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카를로스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78
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음, 장상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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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카를로스 : 스페인의 왕자 >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우리들은 16세기 무적함대를 조직하여 세계를 제패했던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에 대한 실러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돈 카를로스>에서 그려지는 펠리페 2세는 아들이 사랑하는 약혼녀 엘리자베스를 가로채는 아버지이고, 로마 가톨릭을 믿지 않는 지역의 백성들을 잔혹한 형벌로 학살하는 인물이다. 펠리페 2세의 주위에는 자신들의 기득권만 챙길 궁리에 빠져있는 알바공작과 도밍고 같은 간신배와 종교재판장이 있다.

한편, <돈 카를로스>의 돈 카를로스와 포사후작. 그리고 엘리자베스 왕비는 펠리페2세와 대립하는 인물이며, 신교도를 믿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지방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독립운동은 실러가 추구하는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과 일치한다.

실러는 카를로스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우애 깊은 의형제이며, 간신배에게 둘러 쌓여있는 펠리페 2세에게 정확한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단 한 명 뿐인 인재이면서,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포사후작의 입을 빌어 에스파냐의 절대왕정과 펠리페 2세를 비판한다.

“허용되는 범위 내의 진리만을 형틀에 넣어서 찍어내고 형틀에 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배척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에게 쓸모 있는 것이 저에게도 알맞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동포에게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한, 저는 동포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143p-

“폐하께서 조물주가 만드신 인간을 당신의 손으로 다시 만드시고 이 새로운 인간 위에 신으로 군림하시면서 그만 조그마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아직 인간임을, 조물주의 손에서 태어난 인간임을 잊고 계신 것입니다.”-145p-

“폐하께서는 이제 신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제물을 바치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모습이 뒤바뀐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불운하게도 자연의 비뚤어진 모습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인간을 비하시켜서 당신의 단순한 악기로 삼으신다면 그 누가 폐하와 더불어 선율을 연주할 수가 있겠습니까?”-145p-

이와 같은 포사 후작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자유를 위한 돈 카를로스의 탈출이 비극적 결말로 끝을 맺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는 대화가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돈 카를로스> 전체에 등장하는 실러의 메시지는 매우 강한어조와 함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 오를레앙의 처녀 : 낭만적 비극 >

“난 무고하게 국민의 생명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아. 이대로 주면 우리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버릴 거야. 내가 어찌 나의 자식인 국민들을 검으로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안 돼, 그건 안 돼! 백성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난 왕좌를 포기하겠어.”-295p-

이 책에 함께 수록되어 있는 <오를레앙의 처녀>의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발언은 <돈 카를로스>의 펠리페 2세와 정반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샤를 7세가 추구하는 사회는 실러가 원하는 사회와 일치하므로, 성군의 지배하에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할 터인데, 안타깝게도 샤를 7세의 프랑스는 왕비와 사촌의 배반으로 인한 영국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런 상황을 가만히 놔둘 프리드리히 실러가 아니다. 이 극의 배경이 되는 백년전쟁이 벌어졌을 때, 실제의 잔 다르크의 활약상을 정확하 공부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샤를 7세의 프랑스를 위해 출전하는 양치기 소녀 잔느는 무협지에 나오는 절대고수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모든 상황을 종결지어버린다.

잔 다르크 개인적인 능력 보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초인이 되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고, 사랑에 빠져 신의 계시를 어길 것 같은 예감에 곧바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그 계시가 신에서 왔는지 악마에서 왔는지에 따라서 그녀를 대하는 시선까지 싹 다 바뀌어버리는 상황에 큰 공감이 들지는 않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물론, 후대의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신적인 존재로 묘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한 인간에 너무 의존하여 극을 전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지금 시점에서 더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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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떼 Mr. Know 세계문학 42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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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도적 떼>의 주인공 형 카를은 내쫓겨짐을 당한다. 그 사건은 비록 아버지의 의도가 아니라 동생 프란츠의 음흉한 간계 때문이었지만, 카를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됨을 의미했고, 신분 때문에 노출시키지 못했던 압제에 대한 저항을 표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어쨌거나 홀로 남겨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 도적 떼의 두목이 된 카를은 지방영주의 폭정에 대항할 수 있는 의로운 도적 홍길동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현실의 세상을 위해서 올바른 목표를 가졌던 사건들 구석구석에는 구정물 튀는 더러움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더러움은 결국 가장 약자의 몫으로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해서 약자의 몫이라고 정해준 사람은 바로 도적 떼였다. 왜냐하면 슈피겔베르크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협박과 사기를 일삼고, 슈프레틀레는 노약자와 아녀자와 아이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그들의 두목 카를이 짊어지게 될 짐이 된다.

카를이 짊어진 죄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았다. 지은 죄로 인해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또한 지은 죄로 인해 아버지는 두 번 죽음을 맞이한다. 게다가 지은 죄로 인해 불쌍한 여인 아말리아의 목숨까지 취한다.

마지막으로 도적 떼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가 선택한 길은 진짜 의적이 되는 길이다. 가난으로 인해서 생활이 어려운 이웃에게 목숨 값을 기부하는 일이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 동생 프란츠는 형과 반대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내쫒음을 행하는 인물이다. 형 카를이라는 존재는 한 가마니에서 구워졌으니 프란츠에게 소중한 존재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프란츠에게 피와 생명을 주었으니 거룩한 존재라는 당연한 진리들은 권력에 눈이 먼 프란츠에게 교활한 논리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프란츠는 ‘인간은 세상이라는 곳에 각기 버려졌음에 각각으로 존재한다.’ 고 믿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설파하는 종교와 반대의 길을 걷는 인물이다. 프란츠는 하느님보다 현세의 삶과 쾌락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프란츠는 권력을 위해 저질렀던 거짓 행동이 사람들에게 탄로 나기 시작하면서 종교의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들어앉은 하느님은 꿈을 통해 지옥을 가게 될 프란츠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정심을 잃은 프란츠는 지옥에 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나약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쫓겨난 자와 쫒아낸 자의 이야기. 형과 동생의 이야기. 그리고 선과 악의 이야기. 그렇지만 양쪽을 모두 떠나서 생각해볼 때, 두 형제의 이야기들은 모두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둘은 모두 사회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겉과 속으로 체득한 양심(도덕)에 굴복하게 되면서 그들의 저항은 실패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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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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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현재의 상태와 다르게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그 모두는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즉, ‘모든 것은 잘되어있다.’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며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16p~17p-

이 이론은 ‘순진한’ 이라는 뜻을 이름으로 가진 캉디드라는 어린 소년에게 스승 팡글로스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낙천주의자,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는 이 이론을 진리로 여기고 있었다.

즐겁게 최선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던 캉디드는 그가 사랑하는 퀴네공드에게 입을 맞추자마자 그녀의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그 길로 쫓겨나게 된다. 내쭃겨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세상의 실제 모습은 캉디드 스스로 최선의 모습이라고 위로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최선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캉디드에게 다가온 것은 자유가 억압된 군대라는 세계였고, 그 다음으로 전쟁, 지진, 종교 화형식같은 사건들이 계속 이어진다. 한편, 죄를 피해 도달했던 엘도라도에서 싣고 온 다이아몬드로 부자가 되었을 때는 그의 주위에는 사기꾼들만 득실댄다. 볼테르는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캉디드에게 냉혹함을 알려준다.

캉디드에게만 세상이 잔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퀴네공드의 경험. 남작의 아들의 경험. 마르탱의 경험. 팡글로스의 경험. 특히, 한때 공주였던 노파가 만났던 경험도 캉디드의 눈으로 본 것 보다 훨씬 악독하고 잔인한 세계였다. 그랬기 때문에 저자 볼테르는 그녀의 하소연을 위한 공간을 할애해 준 것일지도 몰랐다.

캉디드는 그가 겪고 들은 모든 탐욕, 폭력, 미신, 기만 앞에서도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는다. 엘도라도에서 얻은 부를 사기 당했을 때 만나게 된 마르탱과 '충족이유율'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 (파케트, 지로플레, 포코퀴란테)이 캉디드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말함에도 의심하지 않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작의 아들과 팡글로스가적인 만남을 통해 다시 등장하고, 캉디드와 마르탱에 팡글로스까지 합세하여 이어지는 논쟁은 마지막 장소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싱겁게 끝을 맺는다.

캉디드 일행과 그곳에서 만난 이슬람 승려와 터키 노인의 대화는 캉디드와 마르탱로 하여금 “이 세상이 최선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작은 것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결말을 얻어내게끔 한다.

이슬람 승려 : “악이 존재하건 선이 존재하건 무슨 상관인가? 대술탄께서 이집트로 배를 보낼 때 배 안에 쥐들이 편히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염려하시던가?” -246P- 

터키 노인 : “공무에 관여하는 사람은 가끔 비참하게 죽는다. 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를 않아. 나는 내가 가꾸는 밭에서 나는 과일을 그곳에 내다파는 걸로 족해.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걸세.” -247P, 248P- 

마르탱 : “추론을 그만두고 일합시다. 일을 하는 것만이 삶을 견딜 만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249P- 

캉디드 : “정말 멋진 명언이로군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농원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250P-

결국, <낙천주의자, 캉디드>를 통해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세상이 선한가? 악한가? 논쟁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당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꺼! 그게 더 중요한 문제야.”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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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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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법에서 어떤 사물을 묘사하는 방법에는 직유, 은유, 대유, 활유, 상징, 반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인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김용규씨는 유난히 은유(메타포)가 가진 힘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해석인 은유 또는 시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열어 밝히는 사람이고, 시를 읽는 독자는 그 시의 텍스트를 ‘은유적으로 봄’으로써 시인이 열어 밝힌 세계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하여 또 하나 자기의 세계를 열어 밝히는 사람” -44p-

또한 저자는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에서 외로움. 연애와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는 시들을 소개하고, 한편에서는 후기 자본주의나 프로메테우스 세계관 같은 국가적인 문제를 다루는 시들까지 소개한다. 저자가 개업한 <철학카페>에는 시인뿐 아니라, 시에 대해서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내걸어 놓은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외국의 소설가, 철학자, 사회학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비좁다.

많은 이들이 붐비는 곳에서 무슨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상당히 곤혹스러웠는데, 그중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개념이 겹치는 것 같은 가르침 몇 가지를 품에 안고 카페 문을 이만 나설까 한다.


나와 너, 시와 시인, 존재와 인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상호 주관적 매듭.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그들.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을 속이고 남들에게 의지하면서 어울리고, 남들이 인정하는 보통의 평균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인=직접성의 인간 = 페르소나)에게 필요한 실존적인 삶(주체적인 삶) 즉, 기획투사나 앙가주망.


몰아세움과 닦달. 이것을 겪는 모든 인간, 사회공동체, 더 나아가 국가에게 꼭 필요한 가치투사 즉, 절대 선의 가치 추구


‘시’라는 장르는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와 같은 SNS (Social Network Service)처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 까지 접할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전파력도 클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실제로 시를 읽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없다.


그 이유는 ‘시’라는 장르의 권위적인 성격 자체도 문제겠지만, 그것 보다는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시’라는 것을 대할 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답을 찾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시’를 편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제 정답 찾기에 골몰하는 것 따위는 그만두자. 저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충분히 시인과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시’라는 것을 함께 읽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SNS는 ‘시’를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유리하게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두려움만 버리면 된다.  


[네이버 북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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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도둑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현명수 옮김 / 버티고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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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슨의 <지킬박사>의 원전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안타까움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또 다른 명작 <보물섬>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기 보다는 아동소설작가로서 인식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은교>의 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지은 소설을 그렇게 꽁꽁 숨겨뒀었구나. 시인 이적요로서 평가되는 것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부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스티븐슨은 <지킬박사>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보통의 아동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장과 모험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인간의 이중성, 인간성 상실, 근친혼 문제와 같은 사회 각 부분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단편선 <시체도둑>에 실린 아홉 작품 역시 그런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아래의 글을 남기며 간략히 느낀 점을 소개 하고자 한다.  

<자살클럽>에서 저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이르러서 까지도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그것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과 사회에 불만을 품는다. 그리고 그 도박판을 이용해 부를 착취하는 이들을 고발한다. 그리고 결투를 통해 벌을 내리는 권선징악적 형식을 띄는 소설이다.  

<모래 위의 별장>에서 저자는 삼각관계를 그리고 또한 그 애정관계를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전 재산을 바칠 수도 있고 떠나줄 수도 있는 남자의 모습을 상반되게 그림으로써 잔혹하지만 잔잔한 여운을 안겨준다. 

 <하룻밤의 잠자리>에서는 가진 자의 입장과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 차이를 하룻밤 새의 논쟁의 형식을 통해서 표현해내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왜왜냐하면 “그들은 도둑질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 그들에게 만약 환경이 주어지게 된다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죄는 뉘우치나 결코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부르짖는 처절함이 “전쟁터에는 왕과 주님의 이름을 걸고, 군주와 성자와 천사의 이름을 걸기 때문에 명예롭게 싸워야 한다.” 권위에 가득 차 있는 말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신의 섭리와 기타>에서는 비록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주인공 부부는 음악으로, 마을에서 만난 부부는 그림으로…….  

“무대만이 예술가의 길인 것은 아니라오. 조각가나 무용가가 되어도 좋고, 시인이나 소설가도 괜찮소.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세요. 그리고 죽기 전에 완벽한 작품을 남기세요.” -239p- 

<마크하임>에서 저자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떳떳하지 못함의 연속이었고, 악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무조건 악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오히려 가난하고 못 배웠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더 선한 마음으로 볼 수 있고, 악마에게 흔들리지 않을 방법을 깨달을 수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악마의 병>에서는 사랑을 위해서 행한 일이라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포기하지 말고 계속 서로를 위하다 보면 의외의 좋은 일도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옥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들도 어디든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악마의병을 사간 사람에게 지옥 따위가 대수였을까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원하는 술을 마음껏 먹는 것이 중요했다.  

<물레방앗간의 윌>에서는 멀리서 바라보는데 익숙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어린 시절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려 했지만, 멀리서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임을 깨달은 한 남자가 그의 사랑까지도 멀리서 지켜보는 방식으로 즉, 애써 소유하려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살 수 있는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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