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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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구 유럽의 세계에 대한 해석의 틀을 기준으로 볼때, 산업 혁명을 기준으로 의무 교육에 대한 필요는 요청되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이해와 분업화에 따른 순종적인 인간(manipulative person)을 길러 내는 것이 필요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지배세력들은 놀라운 것을 발명하였는데, 그것은 학교 제도이다. 그들은 교육이 가지고 있는 학습자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학습의 형태를 부정하였다. 학교를 통하여 커리큘럼을 제공함으로써, 국가가 원하는 내용과 방식을 학습자의 머리에 주입시켰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이반 일리히는 이것을 'schooling'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현대를 들어서는 학교는 일종의 교육의 동의어가 되어버렸고, 모든 교육이라는 것이 학교화를 통해서만 일워진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는 정부의 거대한 예산 낭비의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반 일리히가 보기에는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초중고등의 학교화 결과는 사회의 수치 측정 가치의 신화를 창출해내는데 있다. 이것은 인간을 재단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모든 특성을 박탈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학교는 12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통하여 학생들을 사회에 맞게 재단 하는 과거 의례화의 기능을 어느때보다 강력하게 한다. 그것은 신화의 기능이었고, 중세시대의 가톨릭의 기능이었다면, 현대는 학교가 그 기능들을 대신하고 있다.

학교화가 결국 유도하는 것은 모든 가치의 제도화를 통하여, 제도의 최정점에 있는 자로 하여금 이 사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인간 권력을 충족시키는데 그 기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은 학교화 세뇌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는 철저하게 순종적인 인간 그리고 조작가능한 인간(manipulative person)을 길러내는데 그 목적을 둔다. 이것은 학교를 벗어나서, 모든 제도와 가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학습이라는 단어를 각 개인에게 돌려주는 학습망(educational web)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룹을 토의 하도록 하고, 기술이 필요한 자에게는 학습 기관을 통하여 만남을 통하여 기술 전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의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은 학교는 이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도록 하는데, 가장 정점이며,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schooling 과 education 은 동일한 단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습은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자연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학습이다. 이러한 모든 학습의 환경을 학교로만 제한하는 것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이 사회의 억지스런 주장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우리는 학습의 주권이 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제도화 되어진 가치 판단에 모든 부정을 할 결의가 있어야 한다. 좀 더 나은 교육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지닌 자들과 싸울 결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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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교육을 위한 학습지도방법
미국교육과정연합회 / 교육과학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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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식 전인교육은 두가지 핵심으로 추출이 된다. 감정(feeling), 적응(adequecy) 이다. 학생들이 자라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제어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방식과 가깝다고 제안되어진다. 혼란과 무질서가 있을수 있지만, 교사는 그것을 감당할 결의가 있어야 한다. 용기도 있어야 한다. 무질서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저마다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해나간다.

교사의 역할은 협동의 관계를 이끌어 나간다. 학생들의 주의를 이끌어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들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이끌어내야 한다. 교사의 최종 목표는 창조성(creativity)이다. 창조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독교식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제도를 맥략으로 하는 것이다. 창조성은 바로 사회에 대한 적응이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지 능력이다. 인지 능력은 이해의 수준을 통해서 더욱 성장하고, 이해는 단순히 지식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구조화 과정을 통하여 자아를 확충해 나가는 작업이다. 재구조화의 작업에는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것을 통하여 사람은 원만한 사람이 되어져 간다. 사회에 대한 적응의 기술이 뛰어난 자. 그것이 바로 미국 1990년대에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의 교육에 대한 일련의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때는 여전히 많은 제한점이 많은 제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열린 교육을 지향했던 정부들의 모습도 엿볼수 있었다. 그러나 비판되어져야 하는 것들이 많다. 우선적으로 사회에 대한 긍정론이다. 그리고 인간을 한낱 사회를 위한 존재자로서만 파악하는 그들의 인간에 대한 안이한 생각이다. 이런점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한 제안이 이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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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 아시아 여성신학의 현재와 미래 아시아 신학 총서 7
정현경 외 지음 / 분도출판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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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성서해석은 유럽을 중심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한 해석을 줄곧 해왔다. 성서로부터 비롯되어지는 내용을 순수하게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성서해석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어져 왔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도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에 따른 성서해석의 절대성을 훼손한다고 비판받았던 이전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그 신학의 특성은 추론적이며, 권위적이고, 조직적이고, 일관되며 이성적이다.

하지만 현경은 이것을 뒤엎는다. 그녀의 성서 해석의 출발점은 고난 받는 개인의 경험이다.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고난받는 아시아 여성들의 경험이 신학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아시아 여성들의 고난은 해방자 메시아를 꿈꾸게 되었고, 그 고통의 경험이 예수와 일치 되면서, 자신을 일깨우는 신학으로의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 한다. 이 이야기의 결국은 아시아 여성 해방신학으로 귀결이 난다. 하지만 단순히 여성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여성은 출산과 생육의 경험을 통하여, 생명 존중의 신학과 사회 구도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생명력과 역동성을 강조하는것은 좋지만, 그것이 명확한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것이 단점이 될수도 장점이 될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좀더 지켜 보고 많은 논의를 해야할 내용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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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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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내용은 주인공의 퇴학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책의 호흡은 이틀의 시간만이 흐른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학교 선생님, 친구들, 창녀, 여동생 피비, 이제는 대학 교수가 되어버린 은사, 택시 운전기사, 매력적인 여자들, 춤추는 여자들, 다양한 사회의 군상들 속에서 주인공은 한결같이 "역겨움" 을 느낀다. 그들의 "가식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진실 되게 보이려는 온갖 기술적인 술수들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적당히 자신을 포장하는 상품들과 운동으로 단련된 신체와 세련된 예절과 위트가 넘치는 말솜씨들과 화려한 인맥. 

주인공이 바라보는 학교는 어떠한 곳이었는가? <1888년 이래로 우리는 건전한 사고 방식을 가진 훌륭한 젊은이들을 양성해 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학교를 서로의 시선이 왜곡되어지고, 굴곡되어지고, 거짓 포장을 하는 곳으로 바라본다. 학교 교장은 학부모에게 시일을 맞추어 식단을 바꾼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잘 길러지기를 바라는 소망에 따라 학교 방문의 피상적인 행위로 아이들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만족한다. 주인공의 시각은 냉철하다. 그곳에서도 한 두명의 학생이 건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학교를 들어오기 전부터 건전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학교란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그것은 "규칙"을 내 머리와 몸에 새겨넣는 "프레스 공장"

학교에 있는 자들은 끝없는 규칙을 이야기한다. 거기에서 근무하는 수행원들은 한결같이 "규칙"을 이야기 한다. 규칙을 지켜야 착한 아이라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며, 규칙을 지키는 것이 모범시민이라고 가르친다. 선생들은 주인공에게 질문을 쏟아 낸다. 주인공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다. 주인공은 이해받아서는 안되는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는 실패자이다. 그들에게 주인공의 "반칙"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반칙은 정신 이상이다. 정신분석을 들먹이며, 그에게 쪽지를 적어주는 그 행위는 세련된 규칙 전수법이다. 세련된 규칙 통제술. 규칙은 내가 받아 들여야 한다. 나의 머리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싫어"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 모범 시민 제작들은 "질문"을 한다. 질문은 그들의 강력한 무기. 질문을 하는 자는 권력자, 질문 받는 자는 통치 받는자. 정상인에게는 권력자의 침묵. 그러나 반칙자에게는 쏟아지는 질문. 주인공은 이제 병자요, 치료가 필요하다. 주인공은 "질문"의 권리가 없다. 오로지 "답변"의 의무만이 있다. "싫어"라는 말은 진리에 대한 반역 행위. 그것은 곧 반칙. "반칙"을 하는 주인공에게 주변인들은 끝없이 질문한다. "왜 그래?"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리고는 그들은 말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 허공에 울리는 주인공의 메아리. "정말 실제적인 것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아!"

피비의 질문은 서럿발이다. "오빠가 좋아하는게 뭐야?" 한번도 "싫어"라는 말을 해보지 않은 그가, 외부의 강압적인 조직으로부터 강요받은 그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싫은 것인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학교 교육은 그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다. 거기에는 진실한 인간은 필요 없다. 그럴듯한 인간들이 필요한 가식적인 공간이다. 그곳은 모범 시민 제조기이다. 인간 공장은 나의 아야기를 듣지 않는다. 나의 머리와 신체를 시민딱지를 붙이기 위해 프레스 기계로 찍어내려고 한다. 상황이 이러 할진데, 여동생 피비의 질문에 그는 쉽게 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표현되어지지 않는 자신이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긍정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부정적으로 무엇을 싫어하는지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자신의 앎에 대한 무지의 사태를 여동생을 통해 확인한다.

이런 그가 생각해 낸 것은 발로 앨리와 파수꾼이다. 죽은 자에 대한 환상, 자신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어린아이들. 어린아이의 특권은 자신은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학교와 박물관. 학교는 권력과 권위의 공간이요, 통제되는 공간이다. 박물관은 지식의 전당이요 선진국의 폭력의 성과를 자랑하는 권력의 공간이다. 모범시민들은 이곳을 찬양한다. 모범시민이 이런 곳을 욕한다면, 그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강탈당했다.

아이들의 특권. 초등학생들은 학교와 박물관에다 "Fuck You"라고 적어 놓았다. 아이들의 표현은 한낱 유아기적 시절의 장난이라고 치부 당한다. 표현의 자유는 권위로 비뚤어진 아이들에 대한 시각에서 허용이 되어진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지루한 것을 지루하다 하고, 싫은 것을 싫다한다. "Fuck You" 는 그들의 진실한 표현. 진실한 표현은 모범 시민 자신들의 오만한 관용에서 허용된다. 비뚤어짐이 진실을 탄생시킨다. 초등학교와 초등학생들이 즐겨 이용하는 박물관은 진실의 전당으로 변화한다.

반면 페신 고등학교의 건전한 환경은 모범시민의 위선과 가식의 전당으로 변화한다. 펜시 고등학교에 "Fuck You"라고 적는 학생은 불량학생이요 문제 학생이다. 유치하다고 인정되는 곳에서 표현의 자유는 허락되었다. 이상한 형태가 의사소통 공간이 창출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구하고 싶지 않을까? 낭떠러지 "싫어"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지는 낭떠러지. 곧 어른의 길로 들어서는 그들을 얼마나 구원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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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선교사와 한국근대교육 - 미션스쿨의 설립과 일제하의 갈등, 번역총서 9
이성전 지음, 서정민.가미야마 미나코 옮김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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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선교사와 한국의 근대 교육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학문의 범위가 좁다는 것이 아쉬운점으로 남는다. 단순한 사실에 대한 기술에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그것이 가지고 함의와 저자 특유의 시선이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일본 아카데미 학풍의 특징인가 라는 의문을 가진다. 어찌되었듯 좋은 점수를 주기는 글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고교 교과사를 읽는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

나에게는 지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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