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브렌다 매독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어문학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이 만약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제임스 조이스라는 인물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만약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당신은 제임스 조이스의 한 두 작품쯤은 읽어본 사람일 것이다.

 

그저 책의 주인공이 위대한 작가의 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혹은 주인공의 포스가 멋들어지게 담겨있는 겉표지에 홀렸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개인적으로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큼 이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모든 배경의 연관성을 필요로 한다.

 

여자 조르바, 노라 제임스

 

개인적으로는 <노라>라는 인물을 읽으면서 그녀에게 감히 조르바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는 본능적이었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다닐 정도로 시력이 안 좋았던 제임스 조이스를 한눈에 반하게 만들어버린 육체적인 강인함에서 풍겨오는 성적매력은 그토록 본능적이었다.

 

노라는 성적매력을 숨기지 않았다. 노라와 제임스는 동거생활 내내 커다란 올가미에 걸린 채, 아슬아슬하고 아찔하면서도 강렬한 밤을 즐겼다. 밤에 하는 일 뿐이던가? 서로를 애타게 갈구하며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은 비밀스런 편지글들은 두 사람 보다 더 완벽한 유전적인 반쪽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성적 행위들과 흥분했을 당시의 그녀의 문체들이 제임스의 머리와 손을 거쳐 <율리시스>라는 대작의 몰리 블룸의 모습으로 낱낱이 공개된다는 사실이었다. <율리시스> 뿐만 아니라 제임스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노라가 모델이라고 하니 그의 작품에서 노라가 차지했던 비중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 사실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제임스 조이스에게 노라처럼 뜨거운 매력의 여인이 없었더라면 그의 작품은 오늘날의 위치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는 섣부른 해석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즉, 노라 제임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부가 아닐 수 없다. 제임스의 천재성을 표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합했던 여인이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내조하는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몸을 맡기는 여성이라니.

 

노라뿐만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 역시 본능적 삶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 본능이 표출하는 바를 의식의 흐름이라는 훌륭한 서술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천재성. 그 본성이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은 유교의 예(禮)의 사상에 젖어 남을 배려함에 익숙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동양인들에게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는 점을 일러준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인생이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작품 형성에 노라가 끼친 영향력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전반부를 지나고, 개인적인 욕망만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는 분명 다른 여러 부분에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노라>의 후반부에 이르러서 잘 보여주고 있었다.

 

욕심 많은 삶이 낳은 부작용

 

간략하게 말하자면, 민족과 국가와 종교를 모두 초월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은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계획도 없이 바로 앞에 닥친 환경에 따라, 가난하거나 때로는 호화로운 일상을 반복한다. 이런 생활 덕분에 그들 부부는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신세지는 일이 많이 생긴다. 그들은 제임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들의 지원 속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지내게 된다.

 

그랬던 두 사람에게는 조지오라는 아들과 루치아라는 딸이 있었다. 두 자녀들은 부모의 욕심에 이리저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자주 바뀌는 언어적,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겪게 된다. 이것이 자녀들의 정서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결과, 자녀들이 가지고 있던 꿈의 접근은 요원해진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만족감과는 관계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기 때문이었다. 조지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잠재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루치아는 애정결핍이 낳은 극도의 정신적인 분열증상으로 평생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야만 하는 참혹한 삶을 강요당한다.

 

맺음말

 

분명히 <노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부인만을 조명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조이스 가문의 기둥 역할을 맡은 제임스 조이스. 조이스 가문의 아들, 딸의 이야기들을 통해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한 가족사에 대한 전기로 발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 같다.

 

전기를 통해서, 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세계를 탐험하는 것에 벗어나 그들의 가족의 이야기와 작품이 쓰였을 때의 역사적 상황이나 경제적 상황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작품에 숨겨져 있는 창조주적인 생각들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읽은 사람.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서술한다는 그의 문체를 실제로 접해본 사람. 대체 왜 제임스 조이스라는 사람은 이따위로 어렵게 글을 써야만 했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은 지적갈증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이상우 지음 / 청어람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우 작가의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는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이다. 허나 계유정난만 있는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김종서는>과 <누가 죽였나>의 두 부분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 즉, <김종서는>에서는 장군의 업적과 일대기를 그리고, <누가 죽였나>에서 계유정난의 그 날 밤이 공개된다.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이상.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대호 김종서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는 결말은 정해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소설의 운신에서는 커다란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서는> 역시, 이 한계를 최대한 감추는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해결책은 북방에 살고 있던 조선여인. 김종서 장군을 사모하게 될 홍득희의 사연들을 역사 속에 풀어놓음으로서 독자들에게 제시된다. 가상의 인물 홍득희와 이 사연들을 함께 할 동료들 또한 가상의 인물이다.

 

한 때, 또리였던 그녀는 젊은 시절의 김종서에게 은혜를 입고, 바라는 것(希)을 다 얻을(得)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녀는 산적무리를 거느릴 정도로 뛰어난 무예실력을 가진 여인으로 성장하여 가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김종서 장군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장군의 활동을 곁에서 드러나지 않게 보좌한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리는 여러 이야기들 중 홍득희가 열 명의 부하를 구하기 위해 적장 앞에서 멧돼지를 처치하는 에피소드라던가. 김종서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호랑이를 때려잡는 에피소드 등은 극으로 꾸며도 좋을 정도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후에 홍득희가 김종서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요구하는 장면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김별아의 <논개>에서의 가련한 여인 논개처럼 지아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여인의 애틋한 마음을 홍득희의 여러 행동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김종서는>에서 작가는 김종서의 기나긴 삶 속에서 이어지는 중요하고도 굵직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의 흐름을 잇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개개인들의 심리적인 묘사에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앞부분의 양녕대군의 에피소드를 축소 하고 뒷 부분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방법은 어땠을까도 상상해본다.

 

더불어 결말을 암시하는 계유정난이 가까워져 오면 올수록 존재감이 약해지는 홍득희의 위치와 계유정난의 밤에 수양대군의 상투만 벨 수 있게 허락되는 홍득희의 제한적인 역할이 참 애매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을 거스를 수 없었던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아쉬움이 아닐까싶다.

 

[인터파크 서평이벤트를 통해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하였음을 알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379p-

 

책 속에 있는 이 문장이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청년의 입을 빌어 밝힌 소설 속 화자의 결심이자, 소설 밖의 예술가인 제임스 조이스. 자기 자신의 결심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임에도 틀림없다.

 

숨어있는 한 문장. “믿지도 않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368p)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발언은 위의 메시지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를 제공한다. 이 발언은 그가 믿지 않겠다는 조국, 종교, 가정에 관련한 모든 말들이 거부의 의미 보다는 초월의 의미에 더 가까운 의미가 아닐까 유추하게 만든다.

 

이 소설은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청년의 눈앞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고유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생각하려는. 즉,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고정된 배경들보다 그가 살아가면서 학습한 철학적 가르침에 의존하겠다고 선언한 1904년의 유배생활 이후 1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담고 있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가 예술가의 삶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관련된 기억들 중에서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을 나열함으로써 진행된다. 그 나열의 뇌까림이 그 당시 느낀 그대로 옮겨진다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디덜러스의 타고난 성격을 알아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1부와 2부에서 몇 가지의 장면을 거쳐서 후다닥 지나간다. 그러나 매춘을 했다는 죄의식에서 시작된 그의 고뇌와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은 3부와 4부에 걸쳐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제임스 조이스는 발버둥을 표현하기 위해 기독교의 이론과 세계관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 시기의 기독교는 그의 시야의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고뇌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로를 결정하게 될 나이가 됐을 때, 디덜러스는 성소(聖召)를 받드는 것이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는다.

 

5부에서는 대학생인 디덜러스가 그가 공부하여 얻어낸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로 학우들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설득하기 위해 그가 직접 얻은 도구들을 꺼내든다. 5부는 그 도구들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들이 중점적으로 펼쳐진다. 이 도구들은 자아를 깨닫게 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된다. 결국, 디덜러스는 깨닫는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마치 한 인물의 초상화처럼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해서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해서 섬세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초상화는 그림 속의 디덜러스를 통해서 그림 밖의 제임스 조이스 자신을 그려놓은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화상을 따라가 보면, 보는 사람들 각각의 유년시절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그 때, 나를 얽매였던 것이 무엇이었나?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생각들은 각자의 자화상을 탄생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이지 밀러 (책 + CD 2장) 삼지사 명작영한대역 6
헨리 제임스 지음 / 삼지사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제네바에서 너무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상실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국적인 것에 어색해져 버렸던 것이다. 사실 그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나서 사물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게 된 뒤로 이처럼 명백한 유형의 미국 아가씨를 만난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아주 매력적인 아가씨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그녀가 사교계의 광이란 말인가! 그녀는 다만 뉴욕 주에서 온 예쁜 아가씨에 불과할까. 남자들 사교계에 드나드는 예쁜 아가씨들이란 모두가 그녀와 같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뱃속이 검고 뻔뻔스럽고 부도덕한 젊은이일까?" -37p-

 

스위스의 브베이라는 작은 휴양지에서 처음 만나게 된 데이지 밀러라는 어여쁜 미국 아가씨는 윈터본의 마음을 처음 본 순간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유럽의 사교문화에 환호하고, 이성을 만나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데이지가 너무나도 자유분방해 보였던 탓에 미국인이었던 윈터본은 같은 미국인인 데이지 밀러를 바라보며 내가 비정상인가? 아니면 그녀가 비정상인가? 에 대한 혼란스러움에 빠져든다.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는 <아메리칸>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유럽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대립적인 시각을 축소화시켜 드러내는 작품이다. 다만 <아메리칸>과의 차이점이라면 <아메리칸>이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미국과 유럽의 모습 그대로 표현해 냈다면, <데이지 밀러>는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미국에서 살다온 미국인과 유럽에 정착한 미국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서 미국을 대변하는 인물인 뉴만과 데이지 밀러는 약자의 위치에 서있다는 점은 같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데이지 밀러의 자유분방함이 너무나 강렬해서 윈터본이 느끼는 감정에 동정심이 생기는 것도 지금의 심정이었다. 솔직히 탁 까놓고 말해서, 윈터본이 느끼기에는 자신이 어장관리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마음 또한 사실이니 말이다.

 

나는 결코 남들의 시각 때문에 무조건 스스로를 억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윈스턴의 유럽의 시각에서 충고하는 이야기들을 공감하지는 않는다. 데이지 밀러를 몰래 훔쳐보면서 유럽에 정착한 미국인들끼리 천박하다며 수군거리는 행동 또한 비열해 보인다. 이런 집단화된 논리는 소수의 약자를 괴롭히는 큰 무기가 되고, 그 집단 논리에 저항해보려고 반항하다가 결국 데이지 밀러는 숨진다.

 

그런데 <데이지 밀러>에서 재미있는 것은 데이지가 숨진 후의 마지막 장면인 이탈리아인 조바넬리의 대응방식에서 소설 내내 숨겨져 있었던 유럽인들이 미국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아가씨가 살아계셨다 해도 저는 아무것도 얻는 게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저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219p-

 

즉, 유럽에 정착한 타인 중에 애정을 느낀 윈터본은 그녀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유럽인 중에 애정을 느낀 조바넬리는 ‘어차피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갖고 놀다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쉽게 말해서, 설사 남들이 그녀에게 천박하다 손가락질 할지라도 윈터본은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의미가 있고, 조바넬리는 어차피 남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이 아쉽고 슬프다.

 

그나저나 헨리 제임스 소설에서 스위스가 주는 상징적 의미가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스위스라는 곳이 미국과 유럽을 각각 50퍼센트씩 혼합 시켜놓은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메리칸>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 스위스는 꽤 중립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20페이지 분량의 <아메리칸>은 총 2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각 장에 할당된 20페이지 내외의 일정한 분량이 26부작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아메리칸>은 자수성가한 미국인 크리스토퍼 뉴만이 유럽의 귀족사회의 벽에 부딪히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들을 부각시킨 작품인데, 이 사건들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향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프랑스 사회는 허례·허식의 댄디즘이 만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댄디즘을 말하기 위해서 고리오 영감과 매우 흡사한 인물이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에서도 등장한다. 노에미 양의 아버지 뉴만의 불어 선생 니오슈 씨였다.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상류사회의 입성을 노리다가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몸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꾸며내어 돈 많은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 상류사회에 진출하려는 노에미 양. 그런 딸이 못 마땅하지만, 애틋한 부정(父情)이 어쩔 도리 없게 지켜보도록 만드는 아버지 니오슈는 <아메리칸> 속 <고리오 영감>이었다.

 

한편, 미국인의 눈으로 본 유럽사회를 그린 <아메리칸>. 이 소설의 주연배우 격인 미국인 뉴만과 벨가드 가문의 싱트레 부인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아메리칸>은 미국을 정복한 뉴만이 진입하려고 하는 목표가 유럽 사회의 내부에 있음을 유럽을 방문함으로써 알린다.

 

미국인 뉴만에게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귀족 여인을 품에 안고, 스스로 획득한 부와 그에 걸맞은 부인이 내려주는 귀족의 지위를 누리며 살고 싶은 내적 욕망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본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 벨가드 가문의 싱트레 부인은 안성맞춤이었다.

 

개척정신하면 미국인이라는 사실처럼 뉴만은 그녀를 얻기 위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6개월의 구애 끝에 결혼할 권리를 얻는다. 그렇지만 결혼을 허락할 것 같아보였던 그녀의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돈이냐? 지위냐? 라는 갈등에 빠진다. 돈이 곧 지위가 되는 지금의 시대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갈등인데 그 시대에는 이것이 중요한 갈림길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1870년대의 미국과 유럽 사이의 갈등이었다.

 

결국, 벨가드 가문의 반대는 미국인 뉴만의 귀족 사회 진출을 막아세운다.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의 선택은 딸을 처음 시집보낼 때와 같았다. 돈과 지위 모두 다 충족하는 사람이어야 했고, 돈과 지위 중 선택하라면 지위를 택할 것임을 뉴만에 대한 반대로 나타낸다. 집안의 반대는 싱트레 부인에게 수도원에서 남은 생을 마감하기를 강요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싱트레 부인의 대처방법이다. 어찌하면 이토록 수동적인 인물의 탄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집안의 명령에 그녀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뉴만을 사랑했던 그녀는 그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순순히 뉴만을 떠나보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겨내는데 익숙했던, 개척정신이 강한 미국인 뉴만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그로인한 벨가드 가문에 대한 증오는 그로 하여금 벨가드 가문의 숨겨진 부정을 알게 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그 사실은 바로 돈 많은 늙은 귀족에게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노(老) 벨가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었다.

 

뉴만은 -이를 사회에 공개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서 고립됨을 의미하고 더 이상 지위 누리지 못함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사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뉴만은 폭로할 결심을 한다. 그렇지만 유럽사회 구성원들이 구축해놓은 암묵적인 카르텔은 강력했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미국인 뉴만의 이야기를 들어볼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가로막힌 상황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뉴만은 체념한다. 벨가드 가문의 부정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불태워 버린다. 불은 문서와 함께 그의 사랑을, 유럽사회 진출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내 느낌으로 그들이 도전한 이유는 결국 당신이 일을 벌이지 못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끝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건 자신들의 결백함도 아니고, 허세를 부려 혐의를 뒤엎는 재능도 아니었어요. 그건 놀랄 만큼 선량한 당신의 성격에 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는 걸 알겠지요.” -521p-

 

그가 넘기엔 유럽은 너무나 커다란 장벽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앞만 바라보고 달릴 줄만 알았던 착한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돈만 있었을 뿐,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100년의 역사가 안 된 미국이 유럽 사회에 인정을 받기가 얼마나 험난한지에 대한 풍자로 여겨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