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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한국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하여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그와 같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여성들에 대한 교육기회가 증대하고 여성들이 사회 각계 각층으로 진출하면서 금녀의 벽이 무너지는가 하면, 특정 분야에서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사회적 약자이며, 많은 부분에서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남성들의 시각에 의해 왜곡 내지는 은폐되기까지 하였다. 지은이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실체에 비해 너무 과소평가 되거나 평가절하된 대표적인 여성들을 찾아내어 조명한다. 우리 국토 곳곳을 누비며 멀리는 수백, 수천 년 전 이땅에서 살았던 그녀들의 숨결과 체취를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박제상 부인,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강릉에서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부안에서 매창을, 수덕사에서 김일엽과 나혜석을, 땅끝 마을 해남에서 고정희를 만나기 위해 지은이는 분황사터, 황룡사터, 첨성대, 벌지지, 여근곡, 오죽헌, 초당리, 곰소, 수덕사, 해남과 수유리 등 그녀들이 살았고 생활하였던 곳들을 직접 찾아 나선다.
여행은 혼자 해도 좋지만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면 더없이 좋다. 이 책에도 지은이 이외에 사진작가 ‘류’와 친구 ‘봉소’가 등장한다. 여자들만의 여행인지라 풍성한 말잔치가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다. 대화체 형식으로 된 글쓰기는 현장감과 사실성을 더해 주고 있는데, 이 책이 가진 큰 장점이 아닐까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유교는 당대 생활과 사고를 지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고, 자연히 여성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주변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으며, 사회는 갖가지 구실을 내세워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적,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혼인과 상속에 있어 남성과 동등한 지위가 인정되었고 여왕이 존재하였던 신라에서 여왕은 고려와 조선시대 남성 역사학자들에 의해 평가절하되었고, 변방과 궁궐, 남성과 여성, 현실의 세계와 신선의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시풍을 선보였던 허난설헌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박지원, 홍대용으로부터 비난을 받는가 하면, 신사임당은 그녀의 작품과 재능이 아니라, 이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길러낸 어머니로서,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현모양처로서 인식될 뿐이었다. 물론 유교 전통사회에서 기생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질곡의 삶을 살다간 매창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신여성 김일엽과 나혜석의 존재에 형언할 수 없는 동경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동시에 성적인 측면에서 부정한 여자라고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이는가 하면, 시인 고정희는 남성 중심의 시어에서 벗어난 문학의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경험과 역사로 시를 쓰고자 하며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녀들의 작품을 읽어 보고, 그녀들이 살았던 곳을 사진으로 만나 보고, 그녀들이 지나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그녀들의 세계와 조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당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삶과도 맞닿아 있고, 그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 현재 이 사회에 발디디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그녀들의 인생과 삶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지은이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었기에 이 글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여성에 대해 좀 더 진솔해질 수 있었고 좀 더 실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았나 한다. 지은이는 때로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때로는 경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섬세한 여성 특유의 필체를 선보이며 유려하게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결코 흔하지 않은 색다른 체험이자, 동시에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해 주는 소중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