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승부터 발랄까지, 추석음악 7선
2006.09.29 / 김영 기자 

매년 돌아오는 긴 연휴. 한편 즐겁지만 한편으론 지루하다. 책과 만화, 영화와 TV 특별 프로그램을 선별해 ‘추석나기 올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반복 소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수많은 장르의 아이템 중에서 꽉꽉 막히는 도로 위에서든 집안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든 간편히 즐길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악. 며칠 전 발매된 따끈한 신보부터 몇 달 전 깜빡 놓치고 지나간 음반까지, 올해 발매된 숱한 음반을 뒤져봤다.

추석용 음반을 떠올릴 때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고민에 부딪힌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의 특성상 말랑말랑 다정한 선율을 고를 것인가, 무료한 나날을 충전시켜줄 상큼하고 신나는 리듬을 선택할 것인가. 팻 매스니와 브래드 멜다우의 듀오 앨범 <Matheney Mehldau>는 그런 고민과 상관없이 무조건 추천할 만한 음악이다. 재즈의 깊이를 껴안는 동시에 재즈의 자유로움을 누릴 줄 아는 각기 다른 스타일의 두 연주자가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주목할 이유는 충분하다. 굳이 음색을 가르자면 가을용 서정에 가까울 터. 그러나 연륜과 패기를 자랑하는 이 두 명의 재즈 뮤지션은, 센티멘털리즘으로 치장된 달콤한 재즈와는 거리가 멀다. 팻 매스니 특유의 촉촉한 기타와 브래드 멜다우 특유의 부드러운 연주가 어우러지는 장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즈에 뿌리를 두었으되 장르를 훌훌 벗어나 제 색깔을 찾아가는 또 한 명의 뮤지션이 있다. 상반기를 겨우 넘긴 지금이지만 성급함을 무릅쓰고 ‘올해의 목소리’로 손꼽을 만한 코린 베일리 래의 동명 앨범 <Corinne Bailey Rae>. 데뷔 앨범 한 장이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소울풀한 노라 존스’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노라 존스와의 비교마저 찬사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역량 있는 보컬이다. 재즈와 포크, R&B와 소울, 팝의 감성을 황금비율로 섞은 음악은 기교를 줄이고 서툰 모방을 없앤 그녀만의 목소리에 썩 잘 어울린다. 대중성과 완성도를 고루 갖춘, 다들 말은 쉽게 하지만 쉽게 이르지는 못하는 경지에 이 소녀는 이미 올라 있다. 더구나 가을, 재즈 보컬이 절로 그리워지는 철이다.

그러나 가을 서정이 아무리 짙어져도, 올해 한국의 음악팬들은 여름의 흥분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8월 열렸던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처음 만나는 3일간의 잔치를 통해 지우기 힘든 도취를 선사해줬다. 헤드라이너로 나섰던 스트록스와 프란츠 퍼디난드, 블랙 아이드 피스의 공연도 훌륭했지만 뜻밖의 발견은 세컨트 스테이지에 섰던 제임스 므라즈. 페스티벌 덕분에 4년 전 나왔던 제임스 므라즈의 데뷔 앨범 <Waiting for My Rocket to Come>까지 올해 라이선스 발매됐다. 미국식 록을 토대로 삼긴 했으나 이 청년의 머릿속에는 음악의 장르 구분이라는 게 본디 없어 보인다. 포크와 재즈, 팝과 힙합, 일렉트로니카에 보사노바까지 왕성히 끌어들이는 혼성 모험가. 그런데도 가사는 어찌나 애틋하게 가슴을 저며 오는지, 그의 방향을 가늠할 길이 없다. 므라즈의 이름이 각인됐다면, 작년에 순서를 바꿔 국내 발매됐던 2집 <Mr. A-Z>까지 챙겨 보는 것도 좋겠다.

펜타포트의 추억이라면 플라시보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여름밤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그들의 공연이 훌륭했는지 아닌지, 그런 건 사실 중요치 않다. 무려 10년을 기다렸다. 플라시보는 동명 데뷔 앨범 <Placebo>(1996)로 단숨에 영국음악계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10년 동안 천천히 세계를 중독 시키며 퇴폐와 상실의 늪으로 청자들을 이끌었다. 그런 카리스마를 확인하는 자리는 거기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기억을 지우기 않기 위해, 또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올해 봄 발매된 플라시보의 <Meds>를 더욱 곱씹는다. 10년 동안 잘 숙성된 플라시보표 음악이 가득하다. 추석 직전에는 10주년 기념 앨범 또한 발매를 계획하고 있다 전한다.

하지만 10년쯤의 음악 인생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다. 반세기를 음악과 함께 살아온 드문 뮤지션들에게 음악은 곧 삶이다. 노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월드뮤직의 대모와 대부인 세자리아 에보라와 베보 발데스만큼 음악의 변방에서 제 힘으로 선, 힘 있는 뮤지션은 드물다. 두 거장은 모두 올해 모두 새 앨범을 발표했다. 매번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그들의 신보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젊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카보 베르데 출신으로, 한 많은 나라와 한 많은 생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녹여내는 노년의 뮤지션 세자리아 에보라의 <Rogamar>는 애수와 희망이 교차하는 바닷가의 노래를 들려준다. 들을 때마다 눈이 젖고 다시 들을 때에는 마음이 출렁인다. 쿠바음악의 생생한 전설 베보 발데스는 이제 나이가 아흔에 가깝다. 평생을 피아니스트로 살아왔지만 피아노 솔로 앨범은 그조차도 이번이 처음. 베보 발데스의 <Bebo>는 쿠바 재즈의 고전들을 가져오면서 쿠바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다. 17개의 트랙이 하나같이 빛나고 모두가 정교한 보석과 같다. 월드뮤직이 낯선 이라도, 이들을 놓치는 건 아까운 일이다.

컴필레이션 앨범 <아가미>는 올해 발매된 앨범 중, 가장 훌륭하지는 않을지라도 가장 새롭고 주목할 만한 시도다. 젊은 뮤지션 정재일이 프로듀서를 맡은 이 앨범은, 2000년대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튀어 나온 민중가요 모음집이다. 70, 80년대의 한 많은 시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피 끓는 노래들이 지금, 한대수, 이적, 윈디시티, 스윗소로우, 전제덕 등 다양한 뮤지션들의 입을 통해 불려진다. 참여한 이에 따라 곡에 따라 편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돌출 행동이 많아질수록 우리 음악계도 풍성해질 수 있다. 추석과 민중가요의 조합이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징검다리 휴일이 끼어 어느 때보다 기나긴 연휴라면 고정관념을 깨볼 여유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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