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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겨울만 되면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정도로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고장. 세 번의 여행길에서 만난 <설국>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양한 표현들은 이유 모를 감상에 젖게 만든다.
따스해진 가슴에 예고 없이 찾아드는 장면들에서 빠지지 않고 계속 등장하는 것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들이었다.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는 그들이 애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하지만 그 대화의 줄은 촘촘히 얽혀 있어서 줄의
어느 부분을 잡아야 할지 몰라 힘을 쏟아볼 요량도 없이 맥이 빠진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어지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12p-
눈에 등불이 켜졌다고 묘사하는 요코라는 여인을 여러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시마무라가 내적으로 풍겨내는 심리표현들은
관음적인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용가의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춤추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상상으로 서양의 언어나 사진에서 떠오르는 그 자신의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랑에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 -25p-
부모가 남겨주신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책이나 사진과 같은 인쇄물만을 보고서 서양무용에 관해서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시마무라의 골수 깊숙이 박혀있는, 대상을 탐색하고 이리저리 재며 상상하는 관찰자적인 버릇은 여행 중인 설국에서 일어나는 상황 속으로 몰입할
수 없도록 한다.
<설국>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단어인 ‘헛수고’라는 단어는 그 관찰자 적인 버릇의 결과이며, 모든 관계의 진전을
방해한다. 이 헛수고는 시마무라의 입을 통해 여러 장면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행위가 헛수고임을 의미한다. 약혼자를 위해
게이샤가 된 것도 헛수고. 읽은 책의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을 나열하는 것도 헛수고다.
이 헛수고는 시마무라가 중요한 것을 취하려는 순간 자의적으로 허무함이라는 니힐리즘을 버무려 탈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때
마침 묘사되는 주위 풍경의 평화로움은 시마무라의 탈출행위를 교묘히 덮어버린다. 그리고 예고 없이 또 다른 시점에서 새로운 대화들이 이어지고,
고양되고, 또 탈출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지만 그의 탈출은 점차 어려워진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110p-
그런데 속물임에 분명한 시마무라가 허무함을 무기로 그녀들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이유에 대해 궁금즘이 생긴다. ‘헛수고’와
그것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순수함(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마무라의 더러운 부분이 그녀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만든 것일까?
“나는 더러운 병균을 가지고 있는 놈이니 순수한 이들에게 병균을 전염시키지 않고, 그냥 앓으면서 혼자 더러움을 감내하고
간직하며 살겠다.” 이런 것일까?
마지막의 화재사건은 그들의 줄다리기가 종결됨을 의미하는데 과연 시마무라는 그녀들과의 추억들을 헛수고로 생각했던 것이
다행스러울까? 아니면 후회스러울까? 궁금하게 만든다. 아마도 후자 쪽에 가까워졌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