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꽂힌 박물관
콜렉터를 위한 기획 도서 바람
2007.01.22 / 박수진 기자 

웹이라는 저장고에 자신의 취향을 수집, 소장하는 요즘 시대, 대중 취향의 냄새에 예민한 출판사들이 잇달아 소장할 수 있고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내놓고 있다.

한 소녀는 수학여행 때 구입한 부엉이 기념품이 너무 좋았다. 오죽했으면, 부엉이를 키워드로 30년간 수집해온 공예품을 동원해 부엉이 박물관을 만들었다. 어느 인테리어 사업가는 우연히 맞닥뜨린 아프리카 구루족 가면 문양의 매혹에 빠져 제주도와 서울 대학로 두 군데에 아프리카 박물관을 열었다. 소유욕의 저장소 박물관. 현대인들의 수집욕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웹이라는 저장고에 자신의 취향을 수집, 소장하는 요즘 시대, 대형 박물관에서만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꺼내들기조차 민망하다. 그리고 대중 취향의 냄새에 예민한 출판사들,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연말 연초, 소장할 수 있고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 서점가에 등장해 눈길을 끈다. <셜로키언을 위한 주석달린 셜록홈즈>(이하 <주석달린 셜록홈즈>) <다빈치의 세계> <셰익스피어의 시대> <대장정, 세상을 뒤흔든 368일>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이하 <지도로 보는 세계사>) 등등. 제목만으론 얼핏 유사성을 찾기 힘든 이 책들은 강력한 두께, 문자를 압도하는 비주얼, 독특한 판형, 그리고 소유욕을 부추기는 양장본 커버로 치장하고 우리 눈을 뒤흔든다.

리더(Reader)에서 콜렉터로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는 12만 원이라는 숨 멎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예약주문만으로 1천5백 부를 판매하는 성과를 보였다. 세계적 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의 항공사진을 모은 다큐멘터리 일러스트집 <하늘에서 본 지구>는 프랑스에서만 판매부수 1백만 부를 넘기며 한국 출판시장에까지 진출해 ‘고가 마케팅’ 붐을 일으켰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이런 책들이 독자에게 먹히고 계속 출간계획이 잡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 리더(Reader)라고 불렸던 독자들이 점차 콜렉터(Collector)로 변하고 있다." 콜렉터의 속성 중 하나는 단연 마니아성이다. 이 책들은 콜렉터로 변모한 독자들의 의식을 파고든다. <주석달린 셜록홈즈>가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셜로키언’이라 불리는 셜록 홈즈 광팬들에게 홈즈의 사무실이 위치한 베이커가 221번지는 로망의 장소다. 그들은 혹시나 창틈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뒷짐진 채 잰 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이는” 홈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홈즈를 연구하는 이들 중에는 아직도 홈즈가 생존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홈즈의 죽음을 시사지 ‘타임스’가 보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데, 믿거나말거나 그래서 홈즈는 셜로키언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셜로키언들은 홈즈의 흔적이라면 무엇이든 찾으려 애쓴다. <주석달린 셜록홈즈>는 이 점을 간파하고 책 속에 홈즈의 자취가 느껴지는 실사 사진을 곳곳에 배치했다. 홈즈와 왓슨, 또는 홈즈가 맡은 사건 의뢰인이 마차를 타고 지나던 체링크로스역의 사진, 홈즈 사무실이 위치한 베이커가를 지나는 사륜마차 사진 등이 그런 것들이다. 번역자가 “과한 듯도 하다”고 말하는 1천 개의 주석도 마니아들에겐 그저 감사 거리다. 이 세세한 주석 구절들을 통해 홈즈에 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 묘사된 그의 손 비비는 버릇이 평소 습관인지, 코카인 중독으로 인한 손 떨림인지, 1888년은 홈즈와 왓슨이 알게 된 지 몇 년째인지 등등 별 걸 다 말이다. 이미 몇몇 출판사에서 홈즈 전집이 출간됐지만 <주석달린 셜록홈즈>의 기획, 출판은 소장용 시장인 ‘마니아 틈새시장’의 미래와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 홈즈만으로 끝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빨강머리 앤> 등이 <주석달린 셜록홈즈>에 이어 ‘주석 달린 고전 시리즈’ 차기작으로 대기 중이다. 짐작컨대 앤의 대사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앤의 주근깨 수까지 헤아리며 앤 피겨 구매에 월급을 다 털어 넣었던 마니아들을 침 흘리게 할 만하다. <지도로 보는 세계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기획된 구석이 있다. 유명 추리소설인 <캐드펠 시리즈>를 읽으며 12세기 왕권전쟁이 일어난 곳이 정확이 어디인지 궁금해 잠 못 이루던 이들, 15세기 30년간 일어났던 장미전쟁의 흐름을 한 눈에 꿰고 싶어 했던 역사 폐인들의 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지도로 보는 세계사>를 기획한 출판사 생각의 나무 임윤희 차장은 “마니아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가 기획의 시초였다”고 말한다.

하나의 챕터, 하나의 전시관

책 속에 스토리는 없다. 대신 손으로 만져지는 정보들이 가득하다. 청아 출판사의 <셰익스피어의 시대> <다빈치의 세계>는 책의 각 챕터가 박물관의 전시관 역할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선 책장을 넘기며 셰익스피어 생존의 증거들을 만질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쓰레기를 불법으로 쌓아놓아 받았다는 벌금형 선고문서를 직접 펴볼 수 있고, 1564년 4월 거행된 셰익스피어의 세례기록도 마치 동사무소에서 떼보는 양 확인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결혼 허가증서, 딸 수재너 셰익스피어와 쌍둥이 햄넷, 주디스의 세례등기, 햄넷의 어린시절 사망으로 인한 매장 등기부 등은 셰익스피어 후손들의 삶까지 읽게 한다. 런던에서 활동하던 셰익스피어의 저택 계약서 관련 문서를 보는 게 무슨 재미냐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문서들은 대문호가 살던 시대, 그의 주변을 흐르던 공기를 짐작케 한다. <다빈치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한한 관심사와 삶의 궤적들이 X축, Y축 좌표 사이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려진 느낌이다. 다빈치의 고뇌, 성취, 좌절 같은 '평전'류의 정보보다는 예술가, 과학자, 해부학자, 기하학자, 지도제작자, 비행기계 설계자, 군사 기술자 등 숨 찰 만큼 다방면의 지식인으로 시대를 앞서가던 다빈치의 지적 요소들이 페이지마다 종횡으로 펼쳐진다. 현존했더라면 '모나리자'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을 거라는 '무릎을 꿇고 있는 레다와 백조' 습작, 그가 설계한 낫으로 움직이는 전차와 탱크 등을 실컷 만지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의 바다에선 결코 얻어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입체 정보들이 한 권의 책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삽화의 유혹



삽화는 대부분 글의 도우미다. 읽는 이에게 책과의 거리감을 좁혀주는 안내인이라고 할까? 하지만 때로는 문자를 압도하는 절정의 삽화들이 행간의 의미에 풍부한 이미지를 수혈해 독자를 더욱 끌어당긴다. 이미지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되는 삽화, 소장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대장정, 세상을 뒤흔든 368일>(이하 <대장정>)은 파워풀한 삽화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책이다. 중국 판화가 선야오이가 6년의 공력을 들인 926컷의 판화 삽화가 국민당의 습격을 피해 길을 떠나야만 했던 중국 인민 30만명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굵은 선으로 웅변한다. 선야오이는 약 1만 킬로미터, 코스마다 설산과 초지가 기다리는 대장정 길을 두 번 오가며 생생한 소재들을 수집해 페이지마다 거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려냈다. “양쪽 군대의 전투는 치열했다”라는 평범한 한 줄의 문장은 무더기로 쌓여 있는 홍군의 시체, 치켜뜬 눈으로 이 광경을 목도하는 국민당 어느 병사의 눈빛이 더해져 가슴을 서늘케 한다. 동지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핏빛으로 변한 샹강을 바라보는 혁명 지도자 주덕라이의 비분에 떠는 눈빛은 스크린에 새겨졌던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의 타는 듯한 눈빛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대장정>의 절절한 926컷의 삽화들은 이렇게 1934~36년, 당시의 사진이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의 표정을 담아 재현한다. 그 삶의 증거를 소유하고 싶은 이들에겐 매혹적인 책이다. <주석달린 셜록홈즈>의 경우도 비슷하다. 마치 홈즈의 짝패처럼 여겨지는 시드니 패짓의 삽화뿐 아니라 W. H. 하이드, 댄 스미스, 밀턴 워슈컬, 필 메이, 익명의 삽화가까지 홈즈를 펜으로 형상화했던 거의 모든 삽화가들의 삽화를 동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삽화가들이 각각 느꼈던 자기만의 홈즈, 셜로키언이 아니어도 흥미진진하다. 자, 당신의 책장엔 무엇이 꽂혀 있나? 원한다면 세계의 다양한 역사적 자료가 담긴 박물관을 지금 책장에 꽂을 수 있다.

사진 김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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