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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대세다. 방학 혹은 짧은 휴가에도 해외여행은 당연한 수순이 됐고, ‘올빼미’에서부터 ‘금까기’까지 하룻밤 잠자리를 아낀 절약형 1박 3일 여행상품도 즐비하다. 아예 하던 일을 접고 3개월, 6개월, 길게는 1년 여행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여행족이 늘고 여행 패턴이 다양해지면서 여행지침서도 덩달아 변화했다. 관광명소, 교통, 날씨 등을 수록한 빽빽한 <론리 플래닛>류의 정보서 대신, 사소한 여행의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 톤의 여행서들이 서점의 여행서적 코너에 빽빽하다.
바야흐로 여행서 춘추전국시대다. 디카와 인터넷으로 누구든 독특한 시선과, 독특한 경험이 있다면 제법 폼 나는 여행서를 출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풍족한 여행서 범람의 시대가 그다지 마뜩치만은 않다. 런던에서 템스 강변을 거닐고 대영박물관을 들르거나,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차 한 잔 하는 여유, 동경 가서 신주쿠와 하라주쿠를 발 빠르게 돌아다니는 것쯤이야, 너도 나도, 우리 모두 해본 별스럽지 않은 경험이다. 아무리 멋진 사진과 독특한 경험으로 포장해내도 그렇고 그런 시큰둥한 ‘남의 일’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따분한 여행서적’의 기운을 발 빠르게 캐치하고 재빨리 손을 쓴 여행서들이 늘고 있다. 기존의 통념을 확 깨는 이 여행서적들은 정보서와 에세이의 절묘한 결합이 빚어낸 ‘주관적 실용서’쯤으로 불릴 수 있다. 굉장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여행의 경험담을 늘어놓되, 그것이 단순히 감상에 의한 것이 아닌 철저한 경험과 전문성에서 우러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를 가면 반드시 박물관을 가야한다는 고정관념, 관광명소라고 불리는 곳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집착은 이 책에 없다. 특이한 아이템들이 즐비한 쇼핑센터, 분위기 좋은 카페, 맛있는 음식점, 조그마한 예술영화관 같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도심의 공간들이 이 책에서는 한없이 소중한 여행지이자 발굴의 장소다. 보통 여행서적이라면 반 페이지에 빽빽하게 뭉쳐지거나, 박스 처리되고 말 아이템들만을 따로 펼쳐놓았다고 할까.
런던 뉴욕 홍콩 도쿄 상하이의 쇼핑가를 돌며 발품 팔아 만든 <쇼핑 앤 더 시티>(배정현 | 랜덤하우스중앙)는 쇼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10년차 패션지 기자 배정현의 쇼핑여행 비법서다. 관광명소도 갤러리도 박물관도 없다. 도시에 즐비한 소품숍, 옷가게, 문구점, 대형마트가 235페이지의 책속에 그득하다. 여행가서 쇼핑하는 것을 비문화적이고 골빈 행태라 여겼던 사람들이라면 실로 눈살 찌푸릴 가이드다. 그러나 취미와 특기를 쇼핑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저자는 쇼핑이 단순히 소비에 국한된 낭비가 아닌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의 하나임을 상큼하게 설득한다. 지금 런던에서 가장 뜨고 있는 앤티크 숍에서부터, 인터넷 쇼핑몰 운영자들이 바잉하러 간다는 홍콩의 쇼핑거리, 구경만으로도 신나는 벼룩시장 등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친 보석 같은 상점들이 저자의 경험과 안목에 의해 조목조목 해부된다.
신주쿠, 하라주쿠, 긴자의 거리를 백날 간 사람도 모르고 지나친 주옥같은 공간들을 모아 엮은 책도 있다. <도쿄 로망 산뽀>(유종국 | 디자인하우스)는 12년간 도쿄에서 살았던 저자의 도쿄 ‘산뽀기’다. 책의 맨 처음 유서 깊은 도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시노바즈 스트리트를 보는 순간 이 책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안내서인지 알게 된다. 저자가 산책하는 공간은 도심과 멀리 떨어져 부러 찾아내야 할 새로운 곳이 아니다. 그냥 시부야의 번화가에서도 차를 마시며 조용히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이온’ 같은 고풍스런 카페를 발견해내는 식이다. 한국보다 비싸다고 겁먹지 말고 작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부야의 유로 스페이스에서 영화 한 편 보고, 공원 중앙에 있는 분수대에서 잠깐 쉬면서 잡지 <스튜디오 보이스>를 읽는 여유를 가져보라. 뭐, 잠깐 체력이 남으면 히몬야의 코오엔 탁구장을 찾아도 좋다.
'''''''''''''''바르셀로나에서 방 잡고 아예 제대로 체류한 기록을 엮어낸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오영욱 I 예담)도 눈에 띈다. 방을 구하고, 가재도구를 사 들여오고, 스페인어를 배우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저자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정취가 베어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했다. 바르셀로나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낭만을 즐긴 저자 오영욱에게 바르셀로나 거리 구석구석은 눈감고도 찾을 수 있는 익숙한 공간이다. 한 손에 지도를 들고 있으면서도 어디를 갈 지 몰라 헤메는 여행자들 속에서 저자는 폼나는 카페가 아니라도 충분히 즐거 울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배웠다. 바르셀로나에서 가볼 만한 정원과 카페를 돌아 세르트 길, 산 페라 메스 바이쉬 길, 엘리사벳 가, 말꾸이낫 길...저자가 추천한 바르셀로나에서 걸어 볼 만한 골목길을 돌아봐도 좋겠다.'''''''''''''''''''''''''
매일 지나다니는 서울의 공간 역시 달리 보면 무궁무진하다. <골목이 있는 서울, 문화가 있는 서울>(이동미 | 경향신문사)은 서울의 매력을 100배쯤 보강해주는 서울 발견기다. 홍대, 명동, 남산골 한옥마을, 성북동, 북촌. 가까이 있어서 들여다보기 소홀했던 공간들에 여행전문기자로 활약한 저자의 정겨운 해설이 덧붙여진다. 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서울의 공간들이 이 책을 보고 나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고풍스러운 가회동 골목길에 있는 가회박물관의 문을 삐걱 열어보거나, 하늘공원 억새길을 따라 올라올라 가보자. 흰색벽의 모스크 이슬람교중앙회성원이 있는 이태원에 가거나, 가리봉 1동, 옌벤 거리에 가서 양고기를 먹고 있으면 이곳이 서울인지 아닌지 착각에 빠지게 된다.''''''''여권도 비자도 비행기 패스도 필요 없다. 지하철 패스 달랑 하나 끊어 당장 거닐 수 있다.
신기하게도 이들 책은 한결같이 도시를 그리고 있다. 도시 여행은 눈앞에 펼쳐진 멋진 풍광을 그저 주어 담는 것만으로도 오감이 만족되는 그리스 섬 여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 공간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디테일들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는 자에겐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새로워진 여행서들은 바로 이 자세에 관한 작은 지침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