본격적으로 좁혀진 것은 그나마 메일의 사용이었다. 홍대 전전컴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한메일 괜찮다고 써보라고 추천했던 말이 계기였다. 그때가 98년 여름인가 그랬다. 걸작 아이디를 만들어보겠다고 영한사전, 불어사전 한 이틀 뒤적이던 그때 생각도 난다. 

중요한 사실은 새문안대학부에서도 그해 늦여름 정도부터 메일클럽이 생겨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창호 형과 민석이 형(모두 92학번이다!) 중심으로 30-40명이 평일날 집단메일을 주고 받으며 원시적 형태의 영적교류를 시작한 시기였다. 나의 디지틀 일상은 어쩌면 교회사람들과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에 대학부가 SALT를 순산하였으니... 그 기쁨은 상당히 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SALT라고 답을 적기 위하여 여러 딴 얘기로 돌아왔다. 글 읽는 분들이 피곤하시겠다. 

SALT는 내게 QT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이 공간을 통하여 나는 많은 배움과 도전을 입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러 선후배와 동기들의 글이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늘 다가오고 있으며, 한사람 한사람의 개성까지 묻어나 그 은혜는 여러 물감을 칠해놓은 빠레트 같기도 하다. 그 글을 쓴 분위기가 기쁨이건, 성냄이건, 슬픔이건, 즐거움이건 말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 컨텐츠가 부실한 것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게시판 딸랑 하나 놓고도 모두가 사랑으로 이 공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글을 매일(자주) 올리는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온전히 바라보고 철저히 읽음으로써 함께 하는 이름없는 쏠트 갤러리 여러분께도 감사를 전한다. 마우스 왼쪽버튼 몇번의 조작으로 젊은 날의 영적 초상을 발견하는 일, 그것은 일상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 공간은 10월의 대학부 테마인 전도와도 무관치 않은 곳이 아닐까. 사이버 전도!! SALT의 어떤 글을 읽은 형제가, 자매가 우리 공동체에 거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 낚는 어부의 형상이다. 지금 당장 쏠트를 방문하여 보라. 넷츠고쩜컴슬래시캡새우. 최소한 새우라도 낚을 수 있을 것이다. 

  

3. "너가 문관이 딸이니? 진짜아?" 

나의 꿈 중의 하나는 주일학교 교사이다. 앞으로의 교회학교 선생님의 직분은 그 영역이 상당히 세분화될 거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전문성? 결국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선생님의 상이 정립될 것이다. 나의 영역이 무엇이 될지는 미지수. 

20년 후를 희미하게 내다본다. 새문안교회 주일학교를 지키고 있든지 어느 교회에서 그 일을 하고 있든지 나중에 그러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을 나는 지금부터 진심으로 바라고 있고 그때 가서 심히 놀라며 기뻐하고 싶다. 내가 맡은 반아이와 함께 부모님 얘기를 나누다가. 뭐 이런 식이다. 

"니가 문관이 딸이니? 진짜? 아, 옛날에 너희 아빠가 친교부 삼총사로 활약했었는데 그때 대단했지......어, 그리고...... 그래그래, 오늘 결석한 우리반 이삭(가명, 김성빈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그 당시 대학부 회장이었거든. 그 친구는 집회 끝날 때쯤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걸어나와서 매주 그랬단다." 

"폐회하겠습니다." 

매주 보는 폐회대형도 아늑하고 참 좋다. 

  

................................................................................................................................................................... 

추석명절에 제기동 본가에 갔다가  샬롬지 원고 쓰고 출력해둔 종이가 이면지에 껴있어 신기하게 읽어보다가 집으로 가져와버렸다. 거진 10년 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이 얼마나 바뀐 것일까? 당시 편집장은 황혜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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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제일 어려운 거라며 내 나름의 개똥철학을 전파하던 내가 
몇년만인지 두꺼운 책 여닐곱 권을 쌓아놓고 공부하려다 보니까 
자꾸 손석희 교수의 이 글이 가끔씩 떠올라서, 
어디서 퍼다 둔다. 두달 남았다.

........................................................................................

지각인생  

/ 손석희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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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이야기를 긴 시간 듣고나서도,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두렵지 않으세요?"

밥상 위에 놓인 된장찌개의 맛이라도 이야기하듯, 전혀 힘주지 않은 말투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학생일 때는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니까."라고 생각해 침묵합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는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젊은 말단일 뿐이니까. 부장이 되면 말할 수 있을 거야."라고 미루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부장이 되고나면 부장도 별 힘 없는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보도국에 더 이상 선배가 없는 기자가 되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도 물론 있겠지만, 현업 기자로서는 더 올라갈 곳도 없습니다.

그런 지금도 내가 알고 믿는 바를 말하지 않는다면, 언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나도 그처럼 소박하고 가차없고 명쾌한 말씨를 가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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