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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철완 아톰
커다랗고 둥근 눈에 뾰족 머리, 굳세게 쥔 주먹에 불길이 솟아오르는 발. 만화의 '만'도 쳐다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의 '애'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얼굴과 이름을 모를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로봇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 아들 누구보다 젊은 소년, 아톰.
1951년 <아톰 대사>가 월간지 '소년'에 처음 등장해, 수많은 시리즈의 출판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캐릭터 인형으로 그 역사를 이어온 아톰은 일본을 넘어 한국에까지 밀어닥친 '인격화된 로봇 신화'의 명실상부한 원조다. 만일 아톰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로봇 20선'은 '한국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로봇 20선'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구에서 시작된 로봇의 신화는 거의 언제나 '자신을 부려먹는 인간들에 대항해 싸우는 기계 괴물의 복수극'이었기 때문이다. 아톰의 창조자 데즈카 오사무 역시 한때 자신의 로봇 아이들을 그러한 비극의 희생자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 기술에 대한 믿음과 행복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었던 데즈카는 황폐한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똘똘하고도 사랑스러운 소년 로봇 아톰을 빚어냈다.
<철완 아톰>은 일본 내에 만화와 애니메이션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고,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SF를 주류 중의 주류 장르로 만들어낸 당사자다. 하지만 그는 그 아들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에게는 마징가 Z나 그랜다이저와 같은 거대한 몸집도 세계를 부수어버릴 만한 강력한 무기도 없다. 제법 다부진 몸집에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파괴의 로봇이라기보다는 건설과 우애의 로봇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톰은 로봇 신화의 리스트 중에는 참으로 특이하게 휴머노이드 계열의 작은 로봇이다. 다른 거대 로봇들도 어느 정도 인격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 조종사를 필요로 하는 등 기계적 속성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아톰은 몸이 기계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완벽한 인간의 감정을 소유하고 있는 로봇이다. 나아가 인간의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등 이상적인 인간의 가치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거대 로봇들이 매력적인 격투기 선수, 믿음직한 아버지의 의미가 강하다면 아톰은 함께 손잡고 학교에 가고 싶은 소년 친구로 느껴진다.
아톰의 휴머노이드 후예로는 <사이보그 009>의 사이보그들, <잭과 엘레나> 시리즈의 두 주인공, <오즈>의 '1019'와 '1024',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인간의 영혼과 기계의 몸이라는 이중적 상황에 대해 상당히 심각한 고민을 겪지만 아톰은 그런 문제를 쉽게 극복한다. 초반의 설정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서커스에 팔려가는 등 <피노키오>와 비슷한 처지에 처하지만, 곧 착한 인간들에 의해 구해지고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런 면에서 아톰은 가장 덜 문제적인, 가장 덜 배신할 것 같은 로봇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한국민이 아톰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1970년대 TV 애니메이션을 통해 첫선을 보일 때 그에 대한 애정은 무한한 신뢰감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지나며 숨겨진 그의 국적이 밝혀지게 되고, 그에 대한 사랑이 자칫 매국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아톰은 프로 축구단 '포항제철'의 마스코트로 등장했다가 팬들의 항의 속에 퇴장했고 <아기 공룡 둘리>가 국가적인 지원 속에 그의 맞상대로 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톰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다른 어떤 로봇보다, 어떤 만화 주인공보다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크게 고민하는 일 없이 묵묵히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가장 부합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명석)
4위 그레이트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는 마징가 Z에 이어 등장한 완전히 새로운 히어로다. 극장 애니메이션 <마징가 Z와 암흑제왕의 대결>에서 보여준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의 로봇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극적인 '주인공 교체극'은 이후 거의 모든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원용하는 결과를 낳았을 만큼 강력한 임팩트로 세대 교체의 미학을 완성시켰다.
<마징가 Z와 암흑제왕의 대결>에서 마징가 Z는 이전의 적 기계수들과는 한 차원 다른 전투수들의 압도적인 화력에 난자당해 만신창이가 된다. 이때 마징가 Z에 대비될 만큼 화려하게 등장하여 기계수들을 단숨에 처단하는 새로운 히어로, 그레이트 마징가! 실로 그 이름에 걸맞는 '그레이트(great)'한 등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로봇의 교체만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할아버지가 만든 로봇을 자연스레 조종하게 되었던 <마징가 Z>의 주인공 쇠돌이(일본 명은 가부토 코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그레이트 마징가를 조종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파일럿 철이(일본 명은 츠루기 테츠야)는 냉정 침착한 성격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레이트 마징가와 철이를 데리고 나타난 사람은 지금껏 죽은 줄로만 알았던 쇠돌이의 아버지 강박사(일본 명 가부토 겐조)였다. 초합금 Z와 광자력 반응로 개발 도중 폭발 사고로 사망한 줄로만 알았던 강박사는, 사실 사이보그로 되살아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징가 Z>의 라이벌이었던 헬박사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적인 고대 미케네 제국인이 호시탐탐 세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비밀리에 그레이트 마징가 개발과 파일럿 철이의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개발된 초합금 NZ(뉴 Z)와 그레이트 마징가를 앞세워 암흑제왕이 지휘하는 미케네 제국과 기나긴 싸움에 나서게 된다.
전작 <마징가 Z>의 마지막 제92화에서 시작된 암흑제왕의 광자력 연구소 공격에, 부상당한 마징가 Z와 강박사를 돕기 위해 나타나는 그레이트 마징가의 모습은 이후 극장판인 <마징가 Z와 암흑제왕의 대결>에서 더욱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준다. 2.35:1이라는 압도적인 시네마스코프 사이즈 필름이 보여주는 <마징가 Z와 암흑제왕의 대결>의 웅장한 화면에 펼쳐지는 세기의 대결전, 그 화려한 클라이맥스에서 펼쳐지는 두 마징가의 더블 브레스트 파이어는 정말이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줬다. 마지막 그레이트 마징가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관객들의 궁금증을 뒤로한 채 나머지 이야기는 후속작 <그레이트 마징가> TV판에서 이어진다는(<마징가 Z와 암흑제왕의 대결> 개봉일은 1974년 7월 25일, <그레이트 마징가> TV판은 1974년 9월 8일 방영 개시) 이 멋진 상황 연출에 당시 어린이들은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다른 작품에서도 히어로가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1974년이라는 시대에, 이만큼이나 극명하게 전작의 히어로가 적들에게 완전히 파괴된 뒤 후속 작품의 히어로가 화려하게 데뷔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줬던 마징가 Z의 처참한 패배와 그레이트 마징가의 화려한 등장은 일본 만화사의 걸작 <마징가 Z>를 창조했으며, <게타로보> 시리즈를 통해서 변신과 합체라는 로봇의 낭만을 구현해낸 거장 나가이 고와 그의 창작 집단 다이나믹프로덕션이 낳은 신화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후 와 출판 만화로 발표된 <마징 사가>, 최근의 까지 포함하여 일본 만화의 근저를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다. 후속작 <그랜다이저>가 여성 취향의 스토리와 아름다운 미남 미녀 캐릭터들이 펼치는 화려한 화면을 선보였다고 한다면 바로 이 <그레이트 마징가>야말로 남성미 넘치는 박력 있는 스크린으로 브라운관을 꽉 채웠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정우)
5위 그랜다이저
1975년 10월 5일에 후지 TV를 통해 안방극장 데뷔 신고식을 치른 그랜다이저. 원작을 담당한 나가이 고와 다이나믹 기획, 제작을 담당한 도에이가 합심하여 빚어낸 결실로 초기 마징가 3부작 중 막내에 해당한다. 총 74화 완결로, 둘째인 그레이트 마징가보다 더 긴 장편 시리즈의 위용을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 시리즈의 스탭들이 같은 시기에, 같은 제작사에서 만들어진 <강철 지그>에 대거 투입됨에 따라 공공연히 서자 취급을 당하는 설움도 겪었다. 탑승자의 의지에 따라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강철의 성(城) 마징가 Z의 카리스마. 츠루기 테츠야라는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 및 업그레이드 된 성능의 그레이트 마징가. 그에 비해 그랜다이저는 확실히 디자인이나 스토리의 설정에서부터 차이점이 느껴진다. 덕분에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입맛 까다로운 마니아들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랜다이저가 한국인이 사랑하는 로봇 5위에 랭크되며 선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집권 신군부가 어린이의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황당무계한 유해물이라며 SF 애니메이션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 하기 전, 한국은 슈퍼 로봇의 전성기였다. 테크놀로지가 현실이 되고, 다양한 영상 매체가 범람하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예전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과학적인 설정을 들먹이며 리얼리티를 구현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상상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열정이 있었다. 이런 비교적 윤택한 SF시대의 자양분을 머금고 자란 세대의 로봇 사랑은 각별했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방영 중단의 충격도 컸다. 중단 원인에 대한 그럴듯한 루머도 분분했다. 하지만 요절한 스타는 전설이 되고, 최종화를 보지 못한 작품은 환상을 낳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랜다이저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물론 그랜다이저의 인기가 이렇듯 전부 환상에 기인한 거품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방영된 다른 작품을 통해 슈퍼 로봇 장르의 관습을 체득한 시청자들에게 그랜다이저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외계 과학기술 문명의 산물인 그랜다이저는 심지어 적인 원반수들의 초기 모델이기도 했다. 팔을 엉거주춤하게 벌려 둥글 넓적한 스페이저의 옆구리에 붙인 거북이 같은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베가성인의 침공으로 고향 프리드성(星)을 잃고 지구에 온 이방인 듀크 프리드가 주역이라는 것도 이색적이다.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는 배타적 정의관의 고정 관념에서 살짝 비켜났기 때문이다. 로봇은 감정이입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기에 절대 무적의 파워와 굳은 신뢰감을 갖춰야 마땅했다. 따라서 우리편 로봇은 외계에서 쳐들어 오는 악의 무리를 미리 감지한 박사님이 지구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결집하여 제작한 것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태생부터 다른 그랜다이저는 독특한 맛이 있었다.
한편 그랜다이저는 전작들에 비해 디테일이 풍부해졌다. 숄더 부메랑을 이용하여 만든 창과 낫을 합친 듯한 모습의 더블 하켄, 중거리 타격용 스크류 크러셔 펀치, 특수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반중력 스톰, 얼굴 옆의 노란 뿔을 이용한 스페이스 썬더까지 유용한 필살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더블 스페이저, 마린 스페이저, 드릴 스페이저를 옵션으로 착탈할 수 있다. 덕분에 조합에 따라 구사 가능한 전술도 다양한 편이다. 시청자들이 열광할만한 요소는 두루 갖춘 것이다.
물론 그랜다이저는 슈퍼 로봇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못했다. 원작자인 나가이 고가 구축한 세계관이 너무 확고했던 탓도 있겠지만, 제작 연도인 1975년은 슈퍼 로봇의 태동기이나 다름없다. 그때만해도 슈퍼 로봇 장르의 원형을 완성하는 역할에 매진해야 할 때였기에, 아무래도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오랜 베가성인과의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그랜다이저는 최종화에서 지구에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지구에 남아 있어달라고 조르기에는 고향 프리드성의 재건에 투신해야 하는 그의 사명이 너무도 막중하다. 떠나야 할때가 언제인지 알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송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