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재수생 언니도, 민식이도, 총무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거리나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중략)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 량(梁)자와 나루터 진(津)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걸까.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창작과 비평,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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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가을-겨울초입은,

나에겐 위 단편소설의 노량진이 서소문이나 명동으로 대체될 수 있던 기간이었다.  

3주간의 답답한 시간이 겨우 지나 부분합격의 결과를 받아들었다. 

시험이 끝나던 일요일, 내리던 비를 맞으며 귀가하던 몹쓸 기분에 비해선 

분명히 기대이상이긴 했다. 그런데 합격이라고도, 불합격이라고도 말하기 애매한  

그 지점에 걸린 500 명 중의 한명이 되어, 나는 김애란의 표현대로  

"여전히 지나가고 있는 중"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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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지느러미로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치네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나는 또 다시 바다를 가르네

몇 만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 동안 내가 지켜온
수 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 .........................................

진심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한 가수의 진심을 알아듣는 귀가 자라나고 있다.

생선 한마리 앞에서 코 끝이 찡해지는 우리 삶의 진솔한 풍경이 펼쳐진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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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 이해인 (수녀) 

한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중에서

 

.....................................................................
재작년에 모임 같이 하던 사람들에게 보냈던 편지에
이 시가 적혀 있었다. 어떻게 외워야 할까.  

2007.04.19 (23:51) @싸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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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고종수(은퇴)가 한 말은 아니지만
그의 미니홈피에 있다는 문구.


실패라는 상처 위에

인내라는 약을 발라

노력이라는 붕대를 감는다면

성공이라는 흉터가 남는다.

(스포츠 2.0 / 제 67호)

 

꼭 성공이 아니더라도
우리 안의 의미있는 흉터를 위해서
먼저
타인의 상처를 발견하는 힘이 필요할 거다.
주위에 상처없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절절이 느끼는 하루하루다.  

후시딘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후시딘 

2007.09.09 (22:56) @싸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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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들   /김규항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년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병신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맡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두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99년 5월,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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