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V와 마징가 Z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지, 쇠돌이(마징가 Z)와 훈이(태권V)와 철이(그레이트 마징가) 중 누가 가장 멋있는지를 가지고 벌이던 활발한 논쟁은 놀잇감이 변변치 않던 아이들을 묶어주는 공통적인 관심사였다.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그랜다이저 중에서 누가 맏형인지 잘 모르거나 태권V처럼 발차기를 하지 못하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 시절 로봇이 아이들을 엮어주는 장난감이었다면 지금의 로봇은 세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화적 코드이자 추억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과연 어느 로봇을 가장 좋아할까? 본지는 이 질문을 직접 네티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지난 5월 9일부터 20일까지 12일 동안 FILM2.0과 DVD2.0의 사이트를 통해 네티즌과 독자에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로봇이 어느 것인지’를 알아보는 설문을 실시했다. 총 88기의 로봇을 미리 제시했으며, 그중에서 3개의 로봇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총 1,089명이 응답해 결과가 가려졌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로봇은 순서대로 로보트 태권V, 마징가 Z, 아톰,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건담, 에반게리온, 제타 건담, 짱가, 메칸더 V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로보트 태권V, 마징가 Z, 아톰이 상위 3강을 차지했는데 각각 634표, 405표, 272표를 얻었다.

이번 조사의 결과를 보면 역시 로봇은 아이들의 영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봇에 대한 낭만과 추억을 지닌 세대인 20~30대가 1970년대를 풍미한 로봇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인기 1위인 태권V는 1976년에 선보였으며 사이좋게 5위권에 오른 나가이 고의 ‘마징가 시리즈’(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는 70년대 말부터 국내 TV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3위에 오른 아톰은 1952년 <철완 아톰>으로 태어났으나 70년대 말에야 국내에 소개됐다. 한국 로봇의 대명사 태권V와 일본 로봇의 대명사 마징가 Z가 순위의 맨 앞 자리를 차지한 것도 상징적이다.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두 로봇은 화려한 메카닉이나 성능이 아닌 꿈과 희망, 용기와 정의 등의 브랜드 네임이 20~30대에게 훨씬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9위에 오른 <짱가>의 선전이야말로 30대 열혈 팬들의 승리라 할 만하다. 최초의 컬러 로봇 애니메이션인 <짱가>(원제는 <아스트로 강가>)는 1972년 일본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에는 다른 화려한 로봇들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초 국내에서 방영됐을 때에는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상대적으로 로봇 애니메이션이 희귀했던 한국에서 예상치 못한 환영을 받은 셈이다. 10위 <메칸더 V>도 마찬가지다.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암흑기라 할 수 있는 80년대 끝물인 1987년 국내에서 방영된 <메칸더 V>는 범상치 않은 로봇들 천지인 일본에서는 평범한 로봇물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로봇에 목말라하던 한국의 아이들에게 <메칸더 V>와 그 주제가는 최고의 선물이 됐다.

예상대로 이번 설문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이는 물론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일찌감치 로봇과 미래에 대해 꿈꿔 온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기술력이나 상상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한국 애니메이션은 80년대 자생적으로 생긴 로봇 애니메이션의 수요와 공급의 흐름마저 이어가지 못했다. 로봇 캐릭터의 자체 제작은 고사하고 이런 저런 정책적인 문제에 부딪쳐 TV에서 방영하던 일본 애니메이션들도 소리 소문 없이 중단되곤 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로 이어지는 시기는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의 암흑기였다.

이번 설문 순위에 오른 한국산 로봇은 모두 암흑기 이전, 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작품들이며 극장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영화보다 먼저 접했던 극장용 로봇 애니메이션의 위용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순위에 오른 한국산 로봇은 태권V를 필두로 황금날개(17위)와 스페이스 간담 V와 쏠라 1, 2, 3(공동 22위)이다. 황금날개는 태권V의 김청기 감독과 스탭들이 의기투합한 드림팀이 내놓은 또다른 야심작이었다. 1984년,‘3단으로 변신하는 외계인 E.T.가 타고 온 초특급 요새’라는 괴상한 카피를 달고 극장 개봉한 스페이스 간담 V와 쏠라 1, 2, 3 역시 김청기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스페이스 간담 V는 메카닉 디자인은 발키리(<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가변 전투기), 이름은 건담을 베껴 표절 시비에 휘말린 애증의 로봇이었다.

파워로 승부하는 일본과 한국 로봇들을 제치고 11위에 오른 R2D2와 22위 아이언 자이언트의 행보도 흥미롭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귀염둥이 R2D2는 첫번째 <스타워즈> 시리즈인 <스타 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1977)을 시작으로 전편에 출연한 이 영화의 친근한 조연이었다. 30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레아 공주를 지키고 C-3PO를 도운 것이 로봇 팬들의 은근한 사랑을 받은 이유일 것이다. 선한 로봇이면서 거대한 철갑 로봇인 아이언 자이언트도 22위에 올라 조용히 존재를 알렸다. 1999년 미국 개봉 당시 ‘혼자 보면 더 좋은 가족 영화’로 알려졌던 <아이언 자이언트>는 다소 심심한 스토리와 액션 연출로 흥행에는 실패한 영화였다. 이 로봇이 한국인에게 관심을 끈 것은 아무래도 DVD 보급의 영향이 크다. 상당히 세련된 화면과 다이내믹한 음질로 만들어진 <아이언 자이언트>는 한국 DVD 애호가들의 필수 소장 목록으로 떠오른 작품이었고, 캐릭터의 존재가 그 와중에 널리 알려졌다.

이번 설문은 로봇 마니아들의 입김보다 일반 독자들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됐다. 순위권에 든 로봇 중 몇몇을 제외하면 애니메이션의 작품성과 로봇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국내에서 한 번쯤 TV로 방영됐거나 극장에서 개봉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반면 비디오로만 출시된 <초전자로보 콤바트라 V>(비디오 출시 제목 <하드 펀치>)나 <초전자머신 볼테스 V>(비디오 출시 제목 <석양의 필살권>) 등은 원작의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순위에 들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VCR을 갖춰놓을 정도의 여유가 돼야 볼 수 있는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로봇이란 그런 것이다. 한국인의 뇌리에 남은 로봇의 이름에는 그 시절을 돌파했던 우리 삶의 모습이 진하게 배어 있다. 시간은 많고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로봇은 친구이자 영웅이었고 신화였다. 우리는 그렇게 로봇을 사랑했고, 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로봇의 순위를 적은 이 리스트는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추억의 조각일 것이다.

출처;필름 2.0 2003.06.07 / 윤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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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卵 2005-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저는 알바트로스가 제일 좋아요.(꾸러기 수비대라는 만화에 나오는..) 세대차이인가?

키노 2005-01-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전 로버트 태권V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