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년 2월 1일 방문했던 민음사 북클럽 반값목록에 올라와있던 시인 김수영의 전집은 거의 2월 내내 전집에서 언급된 생소한 작가의 책을 찾아보게 했다. 왜냐하면 <김수영 산문집>을 보면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가지의 방법론을 배우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것과 상당히 유사했다. 그의 산문에서 언급되는 작가의 평가나 아포리즘을 따로 엑셀로 저장해두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어 실행해 옮기지 못했지만, 열망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김수영 전집>은 한국의 근대문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던 나로 하여금 김수영이라는 위대한 백그라운드라는 이름의 허세를 빌려주기에 이르러 지속적으로 그의 이름 석 자를 들먹거리게 했던 것 같다.

 

김수영 산문의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일상과 현실에 대한 글에서 느껴지는 솔직함이 좋았다. 넓은 시야를 바탕에 두고 그것들을 어색하지 않게 포괄하여 쓰는 그의 일상적인 글을 보면서 지금 쓰고 있는 내가 글을 한 가지 면에 집착하면서 쓰고 있지 않나? 라는 반성을 하게끔 하여 주었다.

 

그는 글이 쓰기 싫으면 싫다고 말한다. 그런데 싫어하고 있는 자체까지 산문의 내용을 이어주는 훌륭한 재료가 된다. 또한, 면봉이나 낙타산이나 구두와 같은 사물이 작동하는 과정을 관찰하며, 이 사물이 현실과 만났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을 표현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산문의 2부, 3부, 4부, 5부에서는 시인의 사회관과 문학관이 잘 드러난다. 그가 완벽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4·19혁명을 극찬하고 있는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문학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사상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냉전이 종식되지 않은 시대 상황임에도 그는 당당하게 자유를 요구한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177p-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398p-

 

그는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향해 “살아있는 눈 위에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고 표현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그는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 말한다. 머리에서 미리 걸러내지 말고, 심장이 뛰는 것만 고르지 말며, 그저 온몸이 가리키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즉, 생명이면 생명. 분노면 분노, 냉정이면 냉정. 죽음이면 죽음. 그대로를 글자로 써내려가자고 말한다.

 

또한, 시가 뱉는 침은 현실사회의 상호연관성이라는 힘이 뚜렷하게 존재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현실도피를 하는 당시의 초현실주의 시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국의 냉전 상황의 현실, 군부독재의 현실을 무시하고 세계문학의 조류에 휩쓸려 엉뚱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펜대를 기울이는 지식인들에게도 같은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학 선배라는 총대를 메고서 써내려간 그의 시 월평은 상당히 신랄한 어조를 띄고 있다.

 

이 산문에는 시인의 생전 모든 글을 모아 수록해 놓았다고 한다. 시작노트와 일기. 그리고 그가 완성하고 싶어 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의용군이라는 장편소설까지. 600페이지가 넘는 글 사이사이에 명 문장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에 대한 짤막한 감상을 남겨본다. 그의 초기 시들이 상대적으로 난해하고 메타포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점차 산문화되고 구체적인 단어들로 목소리가 분명해지고 있음이 전달되었다.

 

아마도 온몸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손이 움직이는 대로 쓴 그의 후기작품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승만의 사진을 밑씻개로 사용하자는 그의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가 특히 그러했다. 제목부터 솔직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닥터 지바고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40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는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지만, 삼촌 니꼴라이 니꼴라예비치의 영향과 궁핍한 유년기를 보낸 까닭에 “아래(국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혁명”과 “평화적인 비폭력주의 혁명” 이라는  톨스토이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개조! 그런 말을 예사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경험만은 비록 많이 쌓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번도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적이 없었던 사람들, 인생의 숨결, 인생의 고동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뿐이에요. 그러한 사람들은 존재라는 것을 아직도 자기네의 손이 닿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원료의 덩어리, 이제부터 가공해야 할 소재로 생각하고 있어요. -406p-

 

러시아 내전 시대에 공산주의의 동몽이상(同夢異床) 차이? 아니. 러시아 혁명의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서로를 학살했던 백군과 적군 지도자의 문제점은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균일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인간을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생각은 유리가 가지고 있던 신념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는 그것에 따르지 않기로 한다.

 

당신네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속담을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잊고 있지요. 억지로 환심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A 라고 말한 사람은 B라고 말해야 한다>라느니 <무어 인은 제 할 일을 했으니 무어 인은 돌아가도 괜찮다>라느니 하는 따위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틀에 박힌 말은 딱 질색입니다. 나는 A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B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407p 발췌-

 

유리 지바고의 선택은 혁명의 주체가 힘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고르돈과 두도로프)이 보인 행동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지식인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말을 얼굴빛 변하지 않게 내뱉는 지식인들. 결국, 그들의 행위의 변(辨)을 외적인 곳에서 찾아내 정당화하려는 일반적인 지식인들의 모습) 과는 다른 차원의 모습이었다.

 

<닥터 지바고>의 유리의 고행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자연파괴와 물질만능주의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에서 집을 짓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과 비견된다. 유리가 17장에서 남긴 시들은 기독교적인 색채만 지우면 전원적인 삶을 그리워하고, 평범한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월든 호수에서 소로우가 남긴 글과 비슷하다.

 

<닥터 지바고>에 대한 감상이 이런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지바고>의 유리와 라라의 만남만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그 장면의 본격적인 시작은 13장에서 시작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사적인 글들을 서론쯤으로 넘겨버린 우를 범했다.

 

또한, 이 책은 서사적인 인물과 장면에 대한 글 이외에 벌어졌을 법한 사건을 가리는 행간이 너무 많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사건에 따른 감정을 직접 꺼내어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감정들 사이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스뜨렐리니코프의 절규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왜?”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모든 이들의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동시에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해답이 된다.

 

“그녀가 겪었던 온갖 부당한 처사를 몽땅 갚아주고, 그녀의 마음에서 저 불쾌한 기억들을 씻어내고, 그리하여 과거의 타락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 하게 하고, 또 세상에서 뜨베르스까야 얌스까야 거리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561p-

 

유리가 어린 시절 자신의 솔직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라라를 보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그녀를 보내준다. 한편, 그녀의 남편 스뜨렐리니코프는 사랑하는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현실을 엎어버리기 위해 죽는 날까지 행동한다. 이 시대의 러시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이처럼 다양하다. 누가 그들을 가공할 소재 따위로 생각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닥터 지바고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9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닥터 지바고>란 책은 개인적으로 참 몰입하기 어렵다. 상권을 읽은 후의 솔직한 심정이다.

 

<의사 지바고>의 독자들 중에는 그 속에 든 작가의 내러티브가 명확하지 않다고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소설이다. 그리고 시인은 간결하고 통렬한 것을 좋아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에는 바이런적인 맛이 풍긴다. <김수영 전집 산문편. -311p->

 

김수영 전집에서 발견한 친숙한 제목 덕분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긴 했는데, 상권을 끝내고 중간의 감상을 말해보려는 지금 이 단계에서 “명확하지 않은 내러티브”가 무엇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닥터 지바고>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따로 메모해서 기억해두지 않으면 조금 후 다시 연관되어서 나열되는 새로운 이름에 파묻혀 소설을 읽어낼 수 없기에 조그만 메모장에 각 장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이름을 적는 수고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닥터 지바고>의 등장인물 묘사가 그의 글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읽은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거론된 '제 짝 아닌 훌륭한 신발 두개'와 같은 훌륭한 묘사방법. 다시 말해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두 단어를 사용하여 그 단어가 파생하는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인물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묘사들이 <닥터 지바고>에 자주 드러난다.

 

가령, <꽉 죄게 싸고 있는 옷소매 위에 잔주름이 잡힌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나이> 의 잔주름은 그의 경제적 상황이 그리 풍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벨기에인 기사의 미망인이자 러시아에 귀화한 프랑스 인> 에서 기사와 프랑스라는 단어는 파티문화를 즐기는 프랑스 인들의 귀족사회 모습이 오버랩되어 문란하고 자유분방한 의미를 부여한다.

 

급속도로 붕괴하는 세계의 압력 속에 든 서정시의 소리였다. 수많은 태도와 기분과 표현 속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소리는 본질적으로 서정적이고, 주관적이며, 외면상으로는 얼마간 밀봉적인 것이었다. <예술에서는 인간은 침묵을 지키고 이미지가 말을 한다.> <김수영 전집 산문편. -306p->

 

그리고 내전 중인 상황에 따른 공포스러운 분위기. 눈(雪)으로 설명될 수도 있는 모든 면에서 얼어붙어 있는 러시아의 묘사와 모스크바를 떠나는 열차에서 지바고가 맞이하는 봄과 폭포의 묘사까지. 시인이 표현할 수 있는 특수한 단어와 분위기의 선택은 자꾸만 그곳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들어주곤 한다.

 

다만, 이 모든 인물과 주위환경의 묘사가 그 시기의 러시아가 겪은 전쟁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 몰입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닥터 지바고>는 텍스트를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제한적인 공간만이 허락되고, 이 제한적 공간이 하나의 배경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명확한 내러티브를 야기하는 주요한 이유이다.

 

의사가 될 유리 지바고의 어린 시절 느낀 어머니라는 이름의 큰 상실에서부터 <닥터 지바고>는 시작된다. 이 상실감에 비명횡사하는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포개어지고, 전쟁이라는 사건이 가족과의 상실을 불러오며, 이념의 다툼이 인간성의 상실을 불러온다. 즉, 상권의 유리 지바고의 주요 테마는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라라의 테마는 자신의 위치에서의 탈출이라고 볼 수 있다. 꼬마로프스키와의 도가니스러운 부적절한 관계. 그를 노린 한발의 총알탄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떠나버린 남편을 찾아서 먼 곳으로 떠나는 그녀의 여정은 안정된 결혼생활을 꿈꾸는 그녀의 탈출기라고 생각된다.

 

죽은 줄로 알았던 라라의 남편. 스뜨렐리니코프 (=빠벨 빠블로비치 안치뽀프)과 유리 지바고의 만남으로 거대한 사건이 시작됨을 알린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서론만 잔뜩 쌓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사랑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윤용호 옮김 / 종문화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노인이 “엘리자베트!”라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테오드로 슈토름의 <첫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인의 추억 속 10살의 라인하르트에서 다시 노인으로 돌아오는 라인하트르의 여정들의 흐름은 순차적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 속설은 <첫사랑>의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을 암시하는 사물들과 그 암시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아려오는 감정이 두드러지면서 여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라인하르트의 갈색 외투와 비슷해 보이는 친구 에리히. 가깝지 않은 사이의 에리히가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면서 그린 그림. 에리히가 상속받는 임멘 호수의 커다란 농장. 라인하르트가 선물한 홍방울새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노란 카나리아.

 

에리히와 엘리자베트의 연관성을 띄는 다양한 암시들은 라인하르트가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건네준 -라인하르트의 기억 속 그녀의 모습을 담아 손수지은- 한 권의 시집과 영원히 함께하자고 속삭였던 약속을 유효하지 않은 폐지조각으로 만든다. 그러고 보니 산딸기를 따지 못한 채 산에서 내려오던 두 사람에게 노인이 말했던“게으른 자는 먹을 없이 없다네.”의 충격은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예견하는 또 하나의 암시다. 

 

엘리자베트가 에리히와 혼인했다는 사실을 듣고, 제법 세월이 흘러 에리히가 엘리자베트 몰래 라인하르트를 임멘호수의 집으로 초대했던 날. 완전히 엘리자베트를 소유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에리히와는 반대로 우리의 라인하르트가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특유의 감성은 에리히와 확연히 비교된다. 너무나도 섬세하면서도 낭만적이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들을 만들었을까요?” 엘리자베트가 물었다.

“아, 그건 노래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지. 재봉사들, 이발사들 같은 유쾌한 부류의 사람들이라오.” 에리히가 대답하자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그 노래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그것은 땅에서 자라기도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성모 마리아 이야기처럼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노래로 불려진다네.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 통해 우리 자신의 행위와 고뇌를 발견하는 법이지. 마치 모두가 그 노래를 짓는 데 힘을 모은 것처럼 말일세.” -78~79p-

 

라인하르트가 임멘호수 한가운데 피어있는 수련을 꺾기 위해 겪은 고초와 다시 한 번 둘이서 산딸기를 따러 갔지만 두 사람의 기억 속에 과거 그 시집 속에 있는 말라붙은 에리카만 남게 되는 이 슬픈 현실은 그들의 사랑이 이미 끝나버렸음을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상징들이다. 이처럼 <첫사랑>의 모든 사건은 상징의 연속이다.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어요.

내가 다른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예전에 내가 간직했던 것을,

내 마음은 그것을 잊어야 했어요.

내 마음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원망해요.

어머니가 잘못하신 거예요.

예전에는 영예로웠던 것이 지금은 죄가 되어 버렸어요.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나의 모든 자랑과 기쁨 대신

슬픔만 얻었어요.

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거친 들판 너머로

아, 나는 구걸하러 갈 수도 있을 텐데! -81p-

 

아마도 엘리자베트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감정이입하기에 충분해 보이는 지방의 민요를 듣고서 감추지 못하는 떨리는 손조차 두 사람의 사랑을 돌이킬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트에게 다시는 안 볼것이라고 말하고 떠난다. 어느 새 노인이 된 라인하르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제법 슬픈 첫사랑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오 바디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9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헨릭 시엔키에비츠가 <쿠오 바디스>에서 로마 사상의 대항마로 내놓은 그리스도교는 사랑과 용서라는 진리를 설파하고 내세를 기원하는 종교적인 특수성으로 로마인의 마음을 끌어당겼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만, 그리스도교가 가지를 뻗으며 자라나고 있는 과정과 광경이 이토록 감동적으로 그려지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시대의 많은 철학자가 네로황제 밑에서 제 한 몸 지키느라 로마인들을 외면했을 때, 그리스도교가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비상구를 열어준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대안이 가지는 상대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성의 의미란, 악의 성격이 잔인하고 그 세력이 크면 클수록 그것에 대항하는 선의 모습은 그 반대편의 모습에 따라 더욱 숭고하고 절실하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네로황제의 악랄한 모습과 악행의 결과가 2권 전체를 통해서 매우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네로의 악이 "내가 악마야!"라고 외치면서 저지르는 악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그 흐르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근데 그 결과가 매우 악독하다는 점에서 네로의 악의 크기가 얼마나 커다란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네로황제의 변태스러운 문학적 창작열이 불타올라 드디어 진짜 로마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러 온 로마가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타죽거나 불길을 피해 밖으로 뛰쳐나오는 백성들의 장면들은 나중에 등장하는 경기장 안에서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모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네로가 자신의 범죄사실을 은폐하고, 화재의 범인이 바로 그리스도 교인들이라고 몰아세웠을 때, 교인들은 억울함을 토로해볼 새도 없이. 감옥에 갇혀 열병으로, 경기장에서 굶주린 짐승에게 살과 내장이 터져, 각종 신화 속의 죽음을 재연하느라, 나중에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어간다. 이처럼 잔인한 박해에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가 쥐여준 한 가닥의 희망에 의존하면서 내세의 삶을 기대하며 조용히 순교의 길을 택한다.

 

순교자들 속의 킬로 킬로니데스를 향한 의사 글라시우스의 마지막 용서는 킬로로 하여금 참회의 눈물과 함께 네로가 화재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게끔 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킬로의 허물을 감싸주고 킬로 역시 순교의 길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앞에 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2권의 거대한 탄압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니키우스는 꾸준히 리기아를 구출해내려 애썼지만, 그의 바램과는 달리 사랑하는 리기아는 나체로 거대한 황소의 뿔 위에 묶이게 된다. 하지만 네로 황제가 예상한 결과와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때. 즉, 우르수스가 그 거대한 황소의 목을 비틀어버리는 상징적인 모습은 <쿠오 바디스>에서 가장 백미로 꼽을 만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잔혹한 그리스도교인의 순교사건 이후, 로마를 떠나려는 사도 베드로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쿠오 바디스 도미네”라고 묻는 베드로의 물음에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답한다.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로 하여금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순교라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들린다. 그리고 훗날 이들의 업적은 많은 이들에게 칭송된다.

 

하지만 네로 황제는 자신이 마치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 광기가 극에 달해 로마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로마를 떠나서 온갖 지역을 방랑하면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창작활동을 하다가 끝내는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결국, 약하고 선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교가 거대하지만 악한 네로의 로마제국을 끝내 무너뜨린다는 결말은 <쿠오 바디스>는 그리스도교의 종교가 가진 성격을 떠나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온 소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감동은 오랜 시간 식민지 생활에 지쳐있는 폴란드 사람들에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큰 용기를 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