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난 편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마일스는 모던 재즈사에 길이 남을 스타일의 대가라 할만합니다. 쿨을 시작으로 하드밥, 모달, 그리고 재즈 퓨전에 이르는 재즈 역사의 방대한 지형도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창조해 낸 업적이었습니다.

마일스는 동시대 다른 트럼펫 주자들과 비교할 때 뛰어난 연주력과 작곡실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의 업적은 일반적인 연주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10년을 주기로 재즈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은 바로 마일스 데이비스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대가가 이룬 업적은 모두 그의 힘으로 된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분명 마일스는 이런 스타일에 대한 주요 컨셉을 생각해 낸 장본인이었지만 완성된 스타일이 제시되기까진 수많은 걸출한 재즈 뮤지션들이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일스는 어떤 연주의 영감을 떠오르면 이런 그의 컨셉을 제대로 구현해 줄 연주자를 찾아 나섰던 겁니다.

마일스는 퀸텟, 마일스 데이비스 노넷,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 퓨전 밴드는 마일스가 내세운 연주 스타일을 구현해내는 주체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이런라고까지 불리는 재즈계의 스타 군단을 거느리게 됩니다. 오늘은 스타일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일궈낸 또 하나의 업적,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에 대해 알아봅니다.

1. '버스 오브 쿨'의 또 다른 주역 길 에반스(Gil Evans)

주지하시다시피 마일스의 '버스 오브 쿨'(1949)는 재즈의 뉴웨이브 '비밥'의 대한 마일스의 대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쿨'은 백인적인 감수성으로 흑인 즉흥 연주 비밥을 해석하는 마일스의 의지이자 연주 스타일이었던 셈입니다. 클래식적 사고와 악보에 근거한 연주의 형식미에 일가견있던 마일스는 비밥에서 한발짝 나간 '쿨'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를 원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악보에 근거한 작곡과 편곡은 필수적인 사항이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하기 위해선 클래식 대위법에 능통한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편곡자 길 에반스는 마일스의 이런 의도를 실현화 시킬 수 있게 해준 절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마일스의 처녀작 '버스 오브 쿨'의 실현 주체는 그가 조직한 9인조 노넷이었고 그들이 연주한 곡들은 모두 길 에반스의 손과 감성에 의해 '세련된 편곡'이란 방법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길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찰리 파커 퀸텟에 재적하던 시절 작곡한 '도나 리'(1947)의 악보를 얻기 위해 마일스를 찾아갑니다. 이것이 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는데 마일스는 그 댓가로 역시 길이 작곡한 악보 하나를 요구합니다. 이를 계기로 둘의 음악적 교분은 자연스레 이어졌고 마일스는 길이 자신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거란 기대를 갖게 됩니다. 얼마후 길은 마일스에게 바리톤 색소폰주자 제리 멀리건을 소개해줬고 셋은 길의 자취방에 모여 '버스 오브 쿨'에 대한 구상을 해 나갑니다.

'쿨'이란 연주 컨셉은 마일스가 생각해 낸거지만 그것을 연주를 통해 실현할 수 있게 뼈대와 살, 그리고 옷을 맞춘 것은 길 에반스의 몫이었습니다. 마일스는 길을 평하길 '자신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백인'이었다며 그의 인품과 재능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길 에반스는 쿨의 탄생에 있어서 마일스에게 바늘과 실처럼 땔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둘의 만남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 레코드에 진출하면서 다시 이어집니다. 마일스와 길은 9인조 노넷의 경험을 다시살려 19인조 재즈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이젠 쿨을 넘어서 좀더 다양한 스타일의 재즈를 오케스트라로 재현하는 실험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나온 '마일스 어헤드'(1957) ,'포기 앤 베스'(1958),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1960)은 재즈와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접목이라는 미증유의 명작으로 기억됩니다. 바야흐로 재즈를 클래식에 버금가는 연주 예술로 승격시켰다는 평과 함께 말입니다.

2.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이 발굴한 숨은 거장-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

1955년,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난 마일스는 자신이 들고 나온 '하드밥'에 걸 맞는 밴드를 조직하기위해 나섰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이렇게 조직되게 됩니다. 마일스의 크럼펫과 필리 조 존슨의 드럼, 폴 체임버스의 베이스, 레드 갈런드의 피아노로 라인업을 확정지은 상태에서 자신의 연주에 응수해 줄 테너 색소폰 연주자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마일스는 1954년작 '백스 그루브'에서 함께했던 소니 롤린스를 노렸습니다. 끈질긴 회유와 설득을 통해 마일스는 자신의 팀에 소니를 가입시키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미 소니 롤린스는 당대 최고의 트럼펫 주자였던 클리포드 브라운 밴드에 합류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마일스와는 연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소니는 이미 마일스 데이비스를 겪어 본 인물이었고 이미 물망에 오른 자신이 마일스 밑에 들어가 일한다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았던 것도 마일스 데이비스의 요구를 거절한 한 요인이었습니다.

수소문끝에 마일스는 자신의 연주 초년병시절 뇌리를 스쳐지나간 한 테너 연주인을 기억했으니 바로 무명의 존 콜트레인이었습니다. 당시 존 콜트레인은 헤로인의 빠져있어 이렇다할 활동 없이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일스의 말을 빌리자면, '확 날려주는' 테너 연주를 원하던 그에게 등장한 존 콜트레인은 자신의 퀸텟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1955년부터 57년까지 존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 몸담으며 모던 재즈의 걸작 '라운드 미드나이트'를 녹음하고 뉴욕에 카페 보헤미언을 근거지로 활동합니다. 마일스의 침착하고도 우울한 톤은 존 콜트레인의 활화산같이 뿜어내는 테너 연주에 대비되며 연주의 정중동을 순간을 만끽게 했습니다.

그러나 존은 여전히 헤로인 중독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마일스와의 불화로 얼마후 팀을 떠납니다. 그 사이 퀸텟은 캐논볼 에덜리라는 알토 주자를 받아들이며 섹스텟으로 확장되고 연주도 코드 중심이 아닌 스케일 중심의 즉흥연주를 기반으로 하는 '모달 주법'으로 진화해가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카인드 오브 블루'라는 모던 재즈 역사의 큰 방점을 찍기 위해 마일스는 창조의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변화되는 코드에 연주를 맡기는 게 아닌 그때그때 떠오르는 영감으로 스케일(음계)에 즉흥연주를 맡기는 모달 주법은 말처럼 쉬운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주인은 정해진 코드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음계를 가져와 듣기 좋은 선율을 그려가야 하는 겁니다. 기껏해야 블루스 스케일에서 맴돌던 하드 밥 연주의 제한성에서 벗어나 마일스는 이런 자신의 의도를 받쳐줄 풍성한 선율 연주에 능한 피아노 주자의 도움이 필요했고 역시 수소문끝에 클래식에 정통해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를 찾아내게 됩니다. 당시 리버사이드 레이블을 통해 활동하던 빌 에반스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 바르톡에 정통한 보기 드문 재즈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클래식으로 탄탄한 음악 이론을 겸비한 빌 에반스는 마일스가 원하는 모달 주법에 가장 적격이라 여겨진 연주인이었습니다.

1959년 3월 '카인드 오브 블루' 녹음을 위해 마일스는 한동안 소원했던 존 콜트레인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일스의 숨은 카드 빌 에반스를 녹음을 위해 참여시켜습니다. 단 한번의 재녹음 없이 진행된 '카인드 오브 블루' 세션은 앨범 전면에 투명하고도 거침없이 선율의 극치를 창조하는 빌 에반스의 공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특히 Flamenco Skethches 같은 곡)

빌 에반스는 마일스에게 '필요이상 연주하지 말라'는 주문을 했고 자신의 피아노 솔로에서도 리듬 파트를 제외한 다른 악기 연주를 동원하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겨뒀습니다. 물 흘허가듯 자연스런 즉흥 연주로 가득한 '카인드 오브 블루'의 모달 주법은 마일스는 물론이고 조연으로 참여한 빌 에반스 자신에게도 값진 연주 경력으로 남게 됩니다.


3.젊은 피들을 수혈받은 마일스-마일스 데이비스 2기 퀸텟

프리재즈,아방가르드가 어느덧 재즈의 중심에 자리한 60년대 중반, 마일스는 다시 변화의 몸부림에 들어갔습니다. 기존의 퀸텟 형식을 유지하면서 좀더 새로운 시도가 느껴지는 퀸텟을 구상하던 중 마일스는 개별 연주인의 즉흥성에 한층 무게를 실은 퀸텟을 구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연주력이 뒷받침되는 실력있는 신예 뮤지션들이 필요했습니다.

여러 수소문과 오디션을 통해 마일스는 2기 퀸텟을 꾸렸습니다. 바로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에서 활동한 테너 색소폰주자 웨인 쇼터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베이스의 론 카터, 그리고 17살이란 어린 나이에 들어온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입니다. 1965년부터 68년까지 6장의 앨범을 발표한 마일스 데이비스 2기 퀸텟은 리더의 솔로에 바탕을 둔 제한적인 즉흥성에서 벗어나 좀더 자발적인 즉흥성으로 연주를 이끌어 가는 총체적 즉흥성을 연주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여기에 기존 스탠더드보다는 멤버들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창작곡 중심의 연주를 통해 좀더 펄펄 살아있고 생동감있는 연주를 펼칩니다.

마일스는 멤버들을 마치 자신의 자식마냥 멤버들을 다루고 훈련시켰습니다. 멤버들 모두 재즈 초년병들이었지만 마일스와의 연주 경험은 멤버들 모두 탁월한 솔리스트로서 향후 재즈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각각의 멤버들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이름만 들어도 현 재즈계의 주역들임엔 틀림없습니다.


4.마일스 사단의 완성-비치스 블루와 그 주역들

60년대 말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바탕으로 재즈가 자리를 옮겨가며 차츰 활기를 잃어간 재즈와 달리 록은 젊은이들의 감성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비틀즈를 위시해 지미 헨드릭스와 크림이 들고 나온 강성 록은 반전평화운동 흐름과 맞물리며 그 열기는 더해갔습니다. 마일스는 이런 상황을 주시하면서 재즈 역시 록의 기운을 이식받아 환골탈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즈를 중심으로 록의 기운을 수혈받자는 것이 마일스의 의도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재즈도 젊은이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마일스는 생각했습니다.

1968년 마일스는 지미 헨드릭스를 만났습니다. 일렉트릭 기타의 귀재와 한 스타일의 대가의 만남은 이후 지속되진 않았지만 이를 통해 마일스는 재즈에 전기증폭과 비트감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일스는 이를 위해 새로운 개념의 밴드를 조직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의 2기 퀸텟을 과감히 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어쿠스팃 피아노 대신 일렉트릭 키보드 주자 조 자위눌과 칙 코리아를, 드러머엔 잭 드자넷과 레니 화이트를, 어쿠스틱/일렉트릭 베이스엔 데이브 홀란드를, 록의 상징과도 같은 기타리스트엔 존 맥클러플린을 영입시켰습니다.

록의 미디움을 다각도로 표현한 1969년작 '인어 사일런트 웨이'는 새로 영입된 건반주자 조 자위눌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이었습니다. 펑키한 리듬연주와 풍부한 색채감의 선율연주에 능통하고 'Mercy Mercy Mercy'라는 히트 연주곡을 만든 조 자비눌은 마일스가 들고나온 재즈 퓨전 물결에 빼놓을 수 없는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마일스는 드럼의 비트감과 펑키한 리듬이 더 중요할 거란 생각으로 후속작이자 재즈계의 최고 문제작 '비치스 블루'를 이듬해 발표합니다. 이 앨범에서도 조 자위눌은 'Pharao's dance'를 작곡했습니다.

마일스의 재즈 록 퓨전은 1970년을 기점으로 일반 록 페스티벌 무대에도 진출합니다. 비치스 블루에 동원된 걸출한 신예 연주인들을 포함해 이국적 리듬을 선사한 퍼커션주자 에알토 모레이라도 추가됐습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도 1970년 한해 마일스 밴드를 거쳐갑니다. 앨범 '비치스 블루'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마일스의 자식들은 존 맥클러플린의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 조 자위눌과 웨인 쇼더의 웨더 리포트라는 인기 재즈 록 퓨전 밴드로 이어지며 70년대 재즈계를 마일스 사단의 시대로 장식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내려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수많은 재즈 대가들이 마일스 데이비스를 통해 데뷔했고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존 콜트레인을 위시해,빌 에반스, 허비 행콕, 거기에 키스 자렛까지 마일스 데이비스를 거쳐갔으니 재즈의 역사의 50%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통해 창조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겁니다. 1940년대 미약하나마 자신의 연주 개념을 실현하려고 했던 마일스는 70년대 이르러 바야흐로 한 재즈 사단의 수장으로 군립하게 됩니다. 이수만 사단의 가요계, 퀸시 존스 사단의 팝계라면 재즈쪽에선 마일스 데이비스입니다. 그런데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은 앞에 언급된 사단과 크게 다른점이 하나있습니다.

스타일의 대가 마일스의 업적은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런 마일스의 생각에 동조하고 청춘을 바쳤던 수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마일스와 함께 했던 뮤지션들은 이후 100%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정받는 뮤지션으로 말입니다. 모든 음악계에서 한 사단의 수장이 수많은 뮤지션들을 키웠지만 이후 그 사단을 통해 데뷔한 뮤지션이 지속적으로 창작력을 발휘하면서 사단의 수장의 업적을 빛나게 하는 사례는 마일스외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일스 데이비스 사단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그건 마일스가 현 시대를 읽어내는 지혜와 주변 아티스트의 진면목을 집어내는 뛰어난 프로듀싱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두가지는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음악으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겁니다. 쿨에서부터 퓨전까지 마일스는 시대가 원하는 소리와 리듬이 무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나온 컨셉을 실현할 신예 뮤지션들의 감각을 찾아 나선겁니다.

지금까지 글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왜 마일스 데이비스가 연주인이자 스타일리스트를 뛰어 넘는 시대의 본보기가 된 사단의 수장으로 기억될 수 있는 지? 이 글이 그 질문에 대한 조그마한 답변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음편에 계속...



  2006/01 정우식 (jasbsoy@hanmail.ne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