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내용은 주인공의 퇴학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책의 호흡은 이틀의 시간만이 흐른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학교 선생님, 친구들, 창녀, 여동생 피비, 이제는 대학 교수가 되어버린 은사, 택시 운전기사, 매력적인 여자들, 춤추는 여자들, 다양한 사회의 군상들 속에서 주인공은 한결같이 "역겨움" 을 느낀다. 그들의 "가식적"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진실 되게 보이려는 온갖 기술적인 술수들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적당히 자신을 포장하는 상품들과 운동으로 단련된 신체와 세련된 예절과 위트가 넘치는 말솜씨들과 화려한 인맥. 

주인공이 바라보는 학교는 어떠한 곳이었는가? <1888년 이래로 우리는 건전한 사고 방식을 가진 훌륭한 젊은이들을 양성해 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학교를 서로의 시선이 왜곡되어지고, 굴곡되어지고, 거짓 포장을 하는 곳으로 바라본다. 학교 교장은 학부모에게 시일을 맞추어 식단을 바꾼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잘 길러지기를 바라는 소망에 따라 학교 방문의 피상적인 행위로 아이들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만족한다. 주인공의 시각은 냉철하다. 그곳에서도 한 두명의 학생이 건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학교를 들어오기 전부터 건전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학교란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그것은 "규칙"을 내 머리와 몸에 새겨넣는 "프레스 공장"

학교에 있는 자들은 끝없는 규칙을 이야기한다. 거기에서 근무하는 수행원들은 한결같이 "규칙"을 이야기 한다. 규칙을 지켜야 착한 아이라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며, 규칙을 지키는 것이 모범시민이라고 가르친다. 선생들은 주인공에게 질문을 쏟아 낸다. 주인공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다. 주인공은 이해받아서는 안되는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는 실패자이다. 그들에게 주인공의 "반칙"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며, 반칙은 정신 이상이다. 정신분석을 들먹이며, 그에게 쪽지를 적어주는 그 행위는 세련된 규칙 전수법이다. 세련된 규칙 통제술. 규칙은 내가 받아 들여야 한다. 나의 머리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싫어"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 모범 시민 제작들은 "질문"을 한다. 질문은 그들의 강력한 무기. 질문을 하는 자는 권력자, 질문 받는 자는 통치 받는자. 정상인에게는 권력자의 침묵. 그러나 반칙자에게는 쏟아지는 질문. 주인공은 이제 병자요, 치료가 필요하다. 주인공은 "질문"의 권리가 없다. 오로지 "답변"의 의무만이 있다. "싫어"라는 말은 진리에 대한 반역 행위. 그것은 곧 반칙. "반칙"을 하는 주인공에게 주변인들은 끝없이 질문한다. "왜 그래?"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리고는 그들은 말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 허공에 울리는 주인공의 메아리. "정말 실제적인 것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아!"

피비의 질문은 서럿발이다. "오빠가 좋아하는게 뭐야?" 한번도 "싫어"라는 말을 해보지 않은 그가, 외부의 강압적인 조직으로부터 강요받은 그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싫은 것인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학교 교육은 그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다. 거기에는 진실한 인간은 필요 없다. 그럴듯한 인간들이 필요한 가식적인 공간이다. 그곳은 모범 시민 제조기이다. 인간 공장은 나의 아야기를 듣지 않는다. 나의 머리와 신체를 시민딱지를 붙이기 위해 프레스 기계로 찍어내려고 한다. 상황이 이러 할진데, 여동생 피비의 질문에 그는 쉽게 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표현되어지지 않는 자신이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긍정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부정적으로 무엇을 싫어하는지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자신의 앎에 대한 무지의 사태를 여동생을 통해 확인한다.

이런 그가 생각해 낸 것은 발로 앨리와 파수꾼이다. 죽은 자에 대한 환상, 자신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어린아이들. 어린아이의 특권은 자신은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학교와 박물관. 학교는 권력과 권위의 공간이요, 통제되는 공간이다. 박물관은 지식의 전당이요 선진국의 폭력의 성과를 자랑하는 권력의 공간이다. 모범시민들은 이곳을 찬양한다. 모범시민이 이런 곳을 욕한다면, 그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강탈당했다.

아이들의 특권. 초등학생들은 학교와 박물관에다 "Fuck You"라고 적어 놓았다. 아이들의 표현은 한낱 유아기적 시절의 장난이라고 치부 당한다. 표현의 자유는 권위로 비뚤어진 아이들에 대한 시각에서 허용이 되어진다. 아이들은 정직하다. 지루한 것을 지루하다 하고, 싫은 것을 싫다한다. "Fuck You" 는 그들의 진실한 표현. 진실한 표현은 모범 시민 자신들의 오만한 관용에서 허용된다. 비뚤어짐이 진실을 탄생시킨다. 초등학교와 초등학생들이 즐겨 이용하는 박물관은 진실의 전당으로 변화한다.

반면 페신 고등학교의 건전한 환경은 모범시민의 위선과 가식의 전당으로 변화한다. 펜시 고등학교에 "Fuck You"라고 적는 학생은 불량학생이요 문제 학생이다. 유치하다고 인정되는 곳에서 표현의 자유는 허락되었다. 이상한 형태가 의사소통 공간이 창출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구하고 싶지 않을까? 낭떠러지 "싫어"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지는 낭떠러지. 곧 어른의 길로 들어서는 그들을 얼마나 구원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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