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들 /김규항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년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병신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맡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두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99년 5월,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