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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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참으로 묘하다. 작가의 말에서 일찍이 이사카 고타로 가 'life on Mars?'(화성에 생명이?) 라는 노래 제목을 보고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라는 뜻으로 착각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런 어수룩한 이유로 책 제목을 이렇게 짓지는 않았다는 것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라는 질문은 두가지 뜻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이봐, 그러지 말고 화성에서 사는게 어때?" 
작가가 만든 가상의 세계가 너무 말도 안되고 끔찍한 디스토피아라 '이럴꺼면 그냥 화성에서 살련다' 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면,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봤지? 어차피 화성엔 못가, 그러니 뭐라도 하는게 어때?"

이사카 고타로 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보적인 팬층을 구축하고 이사카 고타로 월드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신의 개성을 확고히 구축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어떤것일까 내심 궁금했다. 소설의 첫부분에서는 솔직히 너무 많은 인물들이 별 이유없이 소개됐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소설 말미에서 이 혼란스러웠던 퍼즐 조각들이 완벽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순간,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면 비로소 보인다. 이사카 고타로 가 얼마나 변태적으로(?) 작은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신경써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등장인물 하나하나 쪽지에 이름을 써서 소설속에서의 연결관계에 따라 퍼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일본의 센다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상세계다. 센다이 지역이 안전지구로 선정이 되면서 평화경찰들이 배치된다. 치안을 위해 시민들 사이에 숨어있는 위험 인물들을 색출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처형시킨다. 문제는 그 위험인물을 색출하는 방법인데,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을 닮았다. 무슨 이유로든 한번 찍혀서 잡혀가면 끝장이다. 평화경찰은 자신들이 잡아간 위험인물을 딱 죽기직전까지 고문하여 없던 잘못도 불게 만든다. 위험인물로 잡혀간 사람은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실제로 위험인물로 둔갑되고, 사람들 앞에서 목이 잘려 처형되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움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평화 경찰은 정말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은 주변 이웃이 마음에 안들면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고, 몰래 신고를 한다. 그럼 그 사람은 그 헛소문 때문에 평화경찰에게 잡혀가서 죽을만큼 고문을 당하고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한다. 이 모습은 왠지 북한의 마을에서 5명씩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게 하고, 이웃이 이상한 발언을 하면 몰래 국가에 신고하게 하여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가는 제도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 

어쨋든 이런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치안은 더 좋아졌을지 모르지만(과연 좋아진걸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게 나라냐! 누구든 찍히면 잡아가서 고문하다가 처형한다. 고문하는 도중 죽으면 시체를 숨겨놨다가 다른 사고에 슬쩍 끼워넣어 사고사로 위장하면 그만이다. 평화경찰이 시민을 고문하는 것은 비밀이니까. 평화경찰이 술먹고 택시를 탔다가 택시기사와 시비가 붙었다면 택시 기사를 죽이고, 그 사건을 본 목격자가 있다면 그들까지도 죽이면 된다. 택시기사가 위험인물이라 연행과정에서 죽였다고 둘러대면 되고, 목격자들의 시체는 아무도 몰래 은폐하면 그 뿐인 것이다. 

이런 시대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 유충들은 작은 지렁이처럼 가늘게 생긴 놈들인데 우선 식물 위에 우글우글 모여. 엉켜있는 것 뿐인데 그것을 멀리서 보면 꿀벌의 암컷처럼 보이거든." 
"암컷모양으로? 어떻게 그렇게 되요?" 
"유충들이 잔뜩 모여 마치 매스 게임을 하든 꿈틀거리면서 암컷 꿀벌로 의태를 하는거야. 수십마리가 모여 다른 곤충의 형태를 만드는 거지." 
나는 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이 다같이 모여 문자를 만드는 것을 궁중에서 촬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 얘기를 하자 마카베 고이치로는 신이 났다. 
"그거야, 그거. 게다가 모인 유충들은 암컷 꿀벌의 페로몬을 내뿜어. 그래서 수컷이 속아서 오는거지. 물론 가까이 와도 암컷이 아니니까 교미는 하지 못해. 다만 그 틈을 타서 유충들이 수컷 꿀벌에 달라붙을 수 있는거야." 
마카베 고이치로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p. 206>


어떤 환경에서든 살아남는 방법은 있다.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사는 땅가뢰라는 딱정벌레의 애벌레가 살아남는 법은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의태! 곤충들도 살아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다. 
 
죄없는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잡혀가던 그 때, 난리통 속에서 반갑게도 히어로가 나타난다. 위 아래로 붙은 블랙슈트를 입은 블랙 히어로는 동그란 무기를 굴려서 적들의 정신을 흐린 다음 목검을 사용해 공격한다.  이제 평화경찰에게는 위험 인물보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히어로를 찾아내서 처형시키는 것이 가장 큰 당면 과제가 되었다. 어째 이야기가 코미디처럼 흘러간다. 갑자기 나타난 이 어설픈 블랙 히어로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 히어로는 자기가 돕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돕는 것 같다. 책 표지에서 화성을 배경으로 앉아있던 귀여운 히어로!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생각이지만 이 표지 마저도 왠지 이사카 고타로 가 소품까지 지정해서 꼭 이렇게 그려달라고 주문했을 것만 같다. 

"가시 개미는 말이야. 여왕개미가 일본왕개미의 집에 들어가 그 곳의 여왕개미를 죽여. 그런 다음 그 여왕개미의 냄새를 자기에게 묻히지. 그러면 일본 왕개미의 일개미들이 가시개미의 여왕개미를 자기네 여왕개미로 착각하고 열심히 모신다고. 가시개미의 유충과 알을 기르는거지. 그러다가 일본왕개미들은 수명을 다해 죽고 어느새 가시개미들은 성채가 되지." 
<p. 480>


이사카 고타로는 소설속에서 왜 이런 세계를 구축한걸까? 마치 일부러 빠져나가기 힘든 미로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을 찾아보라는 것 같다. 영화 '마션'에서 화성에 혼자 남은 주인공이 어떻게든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서 감자를 키워먹으며 자신을 구하러 올때까지 기다렸던 것처럼, 아무리 개떡같은 사회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작가는 물었다.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내생각엔 이런 뜻이 담겨있을 것 같다. 
"화성에서 살 수 있다면, 여기서도 살 수 있을것이네. 그러니 의태를 하던, 변태를 하던 지구에 적응해보게나!"


어차피 지금의 우리 시대도 말이 안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고작 몇 십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소설 속 같은 일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말이 되는 정상적인 시대보다 말이 안되는 시대가 역사적으로 더 길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한 완벽한 정의란 없다. 누구에게는 정의가, 누구에겐 위선이 되기도 하니까.  이것이 그의 큰 그림이었을까? 대다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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낢 부럽지 않은 신혼여행기 - 행복한 삶의 방식을 찾으러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에 가다
낢(서나래) 글.그림.사진 / 씨네21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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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잘그리는 사람들은 좋겠다. 이런 사랑스러운 만화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다니!! '낢이 사는 이야기' 라는 웹툰으로 유명한 서나래 작가의 단행본 '낢 부럽지 않은 신혼여행기' 가 나왔다. 건축가인 남편 이과장과 함께 책상 없어질 각오를 하고 무려 3주의 휴가기간을 내어 다녀온 그들의 유럽 여행기! 

나도 신혼여행은 꼭 유럽으로 가야겠다고 그 전부터 마음 먹고 있었기에 이들의 신혼여행기가 더 관심이 갔다. 이들은 3주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를 다녀왔는데 유럽이라면 당근 서유럽이지 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주는 아름다운 풍경과 깨알같은 여행팁들이 들어있다. 책을 다읽고 남친에게 책을 보여주며 "오빠 나 신혼여행 동유럽으로 갈래~" 했다는. 책 속에는 초판 한정 '캐리어 스티커'가 들어있다. 캐릭터가 그려진 저 깜찍한 스티커를 붙이고 나도 어서 여행을 떠나고 싶구나 +_+ 



아무리 친한 친구나 커플도 여행을 가면 취향이 안맞아 싸우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과장 과 낢은 다행히 취향이 잘 맞는 편이었으나... 그래도 여행가서 아주 사소한 걸로 다투고선 따로 찢어져서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근데 잠시동안 떨어져있었는데 낢은 길을 헤매서 지하철을 거꾸로 타고, 이과장은 낢이 모든 물건을 다 들고 가버려서 물어물어 숙소로 돌아왔다는 후문 ㅋ '낢 부럽지 않은 신혼여행기' 에서는 둘만의 투닥투닥이 넘나 귀엽다.



커플이 떠난 곳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와 크로아티아의 라스토케 라는 곳인데 두 곳 다 고요한 호수가 흐르고 전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여행기를 보면서 도시보다는 이런 조용한 시골마을에 마음이 더 끌렸던 걸 보면 난 이런 곳으로 떠나고 싶은 가보다ㅋ 조용히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면서 책도 읽고 진짜 여유를 즐겨보고 싶다.  




낢 부럽지 않은 신혼여행기 의 가장 큰 재미는 두 사람의 귀여운 케미인데,  아직 방귀를 못튼 두 사람이 부끄러워서 낢이 나가서 방귀 좀 뀌고 오겠다고 하자, 이과장이 자기도 따라나서며 같이 뿡뿡 방귀를 뀌면서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 너무 귀여운 거 아닌지ㅋㅋ



여행가면 그 지역에서 꼭 사와야되는 쇼핑 리스트! 요런거 은근히 알짜 정보다. 모르고 안사오면 급 서운한 아이템들은 지역마다 따로 모아서 정리해두었다. 알롬두들러는 사과맛 탄산음료라는데 맛있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했다. 살구술과 모차르트 초코렛도 먹어 보고 싶다. 여행 가게 되면 꼭 사와야겠다. 




이들은 일주일은 오스트리아 여행 그리고 야간 열차를 타고 크로아티아로 이동한 후 그때부터는 2주간 렌트카를 타고 여행 했다. 예약했던 차가 다 나가는 바람에 업그레이드 된 BMW 차량을 받아들고선 둘 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ㅋ 여행 중 바로 옆이 낭떠러지인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길엔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ㅋ    



여행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술을 한잔 두잔 먹다 보니 꽐라가 되도록 술이 취했던 커플. 덕분에 낢은 술 먹으면 간장계란밥을 꼭 먹는다는 개인 취향을 신랑 이과장에서 들키고 마는데,  이 장면 볼 때 나도 갑자기 간장 계란밥이 얼마나 땡기던지 ㅋㅋㅋ 밥에 날계란을 깨뜨려넣고는 전자렌지에 살짝 돌려서 거기다 간장이랑 참기름을 넣어서 비벼먹는단다. 오잉, 이건 새로운 방법 같아서 나도 담에 한번 이렇게 해먹어 보는 걸로! ㅋ



그들은 이렇게 3주간의 꿈같은 여행을 통해 결혼 준비 하며 못다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얘기도 나눴다고 한다. 신혼여행은 사실 2015년에 다녀왔는데 단행본 편집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2년뒤에야 책이 나왔다는 후문도 있었다. 배나래 작가는 만화 그리는거 외에 여행 정보도 주고자 사진과 글을 실어야 하는데, 글쓰는게 너무 어려웠다는 후기를 남겼는데, 난 생각한 바를 그림으로, 그것도 매우 귀엽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낢 작가가 너무 부러웠다. 

평생에 딱 한번 밖에 못가는 신혼여행, 잘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기고 오는게 이득인 것 같다. 부부가 되고나서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이니 거기서 서로 몰랐던 사실도 알고, 부부로써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느끼는게 많지 않을까. 그나저나 나도 여행가면 자세히 기록하고 남겨서 뭐라도 추억거리를 기록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혼자 많이도 낄낄거리며 웃었던 책, 두사람의 귀엽고 명랑한 신혼 여행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잔뜩한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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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허지은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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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소설을 처음 접했다. 지리적인 위치보다는 심적으로 더 멀게 느껴지는 곳, 까만 히잡을 쓰고 다니는 여성들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곳, 이런 나라의 여성 작가는 과연 어떤 내용을 책을 썼을까? 나의 몫 은 이란 정부에 의해 두번이나 출판을 금지당했지만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 이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26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2010년에는 이탈리아의 '보카치오 문학상'도 수상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란의 여성이 겪은 수난과 고통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거라고 짐작했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답답함에 가슴을 쳤던 기억이 있어 연달아서 소설 속에서 학대받고 힘들어하는 여성을 보고 싶지 않았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 두께에도 겁을 먹었기에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너무 잼있다!' 그리고 '어째 우리나라랑 돌아가는 환경이 좀 비슷하다?' 였다. 소극적으로 남성에게 학대받는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될까봐 은근히 겁먹었던 내게 이 소설은 주인공 '마수메'가 자신에게 주어진 수난과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고 지혜롭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나라 보다 훨씬 여성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오히려 걸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슈퍼우먼과 같은 한 여성의 일대기를 보니 감동이 밀려오면서도 한편 책장을 덮고 나서는 '여성의 삶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몫> 은 주인공 '마수메'의 10대 시절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행적과 그 사이에 일어난 이란의 정치적 변화모습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소설이다. 매우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마수메는 망나니같은 작은 오빠 '아흐매드',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첫째오빠 '마흐무드', 누나를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형들에게 일러바치는 얄미운 동생 '알리', 여성은 남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갖은 수난을 받으며 자란다. 여성은 배울 필요도 없고, 오로지 시집가서 남편만 잘 부양하면 된다고 믿는 어머니 때문에 학교도 못갈 뻔 하지만 다행히 가족들 중 마수메를 가장 예뻐해주는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 학교에 다니게 된다. 마수메의 친오빠들은 마수메가 차도르를 안걸치고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외갓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마수메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들을 중시하는 어머니는 그들의 행동이 맞다는 듯 딸이 오빠에게 폭행을 당해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인물이다. 

그러던 마수메에게 마법처럼 첫사랑이 찾아온다. 단짝친구 파르바네와 함께 늘 지나다니는 길에 위치한 약국에서 일하는 '사이드', 그들은 첫눈에 서로 반하지만 눈길만 주고 받을 뿐이다. 어느 날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마수메는 몇일동안 집에 머물게 되는데, 항상 보이던 그녀가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된 사이드는 파르바네를 통해 마수메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하게 된다.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마수메는 그 감정조차 정숙한 여자는 가져서는 안될 불온한 감정이 아닐까 불안해하지만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사이드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수메는 다리가 덜 나았는데도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우겨 학교에 가다가 갑자기 다리통증이 심해져 넘어지게 되는데 약국에 있던 사이드가 뛰어나와 다리상태를 봐주고 진통제를 지어준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 줄이야. 얄미운 동생 알리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형들에게 뛰어가 누나가 외갓 남자와 시시덕 거렸고, 그 남자가 마수메의 다리를 주물렀다고 이른 것이다. 기회를 잡은 친오빠들은 마수메가 집안의 명예와 자기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고개를 들 수 없게 했다며 마수메를 엄청나게 두들겨 패서 몇일동안 사경을 헤매게 만들고, 사이드에게도 칼을 들고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다치게 만든다. 

"아버지, 아버지의 딸이 아버지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전 아니에요. 저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거든요. 알리가 오면 물어보세요. 그 아이가 뭘 봤는지.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저 숙녀인 척 하는 계집애가 약국의 하인놈과 놀아났다고요!" 
< 나의 몫 p.79 >


마수메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가하는 차별이 소설 전체에 걸쳐 가장 심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쳐서 약국에서 상처를 치료한 것이 가족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니, 그것보다 여동생이 마치 자기의 소유물이라도 된 양 말하는 것이 역겨웠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비호감으로 나오는 마수메의 둘째 오빠 아흐매드는 끝까지 망나니 짓을 못버리고 평생을 방황하다 마약에 찌들어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객사하게 된다. 아무도 그가 죽었다고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 사이드와 그렇게 헤어지고 마수메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얼굴도 한 번 못본 남자 '하미드'와 17살의 나이로 강제 결혼을 하게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 상태에서 낯선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끔찍했던 마수메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어설프게 실패하고선 어쩔 수 없이 하미드의 아내로서의 몫을 다 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마수메는 행복과 불행이 롤러 코스터를 타듯 반복되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세상이 바뀌길 원했던 혁명주의자 남편 '하미드'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가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쁜 남편이었지만 다행히 생각은 깨어있어서 여자도 교육을 많이 받고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마수메는 남편이 자기를 혼자 남겨두는 동안 닥치는데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으며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교 공부도 한다. 그렇게 점점 자신만의 신념과 지성을 갖추게 되는 마수메는 소설에 나오는 전체 인물 중에서 누구보다 지혜롭고 독립적이며 똑똑하다. 

내가 일자리를 구했다는 뉴스를 듣고 다들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눈이 곧 튀어나올 것 같이 놀랐다. 
"사무실에 나간다는 말이냐? 남자들처럼?" 
"네, 이제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아요." 
"신이시여, 제 목숨을 거두어주소서! 별소릴 다 하는구나! 말세가 왔어! 네 아버지와 오빠들이 그걸 허락할지, 난 모르겠구나." 
"아버지나 오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과 내 아이들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저는 이제 결혼한 여자에요.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니고요.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아서 살아요. 그러니까, 허튼 소리들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에요." 
이 짧은 최후통첩에 친정 식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p.350~351>


어머니의 구시대적인 발언에 대한 이 얼마나 사이다 같은 발언인가. 마수메는 남편 없이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줄 아는 여자였고, 직장에서는 일로 인정받고, 살림과 일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럼 당신들 편에 서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데요? 신념이 다른 사람들은 어쩔거냐고요? 지금 이 나라에는 수백개의 정당과 분파가 있고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어요. 당신 스타일의 정부를 받아들이지는 않을거라고요. 그 사람들을 다 어떻게 할래요?" 
"민중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악인들이고 반역자들의 집단일 뿐이야. 제거되어야 하는 자들이라고." 
"그럼, 그들을 처형할거에요?" 
"그래, 필요하다면." 
"샤가 바로 그런 방식을 택했었죠. 그런데 그것을 압제라고 외쳤던 이유는 뭐에요? 당신이 엄청나게 고결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바보였어요. 당신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한 내가 멍청했었다고요! 민중을 위해 투쟁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인권에 대해 설교를 하던 고결한 분이 결국 되고 싶었던 것이 사형집행인 인줄은 정말 몰랐네요! 지금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당신 세력이 권력을 잡고 또 다른 대량학살을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의 환상이에요! 허무맹랑한 꿈이라고요! 그들이 당신을 죽일거에요! 그들은 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정말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옳은 거에요." 
<p. 449>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혁명이 일어났지만 남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꾼다. 마수메는 남편이 잘못된 길로 가려하자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설득할 줄 아는 여자였다. 물론 남편은 자기 생각에 빠져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와 또다른 자기식의 혁명을 꿈꾸던 남편은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다 결국에는 공산주의자로 잡혀들어가 처형당하고 만다. 

'나의 몫'에는 한 여자의 전투적인 삶, 1979년을 전후로 일어난 이란 혁명, 그로 인해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어쩌면 역사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낯선 나라의 이야기에서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건 왜일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며 유교주의에 젖어있었던 우리나라와, 이란의 종교교리로 인한 여성차별은 사실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순리라는 이유로 많은 여성이 고통받아 왔고, 지금도 그런 전통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이란 혁명의 모습도 어쩐지 예전 우리나라 국민들이 독재정치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렇지만 현재 이란과 우리나라의 모습은 완전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란은 오히려 샤를 몰아내고 호메이니가 집권하는 이란 혁명을 진행하면서 극종교주의를 선언해 그때부터 여성들을 더 옭아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9년 전에는 자유롭게 미니스커트에 세련된 스타일을 즐겼던 여성들이 혁명이후로 운전금지, 일금지, 무조건 차도르 착용으로 바껴서 지금처럼 모든 여성이 온몸을 둘둘 싸고 다니도록 바꼈다고 한다. 어쩌면 혁명으로 인해 가장 큰 희생을 당한 계급은 여성이었던 셈이다. 이란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잘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인해 호기심이 생겨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읽으면서 다양한 극적인 요소로 재미도 있었고, 마수메의 지혜와 용기에 감탄하기도 했으며, 남보다 못한 친오빠들의 만행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며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던 즐거운 독서였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이루지 못한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행복'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는 날 이마에 새겨지는 것이다. 각자의 몫은 따로 정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힌대도 바뀌지 않는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 이 생에서 나에게 마련해놓은 운명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나만의 운명이라는게 있을까? 아니면 난 내 인생의 남자들, 나를 자신들의 신념과 목적의 제물로 삼은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운명의 일부인 걸까? 아버지와 오빠들, 남동생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남편은 자기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나를 재물로 바쳤어. 그리고 아들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애국심에 다시 희생양이 되었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 반역자의 아내? 아니면 자유를 위해 투쟁한 영웅의 아내? 반체제를 꿈꾸는 아들의 어머니? 자유를 사랑하는 투쟁가의 희생정신 투철한 부모? 그들이 나를 꼭대기에 올려놨다가 끌어내린 게 대체 몇 번이지? 아무 자격이 없는 나를. 그들은 나의 능력이나 업적 때문에 나를 추앙한 것도 아니었고 내 실수 때문에 나를 내 던진 것도 아니었어. 마치 나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것 같아.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어. 내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나? 나를 위해 일을 한 적이 있어?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할 권리가 있은 적이 있었어? 누군가가 나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냐고?" 
< 나의 몫 p.674>


평생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녀의 마지막이 이런 슬픈 독백이라니, 안타깝다. 그녀의 빛나는 지혜와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서는 한번도 쓰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태어난 이유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에 걸쳐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웠으며 책 속에 나오는 어떤 남자보다 지혜롭고 용감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도 그녀처럼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슬기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남자든 여자든 무조건 일독 하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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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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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7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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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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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도 이 소설을 나의 상견례날 부산가던 KTX 기차안에서 처음 읽게 됐다. 가볍고 얇은 책이라 가지고 다니기 편할 것 같아서 챙겨간 책이었는데, 왔다갔다 하는 동안 이 책을 읽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웠다. 어색할까 걱정했던 상견례 자리, 생각보다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였지만, 먼저 결혼한 남동생의 상견례 자리와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남동생의 상견례 자리에서는 부모님이 동생의 있는 점 없는 점을 다 끌어모아 자랑하고 칭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내 상견례 자리에서도 좋은 말을 많이 해주겠지 했는데, "우리 애가 많이 부족해요, 우리 애가 살림도 하나도 할 줄 몰라서 큰일이에요" 등등 나의 부족한 얘기들만 잔뜩 늘어놓는 부모님을 보며 은근슬쩍 화가 나기도 했다. 상견례가 끝난 후 엄마에게 서운함을 담아 "엄마 내가 그렇게 부족한 딸이야? 왜 시댁 어른들한테 나 부족하단 얘기만 잔뜩 해?" 라고 했더니, 원래 딸은 아무리 잘나도 부족하다고 하는 거라며, 기분 상해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들 장가보낼 때와 딸 시집 보낼 때 그렇게 온도차가 심하다니 기쁜 날인데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 하루였다. 

이 책은 줄거리로 딱히 요약할 사항이 없을 정도로 평범한 가정에서 그야말로 평범하게 자라온 내 또래의 비슷한 여자 82년생 김지영 씨가 나온다. 비교적 착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아기를 놓고 평범하게 살던 김지영씨가 어느 날, 마치 빙의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김지영씨가 많이 따르던 선배의 목소리를 빌려 남편에게 지영이한테 잘하라며 조언을 하기도 하고, 명절에 시부모님댁에 가서는 친정엄마에 빙의된듯 "사부인,우리딸도 귀한딸이에요"라고 해서 시댁식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범했던 김지영씨가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소설은 연도를 나누어 차근차근 그녀의 삶에 대해 담백하게, 때론 보고서처럼 적어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줄로만 알고 살듯이. 
< 82년생 김지영 p. 46>



이 부분에서 사실 충격을 받았다. 왜 남자아이들 번호가 앞번호인 것이 이상하다고 한번도 생각지 못했을까. 주민등록번호도 왜 꼭 남자가 1이고 여자가 2로 시작할까. 그 사실 자체가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한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던 내 자신이 더 충격이었다. 


자녀가 반드시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혼인신고 할 때 부부가 합의했다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경우는 호주제가 폐지된 2008년 65건을 시작으로 매년 200건 안팎에 불과하다.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들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씨의 말에 정대현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오'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 82년생 김지영 p.132>


예전에, 결혼한 친구가 같이 키우던 고양이한테도 남편의 성을 붙여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보고 좀 놀란적이 있다. 반려묘한테 마저 남편의 성을 붙이는게 저렇게도 자연스럽다니, 가족들이 모이면 엄마만 성이 다르다는게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왠지 나머지 가족외에 엄마만 외부인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기를 힘들게 낳는건 정작 엄마인데 자식의 성은 무조건 남편의 성을 따른다. 호주제가 폐지되었다는 말은 나도 얼핏 들은적이 있지만 실제로 아빠 대신 엄마의 성을 따라 아이의 성을 정했다는 사례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나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들었다면 나조차도 '집안에 무슨 사정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친구에게 얼마전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애기를 낳으면 꼭 오빠 성을 따라야돼?" 남자친구는 쿨하게 말했다. "아니, 니 성 따라도 돼! 니 성을 따르자!" 하지만 우리는 웃프게도 성이 같다. 이걸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그때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하려고.... 
김지영씨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중간에 아이가 깨서 우는데도 모르고 집까지 정신없이 유모차를 밀며 달렸다. 오후 내내 멍했다. 
< 82년생 김지영 p.164>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고 힘든 가사에만 전념하는 것도 억울한데, 남편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맘충으로 전락하다니, 이래서 한국 여자들이 아이 낳기를 싫어하는 것 아닐까. 여자들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 아이는 여자 혼자 원해서 낳는 것도 아니고, 육아도 당연히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에게 한 말도 아닌데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나도 머지않아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가사일에 전념하게 되면 저런 처지가 될까? 오지도 않은 미래가 벌써 두렵다. 오빠에게는 난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소설 < 82년생 김지영 > 의 힘은 여성들이 그동안 겪어왔지만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성차별, 성희롱에 대해서 무섭도록 자각하게 해준다는데 있다. 200여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소설을 읽는동안 가슴이 쿡쿡 여기저기 많이도 찔린 느낌이다. 책을 읽고나서 자기 전이나 샤워를 할 때,  알게 모르게 사회에 팽배해 있는 성차별들이 많이 생각나 혼자 분해했다. 오래전에 어떤 페미니스트 여성이 SNS에 올린 글이 생각났다. 
"왜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의 형제들에게 "아가씨", "도련님" 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왠지 예전에 주인집 하녀나 노비들이 주인의 자녀들을 높여 부르던 명칭같지 않나요? 남편들이 아내의 형제들에게 처남,처제, 처형 등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에 비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 내용을 읽고, 남자친구에게 "나 오빠 여동생한테 아가씨라고 부르려니까 왠지 그 집 하녀가 되는거 같아서 싫은데..."라고 했더니, 자기도 듣고보니 이상하다며 아가씨말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얘기해줬다. 그 때부터 한살 어린 오빠 여동생과는 서로 "ㅇㅇ씨~", "언니"라고 부르며 사이좋게 지내는 중이다. 이것 마저도 결혼을 하고 나면 주변의 눈치로 언젠가 바꿔야 할 명칭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싶어진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나는 그닥 예민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그런 부분에 둔하기도 하고, 누가 성희롱같은 농담을 해도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 웃어넘긴 적이 더 많았기에 책을 보며 더 아팠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떤것이 부당한 처사인지 소설 속의 담백한 현실속에 무섭게 드러나 있어서 나의 삶에 대해, 세상의 모든 김지영들의 삶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세상이 발전하는 만큼 예전보다는 분명히 여성들의 처우가 나아졌고,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여성들이 이 책을 보며 82년생 김지영 의 삶에 같이 분개하고 답답해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작지만 뾰족한 힘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자각' 이라는 것을 심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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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2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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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7-09-04 0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구의 나라들이나 일본과 달리 결혼 후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우리 문화가 가정 내에서 여성을 더 존중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아버지의 성을 버릴 수 없다는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반영된 것일 뿐인 거죠... 애초에 부계사회는 남성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일 뿐, 어떤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있겠습니까.
이 책 스테디셀러가 되어 감에도 별로 읽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다림이냥님 리뷰 덕에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림냥 2017-09-04 02:23   좋아요 1 | URL
오~ 제 리뷰덕에 읽어볼 맘이 생기셨다니 제가 영광이네요^^ 여성차별에 대해서 큰 문제부터 작은 문제까지 골고루 건드린 책이더라구요~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주는 책이라서 좋은거 같습니다^^

인간실 2017-09-04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가 술술 읽히네요. 잘 봤어요!

다림냥 2017-09-04 11:35   좋아요 1 | URL
읽어봐주셔서 감사드려용 :) 잘 읽힌다니 기분 좋네용^^

나는다람쥐 2017-10-12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타고 왔어요 잘 읽었습니다^^

다림냥 2017-10-12 10:26   좋아요 1 | URL
블로그에서 까지 와주셨군용ㅋ 잼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양이처럼 살아보기 - 우리들의 친구 냥이에게서 배우는 교훈
앨리슨 데이비스 지음, 매리온 린지 그림, 김미선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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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맘 내키듯이 제멋대로 살아도 사랑받는 동물이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반려묘 다림이는 책상 위에서 온몸을 쭉 뻗고 드르렁 드르렁 자고 있다. 이 녀석의 천하태평함이란 참...  세상만사 걱정없이 배고프면 밥 달라며 줄 때까지 울고, 반대로 집사가 좀 안고 귀여워 할라치면 귀찮다며 앙탈을 부리곤 도망가버린다. 고양이에 너무 익숙해 진 것일까. 길을 걷다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강아지를 안고 한참 거리를 걸어도 가만히 안겨 있는걸 보면 신기한 생각까지 든다. 강아지들은 주인이 안으면 안는대로 가만히 있는 구나! 문화충격과 부러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 밥주고, 화장실 치워주며, 냥이가 원하면 원없이 놀아주기도 하는데 막상 냥이는 자기가 원할때만 잠시 와서 "만져라옹" 하고 고작 몇 초정도 허락하고는 이내 자기가 편한 곳으로 가버린다. 이래서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은 '주인'인데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집사'겠지. 이런 요망한 냥이 같으니라구! 그치만 그래서 더 매력있는 것이 고양이 아닐까? 자기 맘대로라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온전히 삶을 즐길줄 알아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고양이를 동경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고양이처럼 살아보기>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명 고양이 덕후 저자 앨리슨 데이비스 가 고양이의 다양한 행동을 관찰하여 우리도 고양이처럼 살면 인생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며 권유하는 듯한 에세이집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만이 아는 다양한 고양이의 매력과 행동을 잘 잡아내어 인간 삶에 적용해 보자며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글보다는 귀여운 그림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고양이 덕후들이 으레 그렇듯 어떤 고양이를 봐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지만, 책 곳곳에 그려진 고양이 행동의 특징을 잘 살린 그림들이 흐뭇했다. 오려내서 스티커로 만들고 싶은 사랑스러움ㅋ 




우리는 스스로를 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만의 착각에 불과하다. 고양이가 갑이다. 고양이들은 애처롭게 야옹거리는 일이 얼마나 유용한지 터득했다. 그들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는 프로다. 녀석들이 큰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면 우리는 어느 새 통조림 오프너를 들고 달려와 참치 캔을 따게 된다. 이 똑똑한 생명체는 일찍부터 본인이 내키지 않는 지저분한 일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타고난 사냥꾼이면서도, 자기 값어치를 하는 고양이라면 굳이 개들처럼 멍멍하고 짖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고양이처럼 살아보기 p.42>


역시 그랬던거였어! 와서 귀엽게 순진한 눈을 하고선 청량한 목소리로 냐옹냐옹만 몇번 외치면 집사가 맛있는 밥과 간식을 줄 걸 아니까 한없이 귀엽게 진화한거야. 고양이는 호랑이랑 사자와 같은 과의 육식동물인데 왜 이렇게 보드랍고 귀여운거냐며, 어떻게 이렇게 진화할 수 있었을까 항상 궁금했다. 아마 이들은 귀여움에 껌벅죽는 인간들을 이용해먹기 위해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럽게 진화한 듯 하다. (역시 요망한 것들!ㅋㅋ)



우울하다고? 가르랑 거리는 고양이와 조금만 시간을 보내보라. 그러면 곧바로 힘이 솟아날 것이다. 연구 결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심장마비 발병률이 최대 40퍼센트나 줄어든다나! 
가르랑은 진정 고양이의 비밀무기나 다름없다. 아픈곳을 치유하고, 진정시키며, 곳곳에 사랑을 퍼뜨린다. 그것은 우리의 고양이 친구들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며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인간들은 종종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남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지만 고양이들은 그렇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열에 아홉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이며 그 행복은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 고양이처럼 살아보기 p.105>


고양이들은 신기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 집사의 기분을 찰떡같이 알고 우울해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안하던 애교도 부리고, 옆에 앉아 보드라운 털을 부비며 가르릉 가르릉 송을 들려준다. 눈물이 펑펑나는 슬프고 우울한 일이 있을 때 고양이가 내 옆에 와서 위로해 준다는 사실 만으로 너무 큰 위안이 되고, 실제로 기분이 빠르게 풀리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아무리 제멋대로인 고양이라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이 똑같은 충동을 느낀다. 
고양이는 그 충동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를 지녔다. 
- 짐 데이비스 -


<고양이처럼 살아보기>는 고양이에 대한 찬양 에세이 임과 동시에 고양이처럼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보자는 자기계발서 비슷한 부류의 책이다. 전체적으로 사랑스럽고 귀여운 고양이의 특징을 잘 나타낸 단락도 있긴 했지만, 그걸 사람에게 적용해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보자며 어설프게 적용시킨 이야기도 많아서 좀 아쉽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고양이의 행동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방법에 대한 얘기보다는 고양이 특유의 행동방식이나 성격등을 잘 나타낸 구절이 더 맘에 들어 메모 해두었다. 고양이처럼 살아보고 싶긴 하다. 귀엽게 "배고파 밥줘잉~"이라고 말만 하면 누군가 알아서 척척 맛있는 밥을 주고, "놀아줘잉~" 요렇게 애교만 부려도 누군가 날위해 달려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종일 원하는 만큼 잠도 늘어지게 자고, 싫은 사람에게는 싫다고 "하악하악"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근데 어쩌겠는가, 나는 미천한 인간인 것을..  

어쩔 수 없다.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는 걸로..
냐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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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9-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세 마리 키우고 있으니 심장병 120% 줄어드는 걸까요? ㅎㅎ 녀석들이 집안 가구 뜯고 모래벌판 해놓은 거 보면 심장병 더 생길 거 같지만요. ㅋㅋㅋㅋ

다림냥 2017-09-01 21:20   좋아요 0 | URL
ㅋㅋ 집이 털과 모래로 엉망일땐 확실히 심장병 생길 것 같긴 해요ㅋㅋ 이뇨석들 병주고 약주는것이 이러나 저러나 귀엽다는게 문제ㅋㅋ 요망한 냥이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