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 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8세기 전세계 4대도시 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 이었습니다.
 
'우리 고구려 바로알기, 해나라 ( http://haenara.net )' 에 올린 신라 인구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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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솜씨가 없어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

아래는 신라 [왕경도(왕이 사는 도시 그림)]입니다.
 
 
 
 
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 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 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도로는 규격별 로 나뉘어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 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개경의 거리입니다.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개경에는 알라딘 궁전같은 이슬람 사원과 아라비아 타운도 존재했습니다.
 
 
 
바둑두는 고려 귀족들 입니다.
(도자기 의자)
 
 
 
 
[5세기 고구려 안학궁성]
 
한변 길이 622 미터
 
둘레 2.5 키로미터의 거대한 궁궐.
 
대동강에서 발견된 길이 375m 폭 9m의 초대형 다리를 지나면
 
판석(판모양 돌)으로 포장된 도로가 안학궁 남문까지 쭈욱 이어져있었습니다.
 
(나중에 훨씬 더 큰 궁궐을 지어 옮긴다.) 
 
 
 
백제 미륵사.
 
 
 
신라 황룡사.
저 목탑은 높이가 86m쯤으로 추정되며
현대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달합니다.
(세계 최고의 목탑.
백제 미륵사를 지은 장인들을 초청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에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가 수십장이 작성 되었습니다.
 
신라와의 무역내역을 적은 문서인데,
 
오사카대학의 도노 하루유키 교수의 문서 분석 결과
 
신라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5위 이상의 고위 귀족들 이라고 합니다.
 
또 이 [매신라물해]에 나타나는 물품에는
 
신라 물품 말고도 동남아산 향료와 약초, 중국산 비단, 페르시아산 물품까지 적혀있습니다.

즉, 세계 각지의 물품들을 신라를 통해 들여왔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본 귀족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의 상징 이 된것입니다.
 


 





 
 
 
당시 아랍쪽의 신라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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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966년(신라가 망한 직후)-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위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는 개목걸이에도 금을 쓸 정도로 금이 풍부한 나라였고 화려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째,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째, 바다(태평양)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으로서 아주 정확하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무슬림들에게
 
산 좋고 물 좋고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이상향적인 곳이었다.
중세 아랍 문헌에는 신라의 역사에 관한 기술도 있다.
 
그 중 신라와 중국(당) 간에 선물이 교환되지 않으면 천벌로 가뭄이 든다는 ‘하늘의 뜻’을 빌려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점과,
 
특히 양국 간에 상호성에 기초한 선물 교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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