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긴 축조물이자 가장 큰 무덤
‘발해만~타클라마칸 사막’7200㎞ 대장성… 담 위에 도로 구축해 전투·보급력 높여
1969년 어느 날 영국 소년 윌리엄 린드세이(11)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마치 누군가가 땅바닥에 그린 것 같은 오렌지색 띠가 보였다. 잠시 후에 그 가늘고 긴 띠가 ‘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우주선이 보내온 지구표면 사진 속에 나타난 만리장성의 모습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린드세이는 즉시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만리장성의 위치를 찾았다. “음, 이거란 말이지….” 만리장성을 처음 본 그날 린드세이는 자신이 갈 길을 결정했다. “언젠가는 저 놀라운 고대 성벽을 두 발로 밟아 보고야 말겠어!”라고 결심했던 그는 대학에서 지리학과 지질학을 전공하여 1987년에 드디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 그것도 제 발로 그저 밟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만리장성 2470㎞를 걸으며 그 실체를 속속들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그와 같은 도전을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린드세이는 자신의 만리장성 답사기 ‘혼자서 만리장성을 거닐다’라는 책에서 “그때의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800일 이상을 만리장성에서 보낸 그는 ‘만리장성 국제우호협회’를 창설한 데 이어 보존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만리장성(이하 장성)은 보하이만(渤海灣)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중국 대륙 북쪽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봉우리를 따라 실크로드의 동쪽 끝 타클라마칸 사막에 위치한 자위관까지 이른다. 총 길이는 6700㎞로 알려져 있으나 2001년에 500㎞가 추가로 발견되어 7200㎞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만리장성은 인공위성에서 보면 하나의 선으로 나타난다. 선은 강조와 경계를 뜻한다. 피아(彼我)를 가르는 경계선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흉노나 몽골,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과 국경을 맞대었던 역대 한족 왕조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말 그대로 장성(長城)을 축조하고 손질해왔다. 따라서 장성은 한족이 최고의 정성을 바쳐 축조한 중국, 아니 세계 역사상 최고·최대의 토목구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장성을 보면 인간의 측량할 수 없는 에너지에 놀란다. 마오쩌둥도 “장성을 보지 않은 자는 사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현재 전세계 네티즌의 투표로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선정 작업이 진행 중(4월 30일 마감)인데, 장성은 현재 수위(총득표율 10.93%)에 올라있다. 2위도 중국의 포탈라 궁전인데, 득표율은 8.40%다. 이는 중국 네티즌의 적극적인 참여(전체 투표자의 40.64%)의 결과겠지만 장성이 장대하지 않다면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 교류 추구했던 로마와 달라
아피아 가도와 만리장성! 이 둘은 다같이 동서양의 고대문명이 남긴 축조물이다. 그런데도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로마와 중국은 당시 모두 이민족을 상대했으나 로마는 가도를 건설해 그들과 교류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중국은 그들 사이에 방벽을 세워 차단을 지향했다. 보잘 것 없는 가운데 출발한 로마는 살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비옥하고 너른 황허(黃河) 들판을 가졌던 중국은 ‘현재’를 지키는 게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 로마는 후일 제국이 되어 시민에게는 자유를, 속지인에겐 자율을 주었으나 중국은 통일을 이룬 직후 분권형 국가에서 고도의 중앙집권제 국가로 나아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춘추전국시대부터 존재했던 성벽 가운데 헐 것은 헐고 증축할 것은 증축해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한 진시황은 무엇보다도 먼저 군현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는 ‘일시동인(一視同人)’을 치국의 주요 방침으로 삼았다. 수비형 국가 중국은 중화사상을 개발하여 중심지향적으로 나아갔다면, 노마드(유목)형의 로마는 대외지향적인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구축했다. 소유의 차이가 행동의 차이를 낳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허물어진 장성을 대폭 수리하고 그것도 모자라 2700㎞를 다시 쌓아 지금과 같은 모습을 남긴 명(明) 왕조 또한 북방민족과 적대관계를 유지했기에 왕도 베이징을 지키기 위해 산하이관과 쥐용관(居傭關) 사이의 성벽을 가장 견고하게 또 높게 건설했다. 명 왕조는 장성의 제2의 건설자였다. 거기다 그들은 자금성과 역대 황제의 능묘인 명십삼릉을 축조하였으니 토목공사에 들인 인력과 공력은 엄청났다. 수비형 국가의 대표자격인 명의 경제력을 가볍게 볼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조세의 기준을 인두(人頭)에 두었다. 농토와 물산이 아니었다. 그게 경제력의 쇠퇴를 막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명은 어느 날 장성을 넘어온 청(淸)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능선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바위 위에 축조된 장성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렇다면 그 일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의 고통은 과연 어떠했을까. 흙을 다져 한 켜씩 쌓아올려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다듬어 성벽과 돈대, 봉화대, 계단과 같은 구조물을 올리는 작업을 수천 리에 걸쳐 했으니 말이다. 길이도 무려 6000㎞나 이른다. 어떤 곳에선 두 겹, 세 겹으로 쌓기도 했다.

이 장대한 구조물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얘기도 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장성의 공사판으로 끌려간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그의 시신을 보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맹강녀의 슬픈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두룩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부를 돌로 쌓지 않고 상당 부분을 판축기법(떡시루처럼 흙을 차곡차곡 다져 쌓는 방법)을 동원하여 수고를 다소 덜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 바다링 근처가 장관 감상에 좋아
장성의 장관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베이징 북쪽 80㎞에 거리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이다. 책이나 그림엽서에서 흔히 보는 사진은 대부분 이 바다링 일대에서 찍은 것이다. 바다링에는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어 해발 853m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장성이 가진 멋과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힘이 들더라도 린드세이처럼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좋다.

장성은 두 개의 벽으로 구성된다. 그 사이로 말 두 필이 동시에 달릴 수 있는 이동통로가 나 있다. 남벽보다 높은 북벽은 여장(女牆: 낮은 담)으로 꾸몄고 그 속에 총안(銃眼)까지 두어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시설물임을 일깨워준다. 거기에 서면 모래바람이 이는 몽골고원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120m 간격마다 돈대(敦臺: 높게 축조한 포대)를 세웠다. 보통 2층 구조로 된 돈대는 위층을 적의 동향을 살피는 데 사용했고 아래층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과 말에게 먹일 사료, 장비와 화약 등을 보관하는 창고 겸 병사의 숙소로 썼다. 또 적의 침입과 전쟁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봉화대도 설치했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군사 정보를 알리는 통신방법이다. 불을 피울 때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태웠다. 사람의 출입이 많은 곳에는 ‘관(關)’을 두어, 출입하는 자의 신분과 휴대품을 철저히 확인했다. 그 중 제일 동쪽에 있는 산하이관은 조선 사신이 제일 많이 사용했던 곳이다.

이제 만리장성은 더 이상 군사시설이 아니다. 매년 1000만명이 찾는 중국 제일의 관광자원이다. 중국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만리장성 기념비’가 서 있는 해발 888m까지 오른다. 글씨는 마오쩌둥의 것이라 특이한데, 이 기념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다. 만리장성 기념비를 굳이 해발 888m에 세운 것은 돈을 번다는 뜻을 가진 ‘발(發)’자와 숫자 ‘8’의 발음이 같아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숫자 8이 들어가는 전화번호나 차량번호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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