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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한한 지음, 김미숙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부제를 가진 <1988>에서
1988이 의미하는 것은 1988년식 스테이션왜건이다. 그런데 이 1988이라는 숫자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필 왜 1988일까?
개인적으로는 1989년의 천안문사태와의 연관성을 만들기 위해 1988이라는 숫자를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1988>에서도 주인공 나의 어린 시절의 멘토.
세상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띵띵 형이 천안문 사태로 희생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작가가 투쟁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띵띵 형이다.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던 인물의 희생은 이 사회자 정의롭지 않음을
암시한다.
국도 위에서의 5일 동안. 회상을 통해 등장하는 인물들. 「10번,
리우인인, 멍멍」. 만나러 갈 인물. 「1988을 수리해준 친구」. 현재 만나게 된 인물. 「나나」. 과거와 현재. 양쪽에 걸쳐 주인공 나와
관계된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꿈을 꾸지만 꿈을 이룰 수 없게 만드는 큰 벽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등장한다.
"한 때 나는 민들레 홀씨였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그저 흩날리는
홀씨가 아니라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식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지가 진흙이 아닌 바람에 이리 모였다 저리 모였다 하는 사막모래라는
것도. 오랫동안 내 발 아래에 있는 사막모래는 나를 데리고 사방으로 떠돌았다. 사막모래는 나의 뿌리를 편안히 묻어주기는 커녕 시시때때로
흔들었다." -40p-
“중국은 직할시, 대도시, 지역급 시, 현, 진, 교외, 농촌,
산촌, 빈곤한 산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배우자를 찾는 기준은 사랑이 아니었다. 후커우 순위가 앞서 있는 배우자를 찾는다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135p-
“『현실이 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 어두운 밤을 검정색만으로
물들이지도마. 네 자신을 만들어. 현실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강하지 않아. 종이 위의 호랑이일 뿐….』
그때 ‘팍!’하는 소리가 났다. 멍멍은 청개구리가 밖으로 뛰쳐나오기
직전에 재빠르게 뚜껑을 덮어버렸다. 그러고는 불을 최대한 세게 올렸다. 청개구리는 유리냄비 안에서 정신없이 날뛰고 있었다. 멍멍은 한 손으로
뚜껑을 누른 채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현실이에요.』” 182~183p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민들레홀씨였다고 생각했던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삶을 겪어가면서 출생위치에 따라 후커우라는 계급에 묶여 있는 즉, 사막모래에 흔들리고 있는 식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청개구리를
눌러버리는 냄비뚜껑이 이야기하는 비합리적인 힘은 투쟁력을 상실해버리게 만든다.
그는 과거에 기자라는 이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권력을
무기로 냄비 속의 청개구리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신문사 상사의 신문검열과
드라마 투자자의 폭로위협과 같은 냄비뚜껑들뿐이었다. 그리고 딴에는 정의를 위해 그가 과거에 썼던 기사는 현재 그의 1988에 함께 타고 있는
나나에게 냄비뚜껑이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는다.
한편, 나나라는 여인은 매춘부다. 사장에게 잘 보인 결과로 획득할 수
있는 영광의 8번과 18번의 매춘부가 아니라 40명 중에서 38번의 매춘부다. 그렇지만 그녀는 현재 처한 위치에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뱃속에 3개월짜리 아기와 함께 하고 있는 나나는 그녀의 가난과 천한
직업을 아기에게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렇지만 현실의 처참함은 그녀가 2만 위안을 모으게 될 때마다 단속에 걸려서 2만 위안
전부를 범칙금이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연히 2만 위안이 모이게 되는 순간을 함께했던 ‘나’와 나나의
어색한 동행은 이 모든 회상을 불러오는 핵심사건이 된다. 그리고 동행과 회상 끝에서 1988 친구를 만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1988의 뒷좌석에 차갑게 놓인 친구의 유골함이었다.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나나의 심각한 병은 여행의 끝을 알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적인 메시지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한한의
<1988>. 음울한 사회상을 풍자하는 것에 만족했던 지난 소설들과 <1988>의 결말은 달랐다. 2년 뒤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반전을 불러온다. 심각한 병에 걸렸던 나나가 낳은 아기가 두 돌이 될 때까지 무사히 성장했음을 알리며 모든 부분에서 한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만약 1988이 고장 나 도중에 멈추지만 않는다면 해안선은 나로부터
5,000킬로미터를 떠나갈 것이다. 그곳은 아주 낯선 곳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린 적이 있다. 당신이 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당신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을 할 때도 그건 모두 진심이었다. 이번에 나는 용감해야 한다. 내가 인정했던 친구들도 내
행동을 칭찬하며 허락해 줄 것이다. 어쩌면 당신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당신은 너무
어리석어.』” -278p-
“1988 그 친구. 띵띵 형과 10번, 그리고 리우인인과 멍멍,
그리고 또 다른 내 친구 나나. 그들은 오로지 내가 부딪혀야 하는 높은 벽을 나를 대신해 부딪혔고, 내가 빠져야 할 협곡에 대신 떨어졌다. 그런
다음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길은 괜찮으니까 계속 앞으로 가봐. 안녕 친구!』" -279p-
2년 후의 1988과 나와 나나의 아들의 새로운 여행이 암시하는 것은
1989년의 천안문 사건처럼, 어떤 투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